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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97화목차

제297화 새로운 무인들의 시대

신서울의 외곽.

티타늄 그룹의 철옹성과 같았던 마천루들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이제 자본이 빚어낸 찬란한 불빛 대신 매캐한 잿더미와 차가운 바람만이 횡행하고 있었다.

세계를 지배하던 거대 기업들의 연합은 강진혁의 손에 의해 분자 단위로 찢겨 나갔고, 인간의 목숨을 코어의 출력과 데이터로 환산하던 디스토피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시스템의 푸른빛 HUD 창은 완전히 꺼졌다.

더 이상 눈앞에 깜빡이는 퀘스트도, 잔여 나노머신의 동기화율을 알리는 수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상실이 아니었다.

완벽한 해방이자, 오롯이 인간의 육체와 의지만이 세계를 마주하게 된 진정한 원점이었다.

탁— 탁—.

흙먼지가 자욱한 대지 위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진혁의 걸음걸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그가 향한 곳은 신서울 외곽, 과거 티타늄 그룹의 제2생체 실험장이 있던 폐허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어 있던 그 잔혹한 실험의 온실은 이제 새로운 질서가 싹트는 요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진혁 형, 아니…… 사부님."

폐허의 철제 기둥을 다듬어 만든 임시 수련장 입구.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리는 소년이 진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이 열둘 혹은 열셋쯤 되었을까.

목덜미와 손목에는 과거 슬럼가 하층민들이 강제로 이식받았다가 버려진 낡은 3세대 생체 코어의 흉터가 흉물스럽게 박혀 있었다.

진혁은 가만히 멈춰 서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흑안에 담긴 눈빛은 차가우면서도 묘한 깊이를 품고 있었다.

"코어의 출력을 믿지 마라."

진혁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수련장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귀에 박히듯 파고들었다.

"기계가 주는 힘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너희의 목줄을 죄는 족쇄다. 진정한 무력은 단전(丹田)의 기혈(氣혈)에서 나오고, 그 기혈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너희 자신의 의지다."

수련장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슬럼가의 버려진 아이들이거나, 메이저 기업들의 잔당이 남긴 실험실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강진혁이 대륙 연방의 심장부를 무너뜨리고 '신천마신공'을 완성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도한 이들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으나, 진혁이 그들에게 내민 것은 지배의 칼날이 아니었다.

오직 인간의 힘으로 경지를 쌓아 올리는 고대 무도(武道)의 비법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라. 심장의 박동과 단전의 맥이 하나로 얽히는 감각을 느껴라."

진혁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옅은 흑색 마기(魔氣)가 수련장 중앙의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 돌았다.

일체의 인공지능 보조도, 시스템의 연산도 없었다.

오직 천만 번의 단련으로 육신에 새겨진 감각과 직관만으로 대기의 흐름을 통제하는 경지.

마신경(魔神境)의 극치에 도달한 진혁이 보여주는 기혈의 운행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교본이었다.

소년은 진혁의 동작을 눈에 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낡은 코어의 출력을 강제로 억눌렀다.

지에너지가 전신을 태울 듯이 폭주하던 고통 대신, 심장 부근의 단전에서 뜨겁고 묵직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쿠구구구구…….

미약하지만 분명한 기(氣)의 흐름이 소년의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윤아영과 송수연이 놀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 정말로 코어의 보조 없이 내력을 끌어내고 있어."

"괴물이 따로 없네. 저런 걸 가르치는 진혁이나, 그걸 또 따라 하는 애들이나."

윤아영이 혀를 내두르며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물론 화면에는 더 이상 시스템의 상태창이 뜨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직접 구축한 독립형 로컬 네트워크와 무인 감시망의 데이터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혁. 대륙 연방의 남은 잔존 PMC들이 북부 요새 함락 소식을 듣고 완전히 숨죽였어. 하지만 안심하긴 일러. 12대 메이저 기업의 총수들이 숨겨둔 지하 자본과 블랙 마켓의 서버들이 아직 완전히 파괴된 건 아니니까."

