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믹스커피의 향기와 맑은 뜰의 안식
마당 한구석에 심어둔 매화나무의 가지 위로 늦가을의 서늘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영호는 평상에 가만히 앉아 오래된 가죽 수첩의 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반세기 전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아버지가 처음 쥐여주었던 그 낡은 물건은 이제 마흔다섯이 된 아들 민준의 품을 거쳐, 열일곱 살 손자 시우의 눈앞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 이 수첩에 적힌 4억이라는 숫자는 진짜 돈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열일곱의 시우가 맑은 눈망울로 영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강호의 문턱에 선 청춘의 호기심과 긴장이 서려 있었다. 영호는 껄껄너스스로 웃음을 터뜨리며 손자의 단정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래, 시우야. 눈에 보이는 숫자는 한때 번쩍이다가도 폭풍우 한 번에 눈 녹듯 사라지는 거품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돈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돈이 마르지 않고 흘러오게 만드는 물길의 방향이지."
영호는 마당 한편에 파여 있는 작은 돌확을 가리켰다. 졸졸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맑은 물을 뿜어내는 세 줄기의 대나무 관은 십수 년 전 진인의 가르침 아래 단단히 다져놓은 자산의 방패였다. 노동의 땀방울이 맺히는 첫 번째 물줄기, 글로벌 인프라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밀어 올리는 배당의 두 번째 물줄기, 그리고 국가의 법령과 제도가 허리춤을 받쳐주는 연금의 세 번째 물줄기. 이 세 가지 섭리가 하나로 모여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백 년 동안 이어진 가문의 무공인 만류귀종의 진수였다.
민준은 아버지가 건네준 수첩을 두 손으로 받들어 가슴에 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몇 년 전까지 물류센터에서 지게차를 몰며 얻었던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젊은 날 양자 펀드의 레버리지에 미쳐 모든 것을 날릴 뻔했던 그날 밤, 아버지가 자신을 냉정하게 내동댕이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 평온한 한옥 마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저도 잘 알겠습니다. 숫자에 현혹되지 않고, 제 손으로 파놓은 이 세 갈래의 물길을 제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겠습니다."
민준의 목소리에 깃든 단단한 힘을 확인한 영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핏줄 속에는 이제 헛된 요행을 바라는 마도(魔道)의 유혹이 아니라, 스스로 땀 흘려 쌓아 올린 방패의 기운이 굳건히 뿌리내려 있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어올 때마다 마당가에 심어진 국화 향기가 뜰 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뇌리에 반세기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쉰다섯의 나이에 협회의 녹슨 사물함을 비우고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그날의 공포가 생생했다. 13년이라는 칠흑 같은 소득단절혈의 사막을 건너며, 매달 153만 원의 교량연금을 태워 없애고, 건보료혈도의 흡혈을 피하고자 구청의 안전 점검원복을 껴입었던 그 비장했던 발걸음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거대한 춤사위였구나."
영호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쉰다섯의 노병이 칼을 쥐고 벌벌 떨던 그 자리에는 이제 일흔다섯의 고요한 검객이 남았다. 세상의 전광판은 여전히 붉고 푸른 숫자를 반짝이며 수많은 투기꾼들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이 맑은 뜰 안만큼은 그 어떤 폭풍우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요새였다.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쌉싸름하면서도 구수한 믹스커피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영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허공 저편에서 백발의 연금진인과 선친 김철수가 나란히 서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환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영호야, 참으로 질기고도 아름답게 물길을 이었구나."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영호는 푸른 가을 하늘을 향해 조용히 목례를 올렸다.
"여보! 다들 나와요, 밥상 다 차렸어요!"
주방 문이 활짝 열리며 아내의 다정한 부름이 마당 가득 울려 퍼졌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와 갓 지은 쌀밥의 온기가 저녁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뚝배기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안경알을 하얗게 적셨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쌀밥과 슴슴한 된장국, 그리고 아내가 직접 손수 무쳐낸 나물 무침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영호는 상석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던 것은 노쇠함 때문이 아니었다. 반세기 동안 거친 강호의 칼바람을 맞으며 지켜낸 평화가 비로소 제 손아귀에 온전히 안겼다는 묵직한 감격 때문이었다.
"어르신, 드시지요."
민준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먹었고, 손자 시우도 덩달아 밥을 크게 한 술 떠넣으며 감탄을 터뜨렸다. 영호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밥을 씹었다. 씹을수록 밥알에서 우러나오는 단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과거 쉰다섯의 나이에 벼랑 끝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식은땀을 흘리던 밤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맛이었다. 그 시절, 매달 빠져나가는 153만 원의 교량연금이 목을 조아려오는 뱀처럼 느껴졌고, 물가의 화마가 곳간을 태울까 두려워 밤잠을 설쳤었다. 하지만 그 모든 13년의 암흑혈을 견뎌낸 끝에 찾아온 지금은, 국가의 연금과 글로벌 배당의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통장을 채워주고 있었다.
밥상을 물린 뒤, 영호는 마당의 평상으로 다시 나와 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서쪽 하늘을 핏빛보다 붉은 노을로 물들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켜자, 세 개의 계좌에서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자산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국민연금의 묵직한 입금 내역, 글로벌 인프라 배당의 규칙적인 알림, 그리고 튼튼하게 버티고 선 국채의 안전망까지. 그 어떤 투기꾼의 감언이설이나 양자 펀드의 마진콜 공포도 이 견고한 삼진(三陣)의 진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돈이란 좇는 자에게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지만, 흐름을 꿰뚫고 다스리는 자에게는 가장 충직한 방패가 되는 법이다.
"할아버지,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보십니까?"
문을 열고 나온 시우가 영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소년의 눈빛에는 훗날 자본주의 강호에 뛰어들 청춘의 호기가 서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은 묵직한 생존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영호는 시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빌라 담장 너머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았다. 바람 속에는 묘하게도 오래전 아버지가 태우던 담배 연기의 쌉싸름함과, 연금진인이 품고 다니던 찻잎의 향기가 섞여 나는 것만 같았다.
"시우야, 강호는 언제나 변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펜대 하나로 먹고살았고, 네 아비 때는 양자 컴퓨터니 코인이니 하며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갔지. 앞으로 네가 살아갈 세상은 또 어떤 괴수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영호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네가 네 발로 디디고 선 이 단단한 대지다. 노동으로 땀을 흘리고, 시스템으로 열매를 거두며, 제도로 남의 칼날을 흘려보내는 법을 잊지 마라. 그것만 지킨다면 세상의 그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너는 네 삶의 주인을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시우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마당 한구석에 심어진 매화나무의 잔가지가 서늘한 저녁 바람에 흔들리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영호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코끝을 스치는 믹스커피의 향기와 밥 냄새 속에서, 비로소 은퇴라는 기나긴 수련의 끝이 완벽한 완결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3화 「전뇌신역과 낡은 수첩의 비밀」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2화
다음 회차 예고: 제13화 전뇌신역과 낡은 수첩의 비밀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