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하산의 날, 359만 원의 허상
"선배님, 정말 나가시는 겁니까? 요즘 장도 흉흉한데……."
인사팀 후배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받으며, 철수는 책상 위에 사직서를 내던졌다. 도장이 찍히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25년 동안 목을 죄어오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 시간을 내가 쓰러 간다."
스물다섯에 입문해 반평생을 바쳤던 문파였다. 상사의 미간 주름을 읽던 독심술도, 비상계단에서 식은 캔커피를 씹어 삼키던 인내공도 오늘로 끝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엑셀 대신 계산기를 두드렸다. 연금진인이 가르쳐 준 세 마리 맹수를 부릴 시간이었다.
배당흡원천공으로 쥐어짜 낸 월 166만 5,000원.
성장천룡공에서 살점을 베어내 얻은 월 102만 4,800원.
현금철포삼의 이자 8만 4,600원.
그리고 5억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잡혀 얻는 주택연금장생공 월 82만 원.
합계 359만 4,400원.
"해냈다. 350만 원을 넘겼어."
철수는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통장에 찍힐 숫자를 떠올리며 마침내 해방감에 젖어 들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연금진인의 차가운 음성이 귓가를 때리듯 메아리쳤다.
"어리석은 놈. 359만 원 중에 나라가 보증하는 돈은 주택연금 82만 원뿐이다. 나머지 277만 원은 매일 요동치는 시장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처박고 타오는 돈이야. 9% 배당이 원금을 갉아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나스닥이 네 밥값을 매년 벌어줄 줄 알았더냐?"
철수는 계산기를 쥔 손을 멈췄다. 방 안의 침묵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은퇴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거칠고 잔인한 강호의 시작일 뿐이었다.
은퇴 4년 차, 2040년 겨울.
연금진인의 경고는 기어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다. 미국의 금리 발작과 기술주 거품 붕괴가 동시에 터진 것이다.
나스닥 지수가 넉 달 만에 38% 폭락했다. 증권사 HTS 화면은 온통 시퍼런 멍투성이였다. 철수의 1억 2,000만 원짜리 성장형 ETF는 원금이 7,000만 원 턱밑까지 주저앉았다. 고배당 ETF마저 분배금을 깎겠다는 공시를 띄웠다.
"이 가격에 주식을 팔아서 생활비를 대라고? 손이 떨려서 매도 버튼을 못 누르겠어……."
심장이 옥죄어와 밤잠을 설쳤다.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마켓의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귓가에 노인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스쳤다.
‘현금철포삼을 써라.’
철수는 성장주 매도를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통장에 묵어두었던 4,000만 원의 봉인을 뜯었다.
매달 100만 원씩 쪼개어 생활비로 밀어 넣었다. 잔고는 정직하게 줄어들었다. 3,000만 원, 2,000만 원, 1,200만 원…….
모래시계의 모래가 바닥을 향해 쏟아질 때마다 피가 마르는 듯했다. 아내와 외식을 끊었고, 보일러 온도를 1도 낮췄다.
그리고 기적처럼 34개월 차가 되던 해, 짓눌렸던 시장이 바닥을 치고 반등하기 시작했다.
헐값에 팔아치우지 않고 지켜낸 성장형 자산이 제 숨을 되찾았다. 철수는 알았다. 이 싸움의 승패는 수익률 따위에 있지 않았다. 가장 비참할 때 내 자산을 헐값에 내던지지 않는 맷집, 그것이 바로 방패의 진의였다.
2046년, 철수의 나이 예순다섯.
창밖의 바람결이 한결 부드러워진 어느 날 아침, 스마트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국민연금공단] 1,170,000원 입금 완료.
철수는 베란다 창가에 서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젊은 날 월급 명세서에서 매달 몇십만 원씩 뭉텅이로 뜯겨나갈 때마다 ‘내가 늙어서 이걸 받기나 하겠냐’며 욕을 퍼부었던 그 돈이었다.
그 117만 원이, 쉰다섯부터 예순다섯까지 10년의 암흑기를 버텨낸 노병에게 마침내 지급된 것이다. 주택연금 82만 원에 국민연금 117만 원을 더하니 확정 현금흐름만 월 199만 원이었다.
이제 목표치 350만 원 중 변덕스러운 금융시장에서 피를 흘리며 건져 올려야 할 몫은 151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배당과 매도의 부담이 절반으로 꺾인 것이다.
철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스르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젊은 날의 자산은 칼이었으나, 늙어가는 자의 자산은 방패여야 했다. 주택과 국가가 쥐여준 방패가 비로소 그의 양손에 단단히 쥐어졌다.
