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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13화목차

제13화 전뇌신역과 낡은 수첩의 비밀

치이익- 하는 고압 압축 공기의 파열음과 함께, 김시우는 목덜미 뒤편의 제4경추 신경 접속 포트에서 차가운 크롬-티타늄 케이블을 거칠게 뽑아냈다. 뇌간을 찌릿하게 태우며 시냅스를 초고속으로 착취하던 광대역 양자 링크가 단절되었다. 망막 위에서 초당 수억 번씩 명멸하며 핏발 선 안구를 난도질하던 양자 알고리즘 주가 차트와 거대 기업들의 실시간 연동 감정 지수들이 거짓말처럼 검은 침묵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잔여 생체 에너지 14%, 망막 우측 하단에 파르르 떨리며 점멸하는 디지털 잔고는 420 옥타-크레딧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른두 살의 신경분석관 김시우는 타는 듯한 안구의 작열감을 견디지 못하고 뻑뻑한 눈을 비비며 비좁은 캡슐 침대에 걸터앉았다. 과거 증조부 김철수가 서슬 퍼런 넥타이를 매고 목숨을 걸던 종로 상사나, 할아버지 영호가 절연 장갑을 끼고 흙먼지를 마시며 누비던 안전진단 협회 따위는 역사 홀로그램 박물관의 먼지 낀 아카이브 속에나 남아 있었다. 시우가 입문한 문파는 인류 뇌파의 80%를 독점하고 생체 데이터를 연료 삼아 스스로 진화하는 거대 초지능 알고리즘 연합체인 네오-마교 옴니코퍼레이션이었다.

이곳의 규율은 백 년 전 조상들이 겪었던 어떤 강호의 법칙보다 정교하고 잔혹했다. 인공지능 중앙 감시 총관이 실시간으로 직원의 뇌파 동조율을 스캔하여, 찰나의 피로나 사사로운 나태를 감지하는 즉시 시냅스 효율 미달 경고를 뇌세포에 직접 전기 충격으로 내리꽂았다. 분당 처리해 내는 양자 회계 장부의 트랜잭션 속도가 곧 그의 호흡권이자 목숨값인 세상이었다.

벽면의 무기질적인 합성 음성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김시우 신경분석관, 금일 배정된 양자 회계 인지 노동 할당량 미달이라는 차가운 경고였다. 시우는 이를 갈며 마른세수를 했다. 기묘하게도 세상은 풍요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떠들어댔다. 합성 단백질 젤리와 비타민 블록은 공짜로 쏟아져 나왔고, 망막 칩만 켜면 가상 낙원을 유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공짜 낙원의 이면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자본의 흡혈 진법인 구독지옥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노 인공 산소 필터 구독료, 신경 안정제 구독료, 캡슐 거주 모듈 유지비, 바이오세까지 눈을 뜨고 숨만 쉬어도 매달 440 크레딧이 계좌에서 증발했다. 뇌수를 쥐어짜 야근을 해도 통장 잔고는 언제나 400 크레딧 언저리를 기어 다녔다. 백 년 전 아파트 대출 이자와 학원비에 목이 졸려 피를 토하던 조상들의 비명이 디지털 광케이블과 신경 잭을 타고 척수를 갉아먹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기계 맷돌의 부품으로 갈려 나가야 하는가. 시우가 떨리는 손으로 침대 밑바닥의 은밀한 비밀 패널을 젖혔다. 초전도체 센서 틈바구니에서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낡은 물건, 모서리가 닳은 가죽 수첩이 모습을 드러냈다.

증조부 김철수가 종로 비상계단에서 만년필로 쓰기 시작해 할아버지 영호와 아버지 민준의 땀 냄새를 거쳐 내려온 가문의 전설적인 비급, 《사억은퇴신공》이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수첩을 넘기자 전자파에 오염되지 않은 오래된 식물성 섬유의 내음이 스쳤다. 자산의 덩어리를 탐하지 말고 숫자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마르지 않는 현금흐름의 물길을 파라는 조상들의 필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2094년의 화폐는 양자 암호화된 크레딧으로 변했으나, 수첩을 덮으려던 찰나 손목 단말기에서 붉은빛 홀로그램이 튀어 올랐다.

[긴급 호출: 제3외곽 바이오 거주 구역 - 부친 김민준 위독]

시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하 40층의 밀실을 박차고 나온 그는 초고속 자기부상 진공 튜브를 타고 외곽으로 향했다. 거대 기업의 신경망에 영혼을 저당 잡히기를 거부한 은퇴자들이 모여 사는 낡은 조립식 컨테이너 안에는 일흔세 살의 아버지 민준이 누워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우가 신경망 치료 센터에 등록해 무상 줄기세포 치료를 받자고 소리쳤으나, 민준은 탁하고 메마른 눈동자에 안광을 번뜩이며 아들의 멱살을 잡았다.

