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만류귀종의 전승과 세대의 물길
가을볕이 고즈넉한 한옥 마당의 평상 위로 맑은 온기가 내려앉았다. 마당 한구석에 깊게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의 후계목이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드리운 채 세월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일흔다섯의 나이가 된 영호는 정갈하게 정돈된 마당 평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낡은 자산 장부의 숫자들을 차분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헌칠한 풍채의 중년 사내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마흔다섯의 장년이 된 아들 민준이었다. 민준은 이제 종합 건물관리 회사의 총괄 소장이라는 무거운 직함을 지닌 채,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단단하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터였다. 그의 곁에는 교복 자켓을 단정하게 걸친 열일곱 살의 손자 시우가 묵묵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 바람이 제법 찹니다. 약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민준이 품에서 작은 도자기 호리병을 꺼내어 영호의 앞에 놓인 찻잔에 정성스럽게 맑은 청주를 따랐다. 잔을 채우는 손길에 떨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거친 강호의 비바람 속에서 숱하게 꺾이고 부러질 뻔했던 가문의 혈맥이, 이제는 스스로 단단한 방패를 쥐고 흔들림 없이 자라난 것이다.
영호는 청주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받아 가볍게 입술을 적신 뒤, 품 안쪽에서 낡고 해진 가죽 수첩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반세기 전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아버지 김철수가 처음 펼쳐 들었던 그 수첩이었고, 쉰다섯의 영호가 피를 토하며 이어받았던 바로 그 유산이었다. 겉표지에는 영호가 직접 굵은 금박으로 덧새긴 《사억은퇴신공 : 만류귀종 편》이라는 글귀가 서릿발처럼 빛나고 있었다.
영호는 그 묵직한 수첩을 아들 민준의 두 손 위에 정중히 올려놓았다. 수첩이 닿는 순간, 민준의 굵은 손마디가 살짝 떨렸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생존의 무게이자, 백 년 동안 이어진 가문의 무공을 온전히 이어받는 엄숙한 의식이었다.
"민준아."
"예, 아버지."
"이 수첩의 첫 장을 펼치면 4억이라는 숫자가 크게 적혀 있지. 허나 백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삼부자가 이 거친 자본주의 강호에서 피를 흘리며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 숫자가 4억이든, 5억이든, 아니 그 이상의 거금이든 간에 그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열일곱의 손자 시우가 신기한 눈빛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에 들린 낡은 수첩을 응시했다. 영호는 손자의 부드러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돈의 덩어리만을 좇는 자는 평생 숫자의 노예가 되어 공포 속에 허덕이지만, 현금흐름의 맑은 물길을 파는 자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 평생을 자유롭게 살아간다. 네가 앞으로 걸어 나갈 강호는 지금보다 훨씬 더 흉포한 괴수들이 도사리고 있을 게다."
영호의 눈빛이 마당 담장 너머를 향해 깊고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때로는 인공지능의 폭주로, 때로는 물가의 화마로, 때로는 뜻하지 않은 질병과 시련이라는 자객의 모습으로 네 목을 죄어올 것이다. 그때마다 눈앞의 숫자를 보고 겁에 질려 네 성벽의 문을 함부로 열지 마라."
영호는 마당 한편에 마련된 작은 돌확으로 졸졸 흘러드는 세 줄기의 맑은 물길을 가리켰다.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그 물길은 마당의 화단을 거쳐 땅속 깊은 곳으로 유연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리 지독한 가뭄이 찾아와 세상의 강물이 바닥을 드러내더라도 결코 마르지 않는 세 개의 물줄기만 단단히 파 두어라. 첫째는 내 두 발과 손을 움직여 세상과 당당히 소통하는 노동의 물줄기요, 둘째는 위대한 자본주의의 거함에 올라타 평생토록 과실을 나누어 마시는 시스템 배당의 물줄기이며, 셋째는 국가의 제도를 방패 삼아 노년에 평생토록 보장받는 연금의 물줄기다."
세 줄기의 물길이 마침내 하나로 모여 거대한 바다를 이루듯, 영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평정심이 깃들었다.
