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십삼 년의 암흑혈과 교량연금순환보
서기 2059년 늦가을, 김영호의 나이 쉰다섯.
아버지 김철수가 영면한 지 세 번째 기일이 지나던 날, 잿빛 겨울비가 서울 변두리의 콘크리트 외벽을 가혹하게 적시고 있었다. 영호는 30년 넘게 청춘을 바쳤던 안전진단 협회의 지하 사물함 문을 묵묵히 열었다. 녹슨 캐비닛 안에는 기름때 묻은 절연 장갑과 낡은 테스터기,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쥐여주었던 가죽 수첩 《사억은퇴신공》이 누렇게 바랜 채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 짐을 챙겨 회전문을 나서는 영호의 등 뒤로 후배 검객들의 웅성거림이 비수처럼 꽂혔다.
"김 부장님, 진짜로 칼을 버리고 하산한답니까? 환갑도 까마득한데 요즘 난세에 뭘 믿고 절벽을 뛰어내리는 겁니까?"
"선친에게 강남 빌딩이라도 물려받았겠지."
물려받은 빌딩 따위는 강호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30년간 지켜내며 매달 82만 원의 피를 짜내주었던 아파트는 환수 규정에 따라 정산 처분되었고, 원리금을 공제하고 손에 쥔 유산 잔여금은 2억 4,000만 원이었다. 거기에 아버지가 쓰러졌던 날부터 단절검법을 휘둘러 깎아 모았던 자신의 IRP와 미국 배당 적립금 3억 1,000만 원을 더해 합산 금융자산 5억 5,000만 원. 외곽의 낡은 연립빌라 한 채가 쉰다섯의 노병 김영호가 쥔 방패의 전부였다.
어둑한 집으로 돌아온 영호는 식탁 위에 통장 세 개와 계산기를 올리고 아버지의 수첩을 펼쳤다. 은퇴는 해방이 아니라 칼날 위에 맨발로 서서 버텨야 하는 또 다른 영겁의 수련이었다. 아버지가 피를 흘렸던 시대와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가장 흉포한 자객은 초고령화의 파도 속에서 조정이 파놓은 함정, 바로 '소득단절혈'이었다.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예순여덟까지 밀려나 있었다.
"쉰다섯에 협회 문을 닫았으니, 연금이 터져 나오는 예순여덟까지 무려 13년의 암흑기가 가로놓여 있다."
13년은 자그마치 156개월이었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여 한 가정이 한 달을 버티는 데 필요한 은전은 400만 원에 육박했다. 5억 5,000만 원으로 156개월을 버티며 원금을 온전히 보존한다? 매달 400만 원씩 파먹으면 예순여섯이 되기도 전에 곳간이 바닥날 판이었다. 영호의 손마디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때 베란다 창문 틈으로 차가운 북풍이 스며들며 형광등이 날카롭게 깜빡였다.
"놈, 30년 전 네 아비가 하산할 때 짓던 그 패잔병의 눈빛으로 계산기를 째려보고 있구나."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고개를 돌리자, 어두컴컴한 베란다 문턱에 낡은 바람막이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반세기 전 아버지에게 은퇴의 비급을 내렸던 연금진인이었다.
"진인 어르신……!"
"네 아비가 방패를 물려주고 떠났거늘, 그를 쥐고도 절벽 앞에서 사색이 되어 떨고 있으니 내 어찌 눈을 감고 있겠느냐!"
진인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보온병의 구수한 보리차를 잔에 따랐다.
"네 아비는 4억이라는 쇳조각으로 30년의 파도를 넘어 승리했다. 그런데 너는 5억 5천을 쥐고도 왜 벌써 목이 잘린 귀신처럼 떠느냐?"
"국민연금의 문은 예순여덟까지 닫혔고, 물가의 화마는 흉포합니다. 이 돈을 헐어 쓰면 파산하고 말 것입니다!"
진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볼펜을 낚아채 백지에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13년의 흑암을 건너 저편 언덕으로 도약하는 유일한 보법, 《사억은퇴신공 제3권: 교량연금순환보》를 새겨주마. 네가 쥔 자산은 한 덩어리가 아니다. 셋으로 쪼개어 각기 다른 방위를 지키게 해야 한다."
첫째는 교량현금류 2억 4,000만 원이다. 주택 잔여금과 퇴직연금을 절세 계좌에 봉인해 두고, 쉰다섯부터 예순여덟까지 딱 13년 동안 매년 1,840만 원, 즉 매달 153만 원씩 살점을 베어내듯 인출해 생활비로 쓴다. 다리라는 것은 건너편에 발을 디디는 순간 불태워 없애도 되는 법이다. 예순여덟이 되는 아침, 30년간 적립해 온 국민연금이 물가상승률의 갑옷을 입고 매달 200만 원 안팎으로 쏟아지며 바통을 이어받는다.
