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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10화목차

제10화 십삼 년의 모래시계와 오아시스의 문

"아버지…… 정말 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합니까?"

민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법원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 서른 살의 청년은 법원 인가가 박힌 개인회생 및 채무조정 서류를 앞에 두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양자 펀드의 파산으로 덮쳐왔던 1억 2,000만 원의 마진콜은 아버지의 냉혹한 거절 덕분에 강제 청산이라는 최악의 벼랑 끝을 모면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아버지는 단 1원의 현금도 손에 쥐여주지 않은 채, 오직 법의 냉정한 심판대와 땀방울 흘리는 노동의 십자가만을 아들의 어깨에 지워주었다.

"네가 저지른 업보다. 네 손으로 싼똥은 네 손으로 치워라."

쉰다섯의 김영호는 굳은 표정으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30년 전 선친 김철수가 자신에게 겨누었던 서릿발 같은 단절검법의 기운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그날 이후, 민준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랐다.

낮에는 서울 구로의 거대한 물류센터로 출근해 섭씨 40도가 넘는 철제 컨테이너 안에서 지게차의 핸들을 잡았다.

무거운 파렛트를 지게차 포크에 정확히 밀어 넣는 소리는 쇠스랑이 부딪히는 비명 같았고, 쏟아지는 땀방울은 눈을 찔러 시리도록 매웠다.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상머리에 앉으면 눈꺼풀이 천 근 무게로 내려앉았지만, 영호가 매일 밤상에 올려주는 따뜻한 된장국과 현미밥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차비 한 푼, 담뱃값 한 푼 허투루 쓰지 않는 아버지의 철저한 규율 속에서, 민준은 5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도망치지 않았다.

서기 2065년 봄, 마침내 5년의 채무 조정이 끝났다.

민준은 법원으로부터 발급된 최종 변제 완료 확인서와 함께 국가공인 '전기공사기사' 및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품에 안았다.

거칠어진 손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깊어진 눈빛에는 방황하던 청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쌀쌀맞은 추상(秋霜)이 결국 아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무림 속의 진짜 기술자로 단련시켜 놓은 셈이었다.

세월은 비정할 만큼 공평하게 흘러, 마침내 서기 2072년 늦가을이 찾아왔다.

김영호의 나이 예순여덟.

아버지가 쓰러졌던 나이를 넘어, 자신이 협회 사물함을 비우고 13년의 칠흑 같은 소득단절혈을 건너온 바로 그 약속의 날이었다.

창밖으로 늦가을의 쓸쓸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 영호의 손목에 채워진 단말기가 맑은 알림음을 울렸다.

[국민연금공단] 2072년 10월분 노령연금: 2,140,000원 입금 완료.

"드디어…… 터졌구나."

영호는 턱을 떨며 단말기의 푸른 화면을 응시했다.

쉰다섯에 하산하여 매달 살점을 도려내듯 13년 동안 버텨왔던 156개월의 모래사막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손발을 묶던 족쇄가 풀리며, 국가가 보증하는 거대한 오아시스의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영호는 곧바로 자산 계좌를 열어 삼진(三陣)의 형세를 확인했다.

제1진이었던 교량현금류 2억 4,000만 원은 지난 13년간 매달 153만 원씩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져나가 마침내 잔고 '0원'을 기록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다리는 완전히 불타 무너졌으나, 그 다리를 밟고 건너온 영호는 무사히 저편의 안식처에 발을 디뎌 있었다.

다리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국가의 연금뿐만이 아니었다.

제2진이었던 영구배당진의 2억 원은 글로벌 인프라와 AI 에너지망의 성장 과실을 묵묵히 흡수하며 도리어 2억 8,0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세후 배당금은 매달 120만 원의 실개천이 되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다.

제3진 완충철포벽 역시 위기의 순간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며 5,000만 원의 비상금을 온전히 지켜냈고, 국채 이자를 더해 8,500만 원의 두터운 쿠션으로 살아남았다.

합산된 현금흐름은 찬란했다.

국민연금 월 214만 원, 글로벌 인프라 영구배당 월 120만 원, 국채 안전 이자 월 25만 원.

