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자녀혈루의 시험과 혈맥의 물길
거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요란하게 마루를 두드리던 섣달그믐의 밤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매서운 북풍이 낡은 새시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살점을 파고드는 듯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덜컹거리더니, 젖은 코트를 걸친 사내가 비틀거리며 거실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섰다. 큰아들 영호였다. 마흔여덟. 철수가 정확히 30년 전 명예퇴직의 서늘한 비수를 맞고 종로 지하철역 비상계단에서 피눈물을 삼켰던 바로 그 서글픈 나이였다.
영호의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핏발이 곤두선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움푹 파인 볼은 며칠 동안 밥 한 술 제대로 뜨지 못한 사람의 형색이었다.
"아버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찢어지는 듯 갈라져 있었다. 영호는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못한 채 거실 마루 바닥에 무릎을 쿵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를 들썩이며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철수는 삐걱거리는 낡은 목재 의자에 앉은 채 천천히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들의 비참한 등 뒤로 30년 전 자신의 겹겹이 찌그러진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철수의 얼굴빛은 북풍한설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이 지랄이냐."
철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영호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뱉어냈다.
"문파에서…… 잘렸습니다. 희망퇴직이라는 칼바람이 불어 닥쳐서, 저 같은 중간 관리자들은 하루아침에 짐을 싸서 쫓겨났습니다. 퇴직금은 작년에 영끌해서 덜컥 사들인 송도 아파트 담보대출 원금을 갚느라 단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영호의 입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말마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금리는 미친 듯이 치솟고 집값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이라 대치동 학원비에 생활비, 대출 이자까지 매달 500만 원이 넘게 나갑니다. 퇴직하자마자 배달 대행도 뛰고 밤마다 대리운전까지 해봤지만, 지난달 카드값을 못 막아 마이너스 통장 한도 5천만 원마저 바닥을 쳤습니다."
영호가 고개를 번쩍 들며 철수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염치없는 줄 알지만…… 어머니 요양병원비로 묶어두신 비상금 중에 딱 5천만 원만 융통해 주십시오. 2년 안에, 제가 어떤 막노동을 뛰어서라도 반드시 악착같이 갚아놓겠습니다. 제발 제 가족 좀 살려주십시오, 아버지!"
강호의 무림인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자녀혈루의 시험이 마침내 늙은 철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평생을 피땀 흘려 모아 은퇴의 철옹성을 쌓아 올린 노부모들이 마지막 순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시장의 폭락이나 인플레이션의 마수보다 자식의 피눈물 앞이 더 취약했다. 자식의 애원 앞에 스스로 성벽의 빗장을 풀고 곳간의 마지막 곡식까지 다 퍼주다, 종국에는 부모와 자식이 손을 잡고 파멸의 심연으로 함께 굴러떨어지는 것. 그것이 은퇴 무림의 가장 참혹한 멸문 공식이었다.
거실 안에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작두 날처럼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철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걸어갔다. 삐걱거리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금고 깊숙한 곳에서 낡은 통장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아들의 코앞에 통장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열어 보아라."
영호가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펼쳤다. 찍혀 있는 잔고는 8,200만 원.
"이게 지금 네 어머니의 생명줄이다. 매달 160만 원씩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져나가고 있어. 네 어머니가 요양병원 침대에서 기저귀가 짓물러 썩어가지 않게, 살점이 문드러지는 욕창이 번지지 않게 지켜주는 마지막 방패란 말이다."
"아, 아버지……."
"내가 오늘 너를 가엾게 여겨 여기서 5천만 원을 뽑아 쥐여주면, 1년 뒤 네 어머니는 어느 길바닥으로 쫓겨나야 하느냐? 기저귀 갈아줄 사람이 없어 오물 속에 누워 있어야 하느냐, 아니면 아흔 살 처먹은 이 늙은 애비가 리어카를 끌고 나가 파지를 주워와야겠느냐?"
영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을 잇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쾅쾅 이마를 찧으며 오열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미쳤었습니다…… 잊어주십시오……."
철수는 천천히 몸을 굽혀 아들의 바짝 마른 어깨를 억척스럽게 움켜쥐었다. 노인의 눈가에 서릿발 같은 엄격함과, 그 이면에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핏빛 애통함이 엉켜 있었다.
