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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무림전 · 2화목차

제2화 석 점의 패와 39개월의 방패

식탁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철수는 찻잔을 든 채 손끝이 굳어버렸다. 베란다 창문을 두드리던 겨울바람 소리가 갑자기 귓가를 때렸다.

"누구냐고 물었다."

철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다가오는 은퇴의 압박과 짓눌린 일상이 만들어낸 환각인가 싶었지만, 노인이 내려놓은 보온병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노인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철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퀭한 눈빛 속에서 강호의 풍파를 견뎌낸 자 특유의 서슬 퍼런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이름 따위가 무어 중요하겠나. 나는 자네처럼 피를 짜내며 강호를 떠돌다 겨우 살아남은 늙은일세. 사람들은 나를 연금진인이라 부르지."

노인은 손가락 까딱하며 철수의 낡은 수첩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수첩 위에는 철수가 펜 끝으로 꾹꾹 눌러쓴 4억 원이라는 숫자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4억 원이라는 돈을 모으면 칼집을 벗어나 영원한 낙원에 닿을 줄 아는 모양인데, 어리석기 짝이 없군."

노인은 품속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내더니 철수의 수첩 위에 거침없이 원을 그려나갔다. 스윽, 스윽, 서걱거리는 펜촉 소리가 밤을 찢었다.

"자네가 손에 쥐려는 4억 원은 가만히 누워 굴러들어 오는 얌전한 은전이 아니야. 성질머리가 전혀 다른 세 마리의 맹수지. 이 셋으로 쪼개서 목줄을 단단히 채우지 않으면, 첫날부터 자네의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철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노인이 그려 나간 첫 번째 원 위에 거칠고 날카로운 글씨가 새겨졌다.

배당흡원천공, 2억 4,000만 원.

"이것이 첫 번째 패다. 전체 자산의 60%를 차지하는 거대한 짐승이지. 매달 피를 토하듯 분배금을 뱉어내는 고배당 수단과 커버드콜의 초식에 쑤셔 넣어야 해."

노인의 눈빛이 가늘어졌ㄷ.

"연 9%의 수확을 쥐어짜 내 세금을 떼고 나면, 매달 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딱 166만 원이다. 이것이 자네가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기초적인 호흡이 될 것이다."

철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2억 4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박아 넣어야 겨우 160만 원이 넘는 돈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속이 쓰려왔다.

노인은 곧바로 두 번째 원으로 볼펜을 옮겼다. 서걱,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이름이 적혔다.

성장천룡공, 1억 2,000만 원.

"두 번째는 나스닥이라는 거대한 용의 허리에 올라타는 칼이다. 자산의 30%를 여기에 쥐어준다."

"용의 허리라니요?"

"자네가 늙어가는 동안 물가는 가만히 있겠나? 은전의 가치는 매년 깎여 나간다. 그러니 이 칼로 매년 원금의 11%씩 살점을 베어내 팔아야 해. 양도세를 털고 나면 매달 약 102만 원이 통장에 들어올 게야. 자산을 불리면서 동시에 피를 뽑아 쓰는 무서운 쌍검이지."

철수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산을 불리기도 바 판에 살점을 베어내 팔아야 한다니, 그것은 은퇴가 아니라 매달 스스로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고행에 가까웠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작은 공간에 원을 그리고는 굵은 점을 찍었다.

현금철포삼, 4,000만 원.

"마지막 남은 4천만 원. 이것은 무공이 아니라 방패다."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장난기가 완전히 걷힌, 냉혹한 무인의 경고였다.

"CMA든 파킹통장이든 상관없다. 세후 이자 8만 원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오직 주식시장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를 대비한 비상금으로만 쥐고 있어야 한다."

철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4천만 원이면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걸 그냥 묵혀두란 말씀입니까? 이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곳에 묶어두면 손해 아닙니까."

"이 어리석은 놈!"

노인의 서늘한 호통에 철수의 어깨가 움찔했다.