둘째는 영구배당진 2억 원이다. 글로벌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리츠에 묻어두어 세후 연 6%의 과실로 매달 100만 원의 배당을 만든다. 이 원금은 숨이 멎는 날까지 단 1원도 헐지 않는다.
셋째는 완충철포벽 1억 1,000만 원 중 6,000만 원은 단기국채로 월 17만 원의 이자를 더하고, 5,000만 원은 시장이 피바다에 잠겨도 보지 않는 '무호흡 비상금'으로 둔다. 고정 현금흐름은 월 270만 원으로 완성된다.
"목표 생활비 400만 원에 130만 원이 모자랍니다." 영호의 말에 진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공백을 메우겠다고 파생상품에 손을 대는 순간 너는 독충에게 뜯겨 죽는다. 그 부족분은 오직 근로의 반격으로 채워야 한다!"
"다시 남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하란 말씀입니까?"
"주 3일, 네가 평생 갈고닦은 안전진단 자격증을 활용해 노후 시설물의 안전 점검을 돌며 가볍게 몸을 움직여라. 그로써 벌어들이는 월 130만 원은 방패의 수명을 연장하는 윤활유이자, 강호의 가장 잔혹한 흡혈귀인 건보료혈도를 단칼에 봉인하는 비수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지역가입자로 굴러떨어지면 건강보험공단이 빌라와 배당 소득 전체를 훑어 매달 수십만 원의 피를 빨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 15시간 이상 직장가입자 신분을 유지하면 건보료는 몇만 원대로 묶인다. 이것이 바로 늙은 검객이 곳간을 지키는 '위장취업보'의 극의였다.
이듬해 봄, 영호는 삶의 진형을 완성했다. 구청 산하 시설 안전 점검원으로 주 3일 일하며 월 135만 원의 근로소득을 올렸고, 교량연금 153만 원과 배당금 100만 원이 더해져 월 388만 원의 순환선이 만들어졌다. 영호의 가슴에 처음으로 평온한 안식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숙명 앞에서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봄비가 몰아치던 어느 날 자정, 비에 젖은 큰아들 민준이 피멍이 든 얼굴로 들이닥쳤다.
"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
스마트폰 화면에는 신경망 양자 토큰 마진콜 경고와 함께 긴급 추가 증거금 1억 2,000만 원을 미납 시 전 자산이 압류된다는 문구가 빛나고 있었다.
"인공지능 양자 사모펀드에 100배 레버리지를 당겼는데 데이터센터 화재로 지수가 90% 증발했습니다! 오늘 새벽까지 1억 2천을 채워 넣지 않으면 전 감옥에 갑니다!"
아들은 방바닥을 기며 할아버지의 주택 정산금에서 1억만 꺼내 달라고 오열했다. 30년 전 자신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었던 참혹한 밤의 재현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완충철포벽에 묻어둔 1억 1,000만 원의 비상금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쥐려는 영호의 귓전에 아버지의 영정 속 서릿발 같은 눈빛과 진인의 호통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손을 멈춰라, 김영호!"
영호는 손가락을 거두어 주머니에 찌르고 아들의 손을 냉정하게 내동댕이쳤다.
"안 된다."
"아버지는 편하게 살면서 아들이 파멸하는 꼴을 보시겠다고요?!" 아들의 원망에 영호는 피눈물을 흘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다. 훗날 내가 늙고 병들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 네 등골을 파먹지 않으려고 쌓아둔 가문의 마지막 방패다. 오늘 네 빚을 막아주면 너는 내일 또 도박판을 기웃거릴 것이다. 네가 저지른 탐욕의 업보는 네 살점과 뼈로 치러라."
영호는 서랍에서 개인회생 워크아웃 신청서를 꺼내 아들의 가슴팍에 던졌다. 자식의 살을 도려내는 거절이었으나 영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혹독하게 베어내어 살려냈듯, 이 시린 거절만이 아들의 영혼을 구하고 가문의 방패를 지키는 길이었다. 과연 자본주의의 흉포한 파도 속에서 이 삼진의 진형은 아비를 구원했던 것처럼 아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회차 예고: 제9화 「양자마도의 함정과 살을 르는 거절」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8화
다음 회차 예고: 제9화 양자마도의 함정과 살을 르는 거절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