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서른 살의 맹세, 마흔다섯의 마찰
"삑-"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단말기가 둔탁한 비프음을 뱉어냈다.
[잔액 1,250원]
붉은색 디지털 숫자가 찰나의 경고처럼 깜빡이다가 사그라졌다. 덜컹거리는 개찰구 철봉을 밀어젖히자마자 뒤따라오던 야근길 인파가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치고 지나갔다. 김철수는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다잡으며 서류가방을 고쳐 쥐었다. 손가락마디마디가 매서운 밤바람에 곱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종로3가역 지하 통로는 언제나 기름때 낀 쇳내와 젖은 외투 냄새로 눅눅했다. 전동차가 오갈 때마다 뿜어내는 탁한 바람이 바닥에 나뒹구는 영수증 찌꺼기들을 어지럽게 말아 올렸다. 퇴근길 인파는 거대한 탁류처럼 계단을 향해 쓸려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 얼굴에 온기가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퀭한 눈빛들, 귀에 꽂힌 이어폰, 그리고 목을 죄고 있는 뻣뻣한 와이셔츠 깃. 철수는 무리 속에 섞여 계단을 밟았다. 낡은 구두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냉기가 발바닥을 아리게 찔렀다.
왼쪽 어깨에 둘러멘 서류가방 끈은 실밥이 허옇게 일어난 지 오래였다. 가방 모서리는 닳아 가죽 속살이 누렇게 드러났고 손잡이는 땀에 절어 번들거렸다. 스물다섯, 푸른 도복 대신 뻣뻣하게 풀 먹인 와이셔츠를 입고 ‘회사’라는 이름의 거대 문파에 입문한 지 꼬박 20년이었다.
그 시절의 그는 강호의 중심에 설 줄 알았다. 날카로운 기획서로 사파의 기세를 꺾고, 거침없는 업무 추진력으로 문파 장로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찬란한 일대종사로 우뚝 서는 영웅담을 꿈꿨다. 젊음이란 본래 그런 순진한 착각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강호 20년이 그에게 안겨준 것은 영웅의 칭호가 아니었다. 낡아빠진 서류가방과 삐걱거리는 허리디스크, 그리고 비루한 호구지책뿐이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철수가 연마한 것은 거창한 권법이 아니었다.
상사의 미간 주름 각도로 오늘의 결재 타이밍을 읽어내는 독심술(讀心術).
부서장의 치명적인 실책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방패막이 초식.
거래처의 모욕적인 언사를 허허로운 웃음으로 흘려넘기는 면벽공(面壁功).
그리고 한겨울 비상계단 구석에서 식어빠진 캔커피를 들이켜며 속울음을 삼키는 인내공(忍耐功)뿐이었다.
매달 25일이면 통장에 은전 400만 냥, 아니 420만 원 남짓한 숫자가 찍혔다. 그러나 그 숫자가 통장에 머무는 시간은 번개보다 짧았다. 통장은 그저 돈이 스쳐 지나가는 적막한 정거장에 불과했다.
아파트 담보대출 원리금 140만 원.
중학생 딸아이의 학원비와 급식비 90만 원.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아파트 관리비와 공과금, 실손보험료.
거기에 지난달 야근을 버티느라 긁어댄 편의점 도시락과 택시비가 얹힌 신용카드 대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객들이 25일 자정이 지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넣었다. 피땀 흘려 베어 문 살점이 단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털려 나갔다. 모든 자객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잔고는 늘 몇만 원 안팎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살을 에는 칼바람이 정수리를 후려쳤다. 깃을 아무리 여며도 목덜미로 파고드는 한기를 막을 수 없었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명치끝이 저릿하게 조여들었다. 마흔을 넘어서면서부터 인사팀의 눈빛은 비수처럼 차가워졌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은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목을 죄어오는 사각의 넥타이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올가미 같았다.
어둑한 복도식 아파트 복도를 지나 도어록을 눌렀다.
삑, 삐비빅.
기름칠이 마른 현관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거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내와 딸아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철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신발을 벗었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 베란다 쪽 작은 서재 방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오래된 컴퓨터 한 대와 낡은 합판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철수는 겉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고, 노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켰다.