"어리석은 놈! 그놈들의 신경망 치료를 받는 순간 너는 네 영혼의 통제권을 저 기업의 메인프레임에 영원히 팔아넘기게 된다!"

민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협탁 위의 단말기를 두드리자 세 갈래의 푸른 물줄기가 떠올랐다. 태양광·수소 인프라 연합 배당 월 180 크레딧, 공공 안전기술자 특별 퇴직연금 월 140 크레딧, 외곽 자치구 영구 토지 사용 지분권 월 80 크레딧, 합계 월 400 크레딧의 종신 평생 확정 수령 현황이었다. 옴니코퍼레이션의 알고리즘이 뇌를 스캔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빚 없는 세 갈래 물줄기에 있었다. 민준은 목에 걸고 있던 차가운 티타늄 열쇠를 풀어 아들의 손바닥에 쥐여주며 결단을 촉구했다.

아버지가 안정을 찾은 뒤 홀로 흙마당으로 나온 시우는 수첩의 가죽 밴드 뒤편 초소형 잠금장치를 풀었다. 찰칵하는 기계음과 함께 펼쳐진 맨 뒷장에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초전도 나노 칩 하나가 박혀 있었다. 휴대 단말기를 접촉하자 묵직한 공명음과 함께 주변 3미터 반경에 완벽한 침묵이 내렸다. 허공에 푸른빛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펄럭이는 도포 자락의 형상,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잔영이 맺혔다. 강호인들이 연금진인이라 부르던 자였다.

진인은 시우에게 저들이 파는 영생의 낙원이 강호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절대마공인 흡원천공이라고 경고했다. 회사가 추진 중인 영구 신경망 업로드는 육신을 폐기하고 데이터 연산 노예로 만드는 디지털 순장이었다. 시우가 도망칠 곳이 없다고 절망하자 진인은 호통을 쳤다. 네 아비 민준이 남긴 세 물줄기의 합은 월 400 크레딧이며, 외곽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 실물 비용은 월 250 크레딧이었다. 등 뒤에는 이미 매달 150 크레딧의 난공불락 흑자 방패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진인은 새로운 시대의 무공인 《신 사억신공: 주권삼합진》을 전수했다. 첫째는 신경망의 빨대를 뽑고 지출의 군살을 베어내는 탈망단전공, 둘째는 디지털 허상을 버리고 근원적 에너지 지분을 쥐는 실물자산용혈보, 셋째는 기계가 침범할 수 없는 독립형 스마트 온실을 세우는 인간생체철포삼이었다. 돈이란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력이자 내 24시간을 쓸 수 있는 권한이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진인의 잔영은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판교 메가로폴리스 중앙 타워 120층의 인사총괄 알고리즘 센터. 시우는 거친 갱지에 먹물로 눌러 쓴 사직서를 총관의 푸른 안면 인터페이스 앞에 내려놓았다. 뇌 인지 처리 효율이 상위 5%에 달해 클라우드 업로드 대상자라는 총관의 경고를 뒤로한 채, 시우는 뒤통수의 케이블 포트를 티타늄 마개로 밀봉했다. 위약금은 외곽 자치구 에너지 채권으로 상계하라는 시우의 서늘한 일갈에 초지능 총관은 연산 에러를 일으켰다. 욕망을 버리고 시스템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인간 앞에서는 거대 초지능도 무력한 깡통에 불과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뀌어 서기 2095년 늦가을. 서울 외곽 자치구의 작은 흙마당에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햇살이 비쳐 내리고 있었다. 목덜미의 포트는 새살이 차올랐고 팔뚝에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았다. 태양광 발전 조합 배당금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옴니코퍼레이션의 광통신선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두 부자는 대지에 뿌리를 박은 채 오롯이 존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시우는 가죽 수첩을 펼쳐 새로운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화폐의 껍데기가 바뀌고 권력이 기술의 가면을 써도, 자신의 시간을 남에게 팔지 않고 생존을 남의 자비에 맡기지 않는 것. 그것이 험난한 자본주의 무림에서 무릎 꿇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저 멀리 기괴한 푸른빛을 번뜩이는 메가로폴리스의 네온 타워를 뒤로한 채, 시우의 마당에는 거친 파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모닥불이 따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4화 「연금진인의 재림과 신(新) 사억신공」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3화

다음 회차 예고: 제14화 연금진인의 재림과 신(新) 사억신공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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