송수연이 허리에 찬 대형 도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들이 다시 기어오를 여유는 주지 않을 겁니다."

진혁은 시선을 수련장 안쪽으로 돌린 채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기계와 자본이 지배하던 시대를 끝장냈으나,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던 약육강식의 법칙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있었다.

시스템이 주도하는 진화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깨부수고 올라서는 진짜 무인(武人)들의 시대를.

"크흠, 사부님!"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진혁의 옷자락을 꾹 붙잡았다.

진혁이 시선을 내리자, 아이는 조금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저희가 정말…… 저 하늘을 나는 비행정들처럼 강해질 수 있어요? 기계 장치 없이도요?"

진혁은 잠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 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서늘했다.

과거 티타늄 그룹의 지하 폐기장에서 실험체 07호로 버려졌던 자신의 모습이 문득 겹쳐 보였다.

그때 자신을 구원한 것은 어떤 자비나 기적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집념, 그리고 모든 족쇄를 부수겠다는 처절한 의지였다.

"기계는 부서지지만, 육신과 의지는 단련할수록 강해진다."

진혁의 입꼬리가 미소처럼 휘어졌다.

"비행정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를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아이의 눈이 경외감으로 크게 떠졌다.

수련장에 모인 다른 젊은이들과 아이들의 눈빛에도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본의 노예도, 폐기될 실험체도 아니었다.

강진혁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대 삼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최초의 무인들이었다.

그때, 수련장 한쪽 구석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진세린이었다.

전신에 이식된 3세대 생체 코어의 과부하로 인해 한동안 거동조차 힘들었으나, 진혁의 마기로 혈관과 신경의 결합을 재조정한 이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피부 밑으로 은빛 회로의 흔적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진혁."

"몸은 어떠지."

"말짱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진세린은 자신의 가슴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아버지가 심어준 자폭 코어의 강제 명령은 들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숨을 쉬는 것이 살만했다.

"티타늄 그룹의 잔여 자산과 하층 슬럼가 구호 물자의 배분을 끝냈어. 니르바나와 아영이의 네트워크도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이제 신서울은 완전히 우리의 통제 아래에 들어왔어."

"통제라기보다는, 묶여 있던 끈을 풀어준 것에 가깝지."

"뭐, 의미는 비슷해. 그런데……."

진세린의 시선이 대륙 연방의 북쪽, 거대한 안개에 싸인 지평선 너머를 향했다.

"메이저 연합의 본거지들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들이 수십 년간 지하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 연구소들과 블랙 마켓의 데이터는 아직 전 세계에 파편처럼 남아 있어. 네가 흡원천공으로 대다수의 코어 에너지를 빨아들였다고 해도, 그 잔류 주파수들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은 아직도 널리고 널렸어."

"알고 있다."

진혁의 눈빛이 북쪽의 어두운 하늘을 향했다.

진무극이 소멸 직전 송출했던 생체 실험 데이터 파편과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 소스.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자들이 대륙 연방 전역에서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첩보는 이미 윤아영의 단말기를 통해 수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몇몇 잔당의 반란 수준이 아니었다.

자본과 기술이라는 이름의 신을 잃어버린 거대 기업들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최후의 독버섯과도 같았다.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군."

진혁의 말에 진세린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전부 네 손으로 쓸어버리겠다는 소리야?"

"쓸어버리는 게 아니다."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

"뿌리를 뽑는 것이다. 썩어빠진 근원 그 자체를."

콰아아아—!

말을 마치기가 무섭다.

진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기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인공지능의 보조도, 시스템의 연산 버프도 없었다.

오직 제 핏줄과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내력과 신체 자체의 밀도만으로 공간의 기압을 뒤틀어버리는 압도적인 위압감.

마신경(魔神境)의 극치.

그것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신역(神域)에 가까웠다.

"아이들을 부탁한다."

"……."

진세린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다치지 마라. 네가 없으면 이 신서울을 다시 엎어버릴 녀석은 없겠지만, 그래도 골치 아프니까."

진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호흡 한 번으로 단전의 기혈을 정돈했을 뿐이다.