책상 구석,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꽂이에서 낡은 수첩 한 권을 꺼냈다. 모서리가 닳고 가죽 표지가 갈라진 붉은 수첩.
서른 살. 첫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구입했던 수첩이었다.
철수는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15년 전, 서른 살의 김철수가 꾹꾹 눌러쓴 결의가 적혀 있었다.
[서른 살의 맹세: 마흔다섯에는 반드시 내 발로 일어선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만의 터전을 닦고 당당하게 문파를 하산한다.]
철수는 헛웃음을 삼켰다. 목구멍에서 쓴물이 넘어오는 듯했다.
하산은커녕, 마흔다섯의 김철수는 여전히 상사의 서슬 퍼런 눈치를 살피며 회사의 그늘 아래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들려오는 희망퇴직 공고문 앞에서 화장실 변기통을 붙잡고 구역질을 삼키는 신세였다. 서른 살의 당돌했던 맹세는 마흔다섯의 비루한 생존 마찰 앞에서 흔적도 없이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더 늦으면…… 영영 나가지 못한다.’
쉰 살이 넘어가면 선택권조차 사라진다. 문파의 깃발 아래서 단물을 다 빨리고, 쓸모를 다한 뒤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철수는 서랍에서 모나미 볼펜을 꺼냈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수첩의 새로운 빈 페이지를 펼쳤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잉크를 종이에 박아 넣듯 눌러 적기 시작했다. 볼펜 촉이 종이를 짓이기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렸다.
목표 연도: 서기 2036년, 내 나이 쉰다섯.
약속: 문파의 깃발을 꺾고 하산(下山)한다.
조건: 금융자산 4억 원, 5억짜리 아파트 한 채, 월 생활비 350만 원.
볼펜 끝이 종이를 찢을 듯 바들바들 떨렸다.
4억.
지금껏 쥐어짜 온 청약과 쥐꼬리만 한 비상금, 그리고 앞으로 10년 뒤 쥐게 될 퇴직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모아야만 간신히 닿을 수 있는 돈이었다. 20년간 남의 비위를 맞추며 영혼을 갈아 넣어야 손에 쥘 수 있는, 그에게는 태산과도 같은 거금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벽은 아득했다.
은퇴를 논하는 모든 책과 방송에서는 10억이니 20억이니 하는 비현실적인 숫자를 거침없이 떠들어댔다. 화폐 가치는 나날이 떨어지고, 장바구니 물가는 자고 일어나면 칼날처럼 솟구쳤다. 4억이라는 돈은 거친 강호의 벌판에 서면 한 줄기 바람에도 흩날려 사라질 모래알처럼 왜소해 보였다.
"4억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는 한 걸까."
철수가 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절망과 무기력함이 눅눅한 방 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스르륵-
그 순간이었다.
베란다의 낡은 알루미늄 섀시 틈으로 날카로운 밤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창틀이 덜컹거리며 스산한 냉기가 발목을 감아 돌았다.
그리고 낯선 냄새가 났다.
겨울밤의 찬 공기 사이로, 지독할 정도로 달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노란색 포장지의 인스턴트 믹스커피 냄새였다.
달그락.
등 뒤, 어둠이 짙게 깔린 식탁 쪽에서 보온병 뚜껑이 부딪히는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누구냐!"
철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섰다.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거칠게 움켜쥔 채, 식탁 쪽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어둠 속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식탁 의자에 허름한 등산복 차림의 노인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철수가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사온 싸구려 종이컵에 보온병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신 노인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자네, 돈의 장부만 봤지 돈의 성질머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군 그래."
철수는 경계 어린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누구기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이 지랄이야?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나가!"
노인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누렇게 손때가 묻은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철수를 향해 툭 던졌다. 노트가 책상 바닥을 구르며 철수의 구두 앞에 멈춰 섰다.
표지에는 거친 붓글씨로 무섭게 휘어갈긴 글자가 박혀 있었다.
《사억은퇴신공(四億隱退神功)》.
철수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노트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눈이 시릴 정도로 촘촘한 글씨들이 머릿속을 후벼 파고들었다.
과연 노인이 건넨 4억이라는 돈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음 회차 예고: 제2화 「석 점의 패와 39개월의 방패」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1화
다음 회차 예고: 제2화 석 점의 패와 39개월의 방패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