그러나 강호에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목을 베는 자객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2056년, 철수의 나이 일흔다섯.
오랜만에 아내와 집 앞 순대국밥집을 찾은 철수는 메뉴판을 보고 굳어버렸다.
순대국: 22,000원.
"여보, 십 년 전만 해도 만 원짜리 한 장이면 배 터지게 먹었는데……."
"그러게요. 마트 가도 장바구니에 담을 게 없어요."
철수는 집으로 돌아와 낡은 수첩을 다시 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연 2%라는 조용한 인플레이션은 20년 만에 그의 350만 원짜리 생활 수준을 520만 원짜리로 뻥튀기해 놓았다.
화폐라는 종이 쪼가리는 가만히 쥐고만 있어도 매년 그 무게가 가벼워졌다. 그는 다시 자산의 고삐를 쥐었다. 성장형 ETF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고, 국민연금의 물가 연동 기능을 방패 삼아 지출을 다시 정렬했다.
강호에 영원한 은신처란 없었다. 물가라는 이름의 파도는 관 속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밀려오는 법이었다.
2066년, 철수의 나이 여든다섯.
은퇴라는 험로에 발을 디딘 지 30년이 지난 봄날이었다.
마당 평상에 앉아 볕을 쬐고 있는 철수 앞에, 바람 한 점과 함께 낯익은 도포 자락이 스쳤다. 삼십 년 전 모습 그대로인 연금진인이었다.
"철수야."
"오셨습니까, 스승님."
"삼십 년을 버텼구나. 네 손에 쥐었던 4억은 아직 남아 있느냐?"
철수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쪼그라들었다가 불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치료비로 뭉텅이로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태 굶지 않고 아내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 마지막 구결을 깨우쳤느냐?"
철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젊었을 때는 돈이 수십억쯤 쌓여야 자유로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삼십 년을 살아보니 알겠습니다. 자유란 통장에 찍힌 숫자의 무게가 아니라, 돈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고, 돈 때문에 원치 않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상태더군요."
노인은 말없이 껄껄 웃었다.
"비로소 무공을 완성했구나. 재물은 모을 땐 힘이지만, 쓸 때 비로소 삶이 되는 법이지."
노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등 뒤에서 방문이 열리며 아내가 카디건을 들고나왔다.
"여보, 바람 차요. 읍내 나가서 칼국수나 한 그릇 하고 올까요?"
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럽시다. 당신 먹고 싶은 거 다 먹읍시다."
"여보, 바람 차요. 읍내 나가서 칼국수나 한 그릇 하고 올까요?"
방문 앞에 선 아내의 목소리가 늙은 부부의 오랜 세월만큼이나 포근하게 마당을 적셨다. 철수는 품에 안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절마다 삐걱거리는 마디마디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했으나,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다가와 카디건을 어깨에 걸쳐주는 아내의 주름진 손등을 지그시 잡았다.
"그럽시다. 당신 먹고 싶은 거 다 먹읍시다."
젊은 날에는 쌈짓돈 몇 푼이 아까워 눈치를 보며 돌아서던 읍내 국수였다. 아이들 학원비와 대출이자에 짓눌려 단돈 만 원짜리 한 장도 벌벌 떨며 지갑을 열던 날들이 허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국가가 내어준 방패와 스스로 닦아온 자산의 호신강기가 늙은 부부의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기에.
철수는 더 이상 아침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증권사 HTS의 붉은 숫자와 푸른 숫자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통장에 찍힌 잔고가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삼십 년의 풍파 속에서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는 칼을 휘두르는 자가 아니라, 칼을 거두고 평온을 얻는 자라 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마당을 나서며 골목길 어귀로 걸음을 옮겼다. 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묵은 시름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대문 밖 세상은 여전히 주가가 폭락하고 물가가 치솟는다는 뉴스로 소란스러웠다. 강호의 무림맹과 마교가 혈투를 벌이듯, 사람들은 오늘도 숫자에 목숨을 걸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더없이 평온했고, 낡은 대문 안쪽의 작은 마당은 그 어떤 명문대파의 결계보다도 깊고 아늑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매일 아침 주식 시세창을 켜지 않는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불안에 떨지도 않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크기를 알았고, 그 안에서 누리는 평화의 값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스한 봄 햇살이 두 노부부의 등 뒤로 길게 드리워졌다.
강호는 여전히 시끄러웠으나, 그의 마당만큼은 더없이 고요했다.
다음 회차 예고: 백세유마의 선봉장과 비소구의 금강진법을 마주한 철수의 새로운 도전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3화
다음 회차 예고: 제4화 백세유마의 선봉장과 비소구의 금강진법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