"주식시장에 피바람이 불고 나스닥이 반 토막이 났을 때,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성장주를 바닥에서 집어 던질 텐가? 그 짓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패가 바로 이 4,000만 원이다. 시장이 무너질 때 자산을 헐값에 내던지지 않는 맷집, 그것이 진짜 무공이야."

노인은 철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핏발 선 노인의 눈빛에서 철수는 거대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 방패는 영원하지 않다. 만약 시장이 무너졌을 때 이 4천만 원에서 매달 100만 원씩 갉아먹기 시작하면, 정확히 39개월이면 바닥을 드러낸다."

"39개월……."

"그렇다. 3년 3개월짜리 모래시계야. 그 시간 안에 시장이 돌아서지 않으면, 자산의 목줄이 아니라 자네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4억 원이라는 막연했던 은퇴 자금의 숫자가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그것은 편안한 노후를 위한 보물단지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 마리의 맹수이자 벼랑 끝에서 버텨야 하는 서슬 퍼런 무기였다.

철수는 멍하니 수첩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겨울비가 굵어지며 유리창을 거칠게 두드리다 이내 잦아들었다.

철수는 수첩에 펜을 내려놓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식은땀이 차가웠다. 머릿속에서는 연금진인이 뱉어낸 숫자와 무공의 이름들이 어지럽게 엉켜 소용돌이쳤다.

배당흡원천공으로 2억 4천만 원을 묶어 매달 166만 원의 피를 받아내고, 성장천룡공으로 1억 2천만 원을 나스닥의 칼날 위에 얹어 매달 102만 원의 살점을 베어내고, 마지막으로 4천만 원이라는 현금철포삼으로 39개월의 모래시계를 버틴다.

단순히 4억이라는 총액만 바라보며 쉰다섯 살의 낙원을 꿈꾸던 자신이 실로 갓난아이처럼 어리석어 보였다.

"어떠냐. 이제 좀 정신이 번쩍 드는가."

노인은 그새 보온병의 남은 커피를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허름한 등산복 소매로 입술을 슥 닦았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빛은 여전히 해를 품은 것처럼 매서웠다.

철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묻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자가… 강호에 얼마나 됩니까."

"열에 아홉은 첫해에 도망치거나 칼에 맞아 쓰러지지. 숫자에 홀려 맹수의 목줄을 놓치거나, 바닥을 치는 시장의 공포에 질려 스스로 자산을 똥값에 내던지니까."

노인은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무릎 관절에서 뚝 하는 건조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의 자세에는 굽힘이 없었다.

"은퇴라는 사지는 나이순으로 살아남는 곳이 아니다. 맷집이 강한 놈이 버티는 곳이지. 자네가 쥘 사억은퇴신공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자 시장이라는 거대한 마교를 상대하는 호흡법이다."

노인이 걸음을 옮겨 베란다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에는 종로의 차가운 야경이 빗물에 번져 흐느끼고 있었다.

"명심해라. 돈을 모을 때는 끈기가 필요하지만, 돈을 지키며 쓸 때는 독기가 필요하다. 39개월의 방패가 깨지기 전에 시장이 돌아서지 않으면, 그때는 나도 도울 수 없다."

"잠시만……!"

철수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노인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열린 적이 없는 베란다 섀시는 굳게 닫혀 있었고,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식탁 위에는 노인이 남기고 간 믹스커피 빈 봉지와, 세 개의 원이 핏자국처럼 선명하게 박힌 낡은 수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철수는 멍하니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위에 새겨진 숫자들은 더 이상 단순한 엑셀 시트의 도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가올 세월 속에서 자신의 목을 겨눌 서슬 퍼런 칼날이자, 유일하게 쥐어 짜낸 생존의 방패였다.

종이 위에 그려진 세 개의 원은 마치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세 자식의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퇴는 회사를 벗어나는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혹독하고 잔인한 칼날 위에 맨발로 올라서는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10년 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벼랑 끝에 몰린 철수에게, 노인이 남긴 그 39개월짜리 방패는 과연 어떤 구원이 될 것인가?

다음 회차 예고: 제3화 「하산의 날, 359만 원의 허상」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2화

다음 회차 예고: 제3화 하산의 날, 359만 원의 허상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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