순수 비근로 영구 파이프라인으로 매달 359만 원의 은전이 통장에 쏟아지고 있었다.

원금은 3억 6,500만 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부채는 단 1원도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영호의 귓가에 둔탁하면서도 정겨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당귀퉁이를 돌아서는 민준의 손에는 거친 몽키스패너가 꽂힌 공구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제는 서른일곱의 장정이 된 아들은 예전의 철없던 도박꾼의 모습은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단단한 턱선과 굳은살 박힌 손바닥을 가진 어엿한 현장 소장이었다.

"아버지, 날이 많이 찹니다. 창문 닫으시지요."

민준이 마당의 수도가에서 대충 손을 씻으며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는 스마트 단말기를 주머니에 넣고 미소를 지으며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차갑지만 상쾌한 늦가을의 공기가 거실 안으로 훅 밀려들며, 묵은 때처럼 남아 있던 13년의 곰팡이 냄새를 단숨에 씻어냈다.

"기다려라. 오늘 네가 좋아하는 두루치기를 해 둘 테니."

"아버지가 직접 하신다고요? 어째 요새 요리 실력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십니다."

민준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마당의 평상에 주저앉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십삼 년의 서릿발 같은 공포와 원망은, 이제 서로가 흘린 땀방울이라는 거름 속에서 완전히 녹아내려 단단한 토양이 되어 있었다.

영호는 주방으로 걸어가 앞치마를 둘렀다.

예전 같으면 장바구니에 적힌 물가 상승률을 계산하며 10원짜리 동전 하나에 손을 떨었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바다처럼 깊고 평온했다.

통장에 찍히는 매달 359만 원의 현금흐름은 세상의 그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절대의 요새였다.

밥솥에서 뜸이 잘 든 쌀밥의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된장찌개 속 두부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는 마치 자본주의의 거친 무림 속에서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늙은 검객의 심장 소리처럼 묵직하고 안정적이었다.

영호는 국자를 내려놓고 잠시 거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세상 떠난 아버지 김철수의 눈빛이 왠지 오늘은 더욱 인자하고 따스하게 영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셨습니까, 아버지. 저도 제 방패를 지켜냈고, 제 새끼의 영혼도 구해냈습니다.’

영호의 입가에 옅은 자부심의 미소가 번졌다.

상탁한 국물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김이 거실의 서늘한 공기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영호는 뚝배기에 송송 썬 대파를 얹고 불을 껐다.

손끝에 남아 있는 미세한 온기 속에는 쉰다섯의 사내 지갑을 짓누르던 벼랑 끝의 공포 대신, 수십 년간 묵묵히 깎고 다듬어 완성한 단단한 방패의 감촉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마당 평상에 앉아 스마트 단말기를 들여다보던 민준이 거실 안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 냄새가 예술입니다. 이러다간 제가 독립할 생각은 안 하고 평생 아버지 밥상만 축내게 생겼는데요?"

"언제는 독립하겠다고 양자 펀드에 전 재산을 박아 넣더니, 이제 철이 좀 들 모양이구나. 정 살고 싶으면 네 방에 들어갈 전기 배선이나 한 번 더 점검해라."

영호가 앞치마를 벗어 의자등에 걸치며 껄껄 웃었다.

아들의 장난스러운 핀잔을 받아치는 목소리에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여유와 힘이 가득했다.

과거였다면 자식이 던지는 가벼운 농담조차 미래의 불안을 자극하는 비수처럼 박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국민연금의 든든한 철옹성과 글로벌 배당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뒤를 받쳐주고 있는 한, 이 작은 한옥 마당에 불어오는 바람은 더 이상 두려운 흉풍이 아니었다.

창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13년 전 지하 사물함 문을 닫으며 비틀거렸던 패잔병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폭풍우를 온몸으로 맞아내고 마침내 강호의 진정한 주인이 된 노검객의 형형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모든 승부를 끝낸 늙은 검객의 마당에는 과연 어떤 백년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가.

그것은 칼끝에 스치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방패가 만들어낸 고요하고도 따스한 생명의 훈풍이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11화 「만류귀종의 전승과 세대의 물길」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0화

다음 회차 예고: 제11화 만류귀종의 전승과 세대의 물길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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