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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4화목차

제4화 백세유마의 선봉장과 비소구의 금강진법

여든여섯의 봄은 찰나였고, 겨울은 살점을 도려내는 비수처럼 길고 잔인했다. 마당 한구석의 늙은 매화나무가 세 번째 꽃망울을 피워 올리던 서늘한 새벽, 평생 남편보다 한 발 먼저 일어나 구수한 보리차를 끓여내던 아내 정순이 이부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여보…… 다리가, 내 다리가 말을 안 들어요."

그 가녀린 한마디는 지난 30년간 철수가 피땀으로 쌓아 올린 평온한 은퇴의 요새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벼락이었다. 뇌혈관의 미세한 지류 하나가 막히며 아내의 우측 신포가 굳어버렸고, 뒤이어 섬망과 인지장애라는 짙은 흑암이 그녀의 맑았던 영혼을 가차 없이 래어먹기 시작했다. 구급차의 비명과 대학병원 중환자실의 기계음을 거쳐 늙은 부부가 닿은 곳은 인적 드문 산자락 아래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요양병원이었다.

굳게 닫힌 원무과 창구 너머로 차가운 하얀 계산서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건강보험공단 지원금을 제외하고, 6인실 공동간병 기준으로 간병비만 매달 180만 원입니다. 여기에 성인용 기저귀, 경관식 영양제, 욕창 방지 매트, 비급여 물리치료비까지 더하면 매달 최소 320만 원을 결제하셔야 합니다. 만약 섬망이 심해져 1대 1 개인 간병인을 쓰시게 되면, 순수 간병비만 월 450만 원으로 치솟습니다."

철수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창백한 종이 위의 숫자를 응시했다. 젊은 날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흑풍마교의 폭락이나 외환위기의 칼바람보다 백 배는 더 음흉하고 잔혹한 괴물. 강호의 모든 은퇴 고수를 종국에 빈털터리로 만들어 길바닥에 패대기친다는 백세유마의 선봉장, '간병마존'이 마침내 아가리를 벌린 것이었다.

"매달 삼백이십만 원이라……."

철수의 뇌리 속에서 60년간 단련된 숫자의 주판알이 번개처럼 튕겨나갔다. 현재 부부의 확정된 현금 파이프라인은 물가상승률이 연동되어 올라간 국민연금 180만 원과, 낡은 아파트를 담보로 묶어둔 주택연금 82만 원, 합산 262만 원이었다. 아내의 병원비 하나를 틀어막기에도 매달 58만 원이 적자였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밥을 짓고 공과금을 내며 생존해야 하는 철수 자신의 최소 생활비 100만 원을 더하면, 매달 158만 원이라는 피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가는 형국이었다.

어두운 밤, 텅 빈 거실로 돌아온 철수는 먼지 앉은 낡은 철제 금고를 열었다. 젊은 날 연금진인에게 전수받았던 흡원천공의 잔해와 펀드가 반세기의 세월을 버텨내며 맺어준 마지막 비상 자금, 약 1억 4,000만 원이 계좌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매달 160만 원씩 녹여내면 여든일곱 달. 딱 7년짜리 모래시계로군."

아내의 야윈 손을 잡고 방바닥을 치며 통곡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강호의 늙은 검객은 비탄 대신 숫자의 비수를 갈아야 했다. 은퇴는 안식이 아닌 냉혹한 지구전이었으며, 늙음이란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잔혹한 전장이었다.

간병 3년 차, 철수의 나이는 여든아홉에 도달했다. 계좌의 모래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무섭게 빠져나갔다. 아내의 욕창 치료제와 기저귀, 휠체어 대여료로 이미 4,500만 원의 피가 빠져나갔다. 장대비가 거실 창문을 사납게 때리던 어느 날 오후, 철수는 거실 벽에 걸린 누렇게 바랜 등기권리증을 묵묵히 응시했다. 반세기 전 피땀 젖은 통장으로 마련했던 25평짜리 복도식 아파트.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82만 원의 산소를 공급해 준 주택연금의 진원지였다.