"이 세 물줄기가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너는 세상 그 어떤 칼바람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네 존엄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백 년 동안 이어진 우리 가문의 검법이자 무공, 만류귀종의 진정한 의미다."
민준은 두 손으로 가죽 수첩을 가슴 깊이 품어 안았다. 그 수첩의 무게는 천만금의 황금보다 무거웠고, 세상 그 어떤 금융공학 교과서보다 날카롭고 숭고한 생존의 진실을 품고 있었다.
그때, 마당 담장 너머로 맑고 서늘한 가을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바람결 속에는 문득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믹스커피의 향기가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듯했다. 허공의 저편에서 백발의 연금진인과 아버지 김철수가 나란히 서서 껄껄 웃으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환영이 스치는 것 같았다.
'영호야, 참으로 질기고도 아름답게 물길을 이었구나.'
영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푸른 가을 하늘을 향해 조용히 목례를 올렸다. 선친도, 은인도 이제는 칼을 내려놓고 영겁의 평안 속에 쉬고 있을 터였다.
"여보, 밥상 다 차렸어요! 어서들 안으로 들어오세요!"
주방의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며 아내의 다정한 목소리가 마당 가득 따스하게 울려 퍼졌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와 갓 지은 쌀밥의 온기가 늦가을의 차가운 저녁 공기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 안으로 들어간다. 시우야, 민준아, 들어가서 따뜻한 밥부터 먹자."
마당을 가로지르는 세 대의 그림자는 각각 다른 연배의 족적을 담고 있었으나, 그 보폭의 깊이만큼은 어쩌면 저리도 닮아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민준은 앞서 걷는 아버지의 등 뒤를 바라보며 지난날 자신이 양자 펀드의 늪에 빠져 울부짖던 그 밤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절망했던 그 순간, 아버지가 던져준 개인회생 서류와 냉혹했던 거절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이 단단한 발걸음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현관 마루에 나란히 벗어 둔 신발 무더기 속에서, 손자 시우의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아직은 세상의 거친 비바람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열일곱 살의 풋풋한 운동화였지만, 그 밑창에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만류귀종의 가르침이 묵직한 씨앗처럼 심어져 있었다. 영호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손수건으로 자신의 굳은살 박힌 손바닥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할아버지, 이 수첩에 적힌 검법은 칼을 휘두르는 법이 아니라 돈을 다루는 법이라면서요?"
마루에 나란히 앉은 시우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영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자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렇단다. 강호의 고수들이 칼끝으로 사람을 베듯, 자본주의 강호에서는 돈이 곧 칼이고 방패다. 허나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가 명검을 쥐면 제 손목이 잘리듯, 현금흐름의 원리를 모르는 자는 거금을 쥐어도 결국 파멸의 길로 떨어지는 법이지."
영호는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둘러보았다. 뚝배기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은 세상 그 어떤 고급 영약의 증기보다 편안했고,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는 백 년 무림의 역사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었다. 아내와 며느리가 함께 준비한 저녁 식탁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절대의 요새였다.
"자, 다들 수저 들거라."
영호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 따뜻한 밥 한 술을 입에 넣었다. 쌀알 씹히는 고소함이 혀끝을 감돌며, 지난 십수 년간 이 가문이 통과해 온 모든 고난과 환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남긴 《사억은퇴신공》의 마지막 장은 비어 있었다. 그 빈 페이지는 앞으로 시우와 민준이 살아갈 새로운 세대의 강호 속에서 직접 써 내려가야 할 몫이었다.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가문의 검법은 과연 손자의 손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로 흘러갈 것인가? 영호는 밥그릇을 비우며 깊고 단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호는 입고 있던 두루마기의 옷자락을 털고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 이상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운 검객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강호의 모든 풍파를 제 힘으로 당당히 건너와, 마침내 제 삶의 고요한 뜰에 안착한 한 인간의 가장 자유롭고 평온한 발걸음이었다. 붉게 물든 가을 노을 아래, 세 대의 굳건한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전광판은 여전히 붉고 푸른 탐욕의 빛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들이 발을 디딘 집 안에는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절대의 방패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2화 「믹스커피의 향기와 맑은 뜰의 안식」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1화
다음 회차 예고: 제12화 믹스커피의 향기와 맑은 뜰의 안식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