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우공이산의 뗏목과 인공지능의 칼춤
아내 정순이 단풍잎이 붉게 물들던 지난가을, 철수의 거친 손을 꼭 쥔 채 고요히 눈을 감았다. 욕창 하나 없이 눈부시게 깨끗한 살결로, 반평생 곁을 지켜준 남편의 마지막 기도를 받으며 평온하게 영면에 들었다.
병원비를 모두 정산하고 통장에 남은 잔액은 3,200만 원이었다. 철수는 단 한 푼의 빚도 지지 않고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을 오롯이 지켜냈다.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주택금융공사에 배우자 사망 신고를 마쳤다. 연금 규정에 따라 아내의 몫은 정리되었으나, 주택연금은 그가 숨을 쉬는 한 매달 82만 원을 변함없이 통장으로 밀어 넣어주고 있었다.
그사이 세상은 무섭도록 변해 있었다. 서기 2052년의 강호는 더 이상 옛날의 셈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인공지능 자객들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장악했고, 양자컴퓨터의 초단타 알고리즘이 인간의 얄팍한 차트 분석을 비웃으며 하루에도 수천억 달러의 자금을 쓸어 담았다 뱉어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는 사람 대신 홀로그램 안내원이 떠돌았고, 증권가의 객장은 전용 단말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에 휩싸여 차가운 기계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쉰둘이 된 영호가 다시 아버지를 찾아온 것은 늦가을의 찬 비가 거실 창문을 사납게 두드리던 어느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영호는 몰라보게 단단한 무인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1년 전 희망퇴직의 칼바람을 맞고 눈물 흘리던 나약한 사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호는 젖은 코트를 툭툭 털어내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는 첨단 금융 시장의 거대한 폭풍을 마주한 자의 두려움과 결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아버지, 세상이 너무 빠르고 어지럽습니다. 월가의 날고긴다는 펀드매니저들도 인공지능에게 목이 잘려 나가고, 알고리즘이 매일 시장에 폭락과 폭등의 파도를 만듭니다. 제 볼품없는 매달 80만 원짜리 적립식 뗏목이 이 거대한 괴물들의 파도를 버텨낼 수 있을지 문득문득 두려워집니다."
철수는 차가운 보리차 주전자를 집어들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거실의 서늘한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영호야. 50년 전 닷컴 버블 때도 컴퓨터가 세상을 집어삼킨다며 난리를 쳤고, 30년 전 금융위기 때도 복잡한 파생상품 알고리즘이 인간을 멸망시킬 거라 떠들어댔다. 도구의 껍데기는 화려해졌으나 돈의 본질과 인간의 탐욕, 그리고 공포라는 원초적 감정은 단 0.1밀리미터도 변하지 않았어."
철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흙이 담긴 베란다 화분의 시든 잎을 가위로 툭 잘라냈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날고뛰어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전기를 켜야 하고, 식료품을 사 먹어야 하며, 화물을 실은 배는 대양을 건너야 한다. 위대한 글로벌 기업들은 그 속에서 악착같이 이윤을 창출해 주주에게 배당을 바치지. 기계들의 현란한 칼춤에 넋을 잃고 네 칼을 헛되이 휘두르지 마라. 너는 그저 가장 거대하고 도도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거함에 네 작은 뗏목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두기만 하면 된다."
"뗏목을…… 묶어둔다."
"그래. 탐욕의 불기둥이 솟구칠 때 빚을 내어 불나방처럼 뛰어들지 않고, 공포의 폭락장이 닥쳤을 때 기계들의 투매에 질려 네 뗏목을 네 손으로 도끼질해 부수지만 않으면 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쟁이 터지거나 역병이 돌거나, 매달 네 정직한 노동의 땀방울을 가장 우량한 자본의 지분으로 바꾸어 차곡차곡 모아가는 것. 그것이 백만 개의 양자컴퓨터 알고리즘을 침몰시키는 유일한 인간의 무공, 우공이산식 무한적립공이다."