초인종이 울리고, 젖은 레인코트를 입은 주택금융공사의 조사관이 들어섰다.

"어르신, 사모님께서 장기요양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전산 통보를 받고, 주택연금 실거주 예외 승인 서류를 최종 확인하러 왔습니다."

서류에 도장을 찍던 조사관이 거실을 둘러보며 안타까운 낯빛으로 말을 건넸다.

"어르신, 매달 간병비와 병원비로 고초가 극심하시다 들었습니다. 차라리 이 낡은 집을 지금 시장에 처분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재건축 이슈로 집값이 꽤 뛰어 지금 매도하시면 최소 8억 원은 쥐실 수 있습니다. 그 목돈을 쥐고 보증금 싼 임대주택으로 옮기시면, 사모님 병원비를 대고도 수억 원이 남아 훨씬 숨통이 트이실 텐데요."

철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리차를 밀어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젊은이, 모르는 소리 말게. 이 집은 단순한 시멘트 덩어리가 아닐세."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서 순간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내가 서른 살에 깨달은 주택연금의 진짜 무공은 매달 나오는 몇십만 원의 은전이 아니라, 바로 '비소구의 금강진법'이었네. 내가 아흔에 죽든, 백 살을 훌쩍 넘겨 살아남든, 공단은 내 아내와 내가 모두 숨을 거둘 때까지 매달 82만 원을 토해내야 하지. 설령 부부가 백세 장수를 누려 그동안 타먹은 연금 원리금과 이자의 총합이 집값 8억을 훌쩍 넘어 12억, 15억이 되더라도, 공단은 내 자식들에게 단 1원의 빚도 청구하지 못해."

조사관의 펜 끝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노인은 금융공학의 가장 깊은 이면을 꿰뚫고 있었다.

"반대로 집값이 폭등해 연금 수령액보다 집값이 훨씬 많이 남는다면? 우리가 둘 다 떠난 뒤 공단이 집을 정산 처분하여, 남은 수억의 은전은 고스란히 내 자식의 품으로 상속되지. 상승장의 과실은 상속인에게 열려 있고, 하락장과 장수의 리스크는 국가가 떠안는 이 절대적인 비대칭의 방패를 왜 내 손으로 부수겠는가? 지금 집을 팔아 양도세를 털리고 쥔 목돈 8억? 병원비로 야금야금 파먹히다 사기꾼이라도 꼬이거나, 시퍼런 복마전 같은 주식판에 던져 날려버리면 그땐 내 처와 내가 어느 길바닥에 누워 비를 피하겠는가?"

조사관은 서류를 챙겨 들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창밖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거실의 시계 소리는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낡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철수의 머릿속에는 오늘 하루 병원에서 본 아내의 흐린 눈빛이 화인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세상의 모든 부를 거머쥐면 강호의 풍파를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건만, 막상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도달해 마주한 진짜 괴물은 거대한 수치나 폭락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속절없이 부서져 내리는 육신의 허무함과, 그 곁을 지키며 매달 빠져나가는 차가운 은전의 무게였다.

철수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영수증을 꺼내어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병원비와 기저귀 값, 그리고 각종 소모품 비용으로 터져 나가는 현금의 흐름은 마치 둑이 터진 저수지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았다. 칠십 년 동안 단련해 온 숫자의 감각과 강호의 전장을 버텨낸 끈기가 그의 뼈마디마다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내게는 허물어지지 않는 마지막 방패가 남아 있다."

철수는 속으로 낮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비록 아내의 병환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통장의 모래시계는 야속하게 줄어들고 있으나, 주택연금이라는 든든한 진법이 등 뒤를 단단히 받쳐주고 있는 이상 쉽게 무너질 일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바람이 늙은 검객의 백발을 거칠게 헤집고 지나갔다.

멀리 아파트 단지 너머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녘의 여명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삶의 전장은 여전히 혹독하고 안식 없는 지구전의 연속이었으나, 철수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늙은 검객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5화 「자녀혈루의 시험과 혈맥의 물길」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4화

다음 회차 예고: 제5화 자녀혈루의 시험과 혈맥의 물길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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