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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7화목차

제7화 사억은퇴신공의 전승과 맑은 바람

서기 2056년 늦가을. 철수의 나이 아흔다섯이었다.

창밖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뜰 안 가득 황금빛 잎을 비처럼 쏟아내던 날, 철수는 자신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음을 고요히 직관했다. 온몸을 순환하던 기력이 저녁노을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사흘에 걸쳐 집 안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냉장고를 비우고, 공과금 자동이체를 해지했으며, 식탁 위에 낡은 가죽 수첩 하나와 세 통의 편지, 통장 세 개를 정돈해 올려두었다.

그리고 공증 변호사와 아들을 불렀다.

"영호야, 가까이 앉거라."

아들은 이제 쉰여섯의 깊은 주름을 가진 중후한 노신사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단단한 눈빛을 쏙 빼닮은 눈이었다.

"내 명의의 아파트는 주택금융공사에서 법대로 경매 처분할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이 애비와 네 어미가 타먹은 연금 원리금과 이자를 제하고 나면, 대략 2억에서 3억 원 안팎의 잉여금이 남을 게다. 그 돈은 네 상속분으로 온전히 귀속될 것이니, 남은 부채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보태거라."

"아버지……."

"그리고 여기 남은 통장 잔고 2,800만 원. 내 장례는 가장 소박하고 조용하게 치러라. 번지르르한 조화도 일체 받지 말고, 부의금도 받지 마라. 그저 너희 가족끼리 모여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나누어 먹고, 나를 네 어머니 곁에 나란히 묻어다오. 남은 돈은 내 손주 녀석들 학비에 보태 쓰면 부족함이 없을 게다."

철수는 서른 살 종로의 비상계단에서부터 써 내려왔던 손때 묻은 가죽 수첩을 아들의 두 손 위에 얹어주었다. 겉표지에는 굵은 매직으로 《사억은퇴신공(四億隱退神功)》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가죽은 헐어 헤졌고 모서리는 닳아 문드러졌으나, 그 안에는 한 인간이 반세기 동안 거친 자본주의 무림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밀고 나간 핏빛 생존의 기록과 수학적 규율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었다.

"영호야, 나는 문파의 노예로 태어났으나…… 내 생의 마지막 40년은 오롯이 내 시간의 주인으로 살았다. 돈 앞에 비굴하지 않았고, 시장의 탐욕과 공포에 무릎 꿇지 않았으며, 네 어머니의 존엄을 내 손으로 끝까지 지켜냈다. 자본주의 강호에 태어나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통쾌하고 아름다운 한판 승부였다."

철수는 힘겹게 손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하고 맑은 가을바람이 밀려들어와 백발 노병의 깊은 주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람결 속에서 문득 은은한 믹스커피 향이 번져오는 듯했다. 65년 전,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마주했던 연금진인이 푸른 허공에서 허허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철수야, 참으로 질기게 잘 버텨냈다. 이제 그만 칼을 거두고 편히 쉬어라.'

철수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메마른 입가에 티 없이 맑고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들은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 낡은 가죽 수첩을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통곡이 아니었다. 한 거인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떠난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자의 숭고한 결의였다.

바람이 뜰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댓돌 아래 놓인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유독 쓸쓸해 보였다.

영호는 아버지가 남긴 가죽 수첩을 품에 품은 채,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수첩 표지에는 수십 년 동안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험난한 자본주의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인간이 피를 토하며 새겨 넣은 생존의 오의이자, 자식을 향한 가장 무겁고도 단단한 사랑의 증거였다.

"변호사님."

영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변호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을 정리했다.

"고인께서 생전에 남기신 말씀 그대로 절차를 밟겠습니다. 장례는 화장으로 모시고, 유골은 사모님께서 계신 납골당에 나란히 안치할 것입니다. 부의금과 조화는 일절 받지 않는 것으로 공고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가시는 길, 가장 외롭지 않게 제 손으로 직접 모시겠습니다."

영호는 마루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지만,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무덤덤하게 숨을 골랐다.

불과 몇 년 전, 회사에서 쫓겨나 마이너스 통장마저 바닥을 쳤을 때만 해도 그는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다. 아버지가 5천만 원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칼같이 거절했을 때는 원망스러웠고, 자식의 눈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철석같은 모습이 매정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오늘, 그가 남긴 수첩을 품에 안은 순간 영호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은 돈을 구하는 법이 아니라, 돈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뗏목을 젓는 법이었다.

집안을 정리하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선 영호는 아버지가 쓰던 낡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책상 위에는 돋보기안경과 몽당연필 몇 자루, 그리고 김이 식은 보리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평생을 숫자에 얽매여 1원 한 장 가볍게 여기지 않고 살았던 늙은 무사의 흔적이었다.

영호는 돋보기안경을 집어 들었다. 그 속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매섭기만 했다.

밖에서는 AI 알고리즘이 광속으로 주가를 밀어 올리고 내리며 수많은 개미들의 혼을 빼놓고 있었고, 금리는 또다시 요동을 치며 서민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세상은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잔인한 미로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영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에게는 세상 그 어떤 보검보다 강력하고 날카로운 《사억은퇴신공》의 비급이 있었다.

지출을 단칼에 베어내는 단절검법, 티끌 같은 노동의 땀방울을 모아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소액흡원공, 그리고 노후의 방패를 굳건히 지키는 역전퇴직연금환까지. 아버지가 반평생의 패배와 승리를 통해 빚어낸 무공의 구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잘 가십시오."

영호는 창밖을 향해 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마당의 은행나무는 여전히 황금빛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고, 맑고 청명한 가을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뜰 안을 평화롭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영호는 문득 깨달았다.

인간은 누구나 거친 강호에 홀로 던져진 나그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고, 자본의 흐름을 이해하며, 가족의 존엄을 지켜낸 자에게는 비록 늙어 스러질지언정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떳떳한 해방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대문을 나서는 영호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주머니 속의 낡은 수첩은 가벼운 종이 뭉치에 불과했지만, 손바닥에 전해지는 무게감은 금괴 수십 냥보다 더 묵직하게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목,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실시간으로 나스닥 지수가 폭락하고 있다는 자극적인 뉴스 속보가 번쩍였지만, 영호는 무심하게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불나방처럼 뛰어들지 말고, 공포에 질려 도망치지 마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가 아닌 뼈마디마다 박히는 듯했다.

그는 깨달았다. 강호에서 살아남는 자는 세상의 파도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자가 아니라,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자기가 쥔 뗏목의 노를 놓지 않는 자라는 것을.

집으로 돌아온 영호는 곧바로 서재의 불을 켰다.

책상 위에 아버지가 남겨둔 낡은 가죽 수첩을 정갈하게 펼쳤다. 펜을 든 그의 손끝에서 떨림이 멎고, 결연한 기도가 깃들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지출의 허영을 베어내고, 남은 땀방울을 모아 가장 단단한 자본의 지분에 밧줄을 묶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애비로,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당당히 통제하는 주인의 자리로 걸어갈 터였다.

창문 너머로 밤하늘의 별이 유독 맑고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강호의 계절은 다시 돌고 돌며 수많은 이들의 목을 겨누겠지만, 늙은 검객이 물려준 위대한 비급을 품은 아들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회차 예고: 제8화 「십삼 년의 암흑혈과 교량연금순환보」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7화

다음 회차 예고: 제8화 십삼 년의 암흑혈과 교량연금순환보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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