슈우우웅—!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대지가 사방으로 쩍쩍 갈라졌다.

음속을 돌파하는 충격파가 수련장의 지붕을 가볍게 휩쓸고 지나갔고, 진혁의 잔상은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광신보(魔光神步).

오직 자신의 두 다리와 근육, 그리고 마기의 폭발적인 반발력만으로 구현한 극초음속의 이동법.

하늘을 가르는 칠흑빛 섬광이 대륙 연방의 북쪽, 자본의 잔해가 도사린 어둠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시스템의 족쇄도, 핏줄의 굴레도 모두 부서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세상의 모든 구태의연한 질서를 심판하고, 스스로 새로운 천마(天魔)의 전설을 완성하는 길뿐이었다.

콰아아아앙——!

음속을 돌파하며 터져 나오는 폭음이 대륙 연방의 북쪽 밤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지평선 너머, 구름마저 새까맣게 물들이며 짓누르던 거대한 도시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메이저 연합의 12대 기업 중 가장 거대한 군수 자본이 밀집해 있는 곳.

일명 ‘철의 심장’이라 불리는 요새 도시, 오메가 시티였다.

과거라면 이곳은 수만 기의 자율 전투 로봇과 플라즈마 방위망이 겹겹이 둘러싼 난공불락의 요충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철옹성은 강진혁이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경고! 공역 내 비정상적인 에너지 반응 감지!]

- [방어 프로토콜 7식 가동 불능! 코어 출력 저하율 90%!]

- [대체 정체 불명의 생체 반응이 기지 상공으로 접근 중이다! 막아라! 당장 막……!]

방위 사령부의 비상 경보음이 철의 심장 전역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그 소리는 채 끝나기도 전에 찢어지듯 묻혔다.

콰르릉-!

칠흑빛 뇌전과 마강(魔罡)이 뒤섞인 거대한 검강이 공기를 찢으며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진혁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파천검강(破天劍罡)은 방어막의 공진 주파수를 단 한 번의 직관으로 간파해 냈다.

쿠구구구구궁!

도시 전체를 보호하던 오중 방어 돔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

철판이 녹아내리고, 기계 장치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는 데는 단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착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메가 시티의 중앙 통제 타워 옥상. 그 한가운데에 진혁의 발이 내려앉았다.

탁.

"누, 누구냐……!"

타워를 지키고 있던 연합의 최고위 사령관이자, 4세대 개조 시술을 받은 사이보그 에이스들이 총구를 겨누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완벽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단 한 사람의 육신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그들의 중추 신경계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진혁은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빛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사령관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 파편."

진혁의 입술이 열렸다. 낮고 묵직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옥상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 소스. 그것을 숨겨둔 자가 누구지?"

"개, 개소리 마라! 네가 아무리 강해도 이 거대한 자본의 네트워크는……!"

사령관이 부하들을 향해 발광하듯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위이이잉-! 고주파 플라즈마를 응축한 광자포가 진혁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고,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고열로 왜곡되었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스으으으——.

사령관이 쏜 플라즈마 광선이 진혁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

아니다.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진혁의 손바닥을 통해 흡원천공(吸元天功)의 기운이 발동하며, 적의 공격 에너지가 고스란히 역류해 그의 단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크아악……! 내, 내 코어의 에너지가……!"

광자포를 발사했던 에이스의 전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생체 코어의 출력이 0으로 떨어졌다.

그는 지면으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진혁은 흡수한 에너지를 단전에서 가볍게 정제한 뒤, 차가운 눈빛으로 앞을 응시했다.

"보기보다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군."

파지지직!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마기가 허공을 채찍처럼 훑고 지나갔다.

단 한 번의 휘두름.

오메가 시티의 중앙 통제 타워를 지탱하던 거대한 티타늄 기둥들이 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타워의 상층부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던 메이저 연합의 이사진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혁은 그 풍경을 뒤로한 채, 허공을 박차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기계도, 자본도, 그 어떤 족쇄도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대륙 연방의 중심을 향해 뻗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 끝에,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차가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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