영호는 무릎을 탁 치며 길게 탄성을 내뱉었다. 시대가 바뀌고 무기가 레이저로 변한다 한들, 강호에서 살아남는 심법은 오직 하나였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고, 흔들리지 않는 규율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
서기 2056년 늦가을. 철수의 나이 아흔다섯이었다. 창밖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뜰 안 가득 황금빛 잎을 비처럼 쏟아내던 날, 철수는 자신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음을 고요히 직관했다. 온몸을 순환하던 기력이 저녁노을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사흘에 걸쳐 집 안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냉장고를 비우고, 공과금 자동이체를 해지했으며, 식탁 위에 낡은 가죽 수첩 하나와 세 통의 편지, 통장 세 개를 정돈해 올려두었다. 그리고 공증 변호사와 아들을 불렀다.
"영호야, 가까이 앉거라."
아들은 이제 쉰여섯의 깊은 주름을 가진 중후한 노신사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단단한 눈빛을 쏙 빼닮은 눈이었다.
"내 명의의 아파트는 주택금융공사에서 법대로 경매 처분할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이 애비와 네 어미가 타먹은 연금 원리금과 이자를 제하고 나면, 대략 2억에서 3억 원 안팎의 잉여금이 남을 게다. 그 돈은 네 상속분으로 온전히 귀속될 것이니, 남은 부채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보태거라."
"아버지……."
"그리고 여기 남은 통장 잔고 2,800만 원. 내 장례는 가장 소박하고 조용하게 치러라. 번지르르한 조화도 일체 받지 말고, 부의금도 받지 마라. 그저 너희 가족끼리 모여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나누어 먹고, 나를 네 어머니 곁에 나란히 묻어다오. 남은 돈은 네 손주 녀석들 학비에 보태 쓰면 부족함이 없을 게다."
철수는 서른 살 종로의 비상계단에서부터 써 내려왔던 손때 묻은 가죽 수첩을 아들의 두 손 위에 얹어주었다. 겉표지에는 굵은 매직으로 《사억은퇴신공》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가죽은 헐어 헤졌고 모서리는 닳아 문드러졌으나, 그 안에는 한 인간이 반세기 동안 거친 자본주의 무림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밀고 나간 핏빛 생존의 기록과 수학적 규율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었다.
"영호야, 나는 문파의 노예로 태어났으나…… 내 생의 마지막 40년은 오롯이 내 시간의 주인으로 살았다. 돈 앞에 비굴하지 않았고, 시장의 탐욕과 공포에 무릎 꿇지 않았으며, 네 어머니의 존엄을 내 손으로 끝까지 지켜냈다. 자본주의 강호에 태어나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통쾌하고 아름다운 한판 승부였다."
철수는 힘겹게 손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하고 맑은 가을바람이 밀려들어와 백발 노병의 깊은 주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람결 속에서 문득 은은한 믹스커피 향이 번져오는 듯했다. 65년 전, 종로의 비상계단에서 마주했던 연금진인이 푸른 허공에서 허허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철수야, 참으로 질기게 잘 버텨냈다. 이제 그만 칼을 거두고 편히 쉬어라.'
철수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메마른 입가에 티 없이 맑고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들은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 낡은 가죽 수첩을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통곡이 아니었다. 한 거인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떠난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자의 숭고한 결의였다.
강호의 계절은 다시 돌고 돌 것이며, 시장의 파도는 또다시 누군가의 목을 겨누며 매섭게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파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단단한 무인 하나가 여기 우뚝 서 있었다. 노병은 떠났으나, 그의 무공은 자식의 핏줄을 타고 영원히 흐르고 있었다. 마당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7화 「사억은퇴신공의 전승과 맑은 바람」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6화
다음 회차 예고: 제7화 사억은퇴신공의 전승과 맑은 바람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