"일어나라. 은퇴 무림의 사내놈이 자식새끼 밥그릇 하나 깨졌다고 방바닥에서 울긴 왜 우느냐!"
철수는 통장을 도로 거두어 품에 깊숙이 집어넣고, 아들의 차가운 손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돈을 줄 수는 없다. 허나, 내 반평생 자본주의 강호의 피바람을 뚫고 살아남은 비급의 정수를 물려주마. 일어서서 눈을 닦고 귀를 열어라."
철수는 식탁 위에 거친 갱지를 펼치고 몽당연필을 집어 들었다. 노인의 손끝은 쉼 없이 파르르 떨렸으나, 종이를 내리누르는 기백은 삼십 대 청년 검객보다 형형했다.
"영호야, 강호의 어리석은 아비들은 자식에게 덩어리 돈을 물려주려다 제 명을 단축하고 자식의 숨통까지 끊어놓는다. 수억의 현금이나 아파트 한 채를 덥석 쥐여주면, 상속세마존이 칼을 들고 달려들어 절반을 베어가고, 금융 근육이 단련되지 않은 자식은 그 목돈을 사업이나 코인, 사기꾼의 먹잇감으로 던져 3년 안에 길바닥으로 나앉지."
철수는 연필로 갱지 한가운데에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 하나를 긋고, 그 곁에 세 개의 작은 수로를 깊게 파 내려갔다.
"자산의 덩어리를 탐하지 마라. 오직 현금흐름의 물길을 파야 한다. 네가 오늘 당장 문파에서 목이 잘렸더라도 살아남는 법은 단 하나다. 지출의 방어벽을 극단으로 좁히고, 네 등 뒤로 흘러 들어오는 파이프라인의 개수를 늘리는 것이다."
철수는 아들의 핏발 선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세 가지 구결을 써 내려갔다.
첫째, 허영의 군살을 단칼에 베어내는 단절검법.
"아이들 학원비 200만 원? 내일부터 당장 끊어라. 자식 학벌 만들어주겠다고 발버둥 치다 네 노후가 파산하면, 훗날 그 자식에게 네 간병비라는 수억의 빚더미를 고스란히 안겨주게 된다. 부모의 노후 파산이야말로 자식의 등골을 파먹는 가장 잔혹한 저주다. 500만 원 쓰던 생활비를 내일부터 250만 원으로 강제 축소해라. 체면? 대기업 과장 출신이라는 자존심? 굶어 죽고 길바닥에 나앉는 것보다 더 큰 수치는 강호에 없다."
둘째, 작은 물길을 모아 바다를 이루는 소액흡원공.
"배달이든, 빌딩 경비든, 물류센터 야간 분류든, 체면을 내던지고 네 몸뚱어리를 던져 매달 150만 원의 고정 현금을 반드시 만들어라. 노동으로 버는 고정 수입 150만 원은, 연 4% 배당을 주는 무결점 금융자산 4억 5천만 원을 네 등 뒤에 짊어진 것과 수학적으로 완벽히 동일하다. 노동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자본주의 강호에서 가장 먼저 뼈가 발리는 법이다."
셋째, IRP의 봉인을 목숨 걸고 지키는 역전퇴직연금환.
"퇴직연금 통장에 묶여 있는 돈을 절대 깨서 빚을 갚지 마라. 그 돈에 손을 대는 순간 너의 쉰다섯, 예순다섯은 생지옥이 된다. 세액공제와 저율과세라는 철갑을 두르고, 그 안에서 나스닥 지수와 배당 인프라의 씨앗을 눈덩이처럼 굴려라."
철수는 몽당연필을 탁 내려놓고 아들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내가 네게 물려줄 수 있는 진짜 유산은 5천만 원짜리 부도 수표가 아니다. 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셔두고도 애비가 굶지 않고 버텨내는 이 시스템의 설계도다. 이 비급을 가슴뼈에 새기고 오늘부터 네 손으로 네 방패를 깎아라. 그리하면 너는 쉰다섯에 반드시 살아서 자립할 것이다."
아들은 눈물로 얼룩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었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쥐어 가지 못했으나, 그의 굽었던 등줄기에 서서히 단단한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눈앞을 가리던 공포의 안개 너머로 마침내 걸어가야 하던 외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6화 「우공이산의 뗏목과 인공지능의 칼춤」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5화
다음 회차 예고: 제6화 우공이산의 뗏목과 인공지능의 칼춤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