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구무림과의 작별
센트럴 시티를 집어삼키던 거대 메이저 연합의 네트워크가 붕괴한 지 며칠이 흘렀다.
자본이 법이고, 기계의 출력이 곧 인간의 격을 나누던 디스토피아의 심장부는 이제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강진혁의 발걸음은 메인 타워의 잔해를 벗어나, 신서울과 대륙 연방의 경계선에 자리 잡은 오래된 구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포장도로 위로 흩날리는 먼지는 네온사인 빛을 머금지 않은, 태고의 흙냄새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시스템의 푸른빛 HUD 창은 이미 완전히 꺼진 지 오래였다.
그의 시야는 인공지능의 차가운 계산 보조 없이도, 대기의 미세한 진동과 바람의 결, 그리고 지구의 자기장 흐름까지 온전히 꿰뚫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신경(魔神境)의 극치.
인간의 육체와 의지가 곧 하나의 완벽한 우주가 되는 경지였다.
"……."
구릉의 정상,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잔해들 사이에 거짓말처럼 자라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곳은 기계의 소음조차 닿지 않는 유일한 성역과도 같았다.
기계 개조를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인간의 육신과 내력만으로 천 년 전의 무도를 지키려 했던 이들이 머무는 곳.
구무림(舊武林)의 잔존 고수들이 은거하는 삼림이었다.
"거기까지 오게, 젊은이."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입구, 낡은 흑백 도포를 걸치고 짚신을 신은 노인이 바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구무림의 마지막 전승자, 독고운(獨孤雲)이었다.
그의 몸에는 현대의 생체 코어도, 신경계를 찌르는 나노머신 회로도 없었다.
오직 칠십 평생을 단전의 호흡과 검의 궤적에만 갈아 넣은 순수한 기혈의 파동만이 은은하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진혁은 말없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기계의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졌군그래. 눈에 거슬리던 푸른빛도 사라졌고."
독고운이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순히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혁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마기(魔氣)와 그 아래 가라앉은 거대한 핏줄의 궤적을 읽어내고 있었다.
"시스템의 잔재는 번거로울 뿐이다."
진혁의 담담한 음성에 독고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하긴, 그렇겠지.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그 거대한 장난감은 결국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족쇄에 불과했으니. 그것을 네 손으로 완전히 부수고 서다니…… 과연, 일찍이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천마의 핏줄답군."
독고운은 진혁이 티타늄 타워에서 벌인 혈투와, 진무극을 영구 소멸시킨 과정을 이미 소문으로 접하고 있었다.
자본과 기술이 지배하던 세상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 마침내 스스로가 기준이 된 자.
그것이 바로 강진혁이었다.
"칭찬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니다."
"알아. 너 같은 괴물이 이 늙은이에게 덕담이나 들으려고 발걸음을 옮겼을 리가 없지."
독고운이 바위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낡은 검집을 손으로 툭 쳤다.
검집은 짐승의 낡은 가죽으로 감싸져 있었고, 손잡이는 오랜 세월 사람의 손때를 타서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화려한 고주파 진동 발생기도, 플라즈마 에너지 코어도 없는 구식 검이었다.
"그게 무엇이지?"
"내 평생을 바쳐 다루던 검이다. 아니, 내 스승이, 그리고 그 스승의 스승이 남겨준 구무림의 마지막 유산이지."
독고운이 검집을 뽑아 들었다.
치이익― 하는 기계음 대신,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투명한 검광이 숲의 공기를 갈랐다.
비록 화려한 나노 장갑을 뚫을 만한 고주파 진동은 없었지만, 그 검신에는 칠십 년 동안 수련한 순수한 내공의 무게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기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믿던 세상이었다. 코어가 망가지면 죽은 목숨이라 여기고, 자본이 없으면 무력조차 살 수 없는 슬픈 시대였지. 하지만 너는 증명했다. 힘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장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독고운이 검을 두 손으로 받들어 진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검을 네게 주마."
"내가 쓸 일은 없다. 내 손에는 이미 내 가락과 마기로 벼려낸 검이 있으니."
진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절하자, 독고운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이 검으로 직접 사람을 베라고 주나? 이 검은 상징이다. 기계의 굴레를 부수고 마침내 진짜 무도의 길에 들어선 자가, 잃어버린 구무림의 의지를 이어받아 세상에 전하라는 뜻이지."
독고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진무극은 사라졌고, 티타늄 그룹은 무너졌지만, 세상은 아직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 대륙 연방의 메이저 기업들은 여전히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 파편을 주워 담으려 눈독을 들이고 있지. 제2의 프로토콜, 제3의 실험체들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른다."
"……."
"네가 홀로 그 모든 것과 싸울 수는 없어. 비록 괴물 같은 힘을 손에 넣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진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너를 따르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진짜 무인들을 양성해야 해.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단전을 믿는 이들을."
진혁은 독고운이 건네는 낡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쥐는 순간, 미세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화려하지도 않고, 거대한 출력(MW)을 내뿜지도 않지만, 그 안에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이 무(武)를 통해 쌓아 올린 고집과 철학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진혁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 낡은 검을 집어 들었다.
"기억하마."
"그래, 그것으로 되었다."
독고운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구무림의 명맥을 지키며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드디어 내려놓은 이의 평온함이 감돌았다.
"나는 이 늙은 육신을 이 땅에 묻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검은 네 손을 통해 비로소 진짜 세상을 보게 되겠지."
진혁은 낡은 검을 허리에 고정하며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구릉을 내려오는 진혁의 등 뒤로, 독고운의 마지막 독백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가라, 새로운 천마여. 네가 걷는 그 길이 곧 새로운 무림의 법도가 될 테니."
숲을 빠져나온 진혁의 눈앞에 대륙 연방의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는 메이저 연합의 잔류 세력들이 새로운 프로토콜의 잔해를 차지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시스템은 꺼졌다.
핏줄의 굴레도 끊어졌다.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손에 쥐인 낡은 검, 그리고 단전에서 요동치는 순수한 마기뿐이었다.
진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의 흑안 속에서 칠흑 같은 뇌전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시작해 볼까."
쿠우우웅―!
그의 발밑에서 대지가 가라앉으며, 음속을 돌파하는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마광신보(魔光神步).
진혁의 형체가 한 줄기 검은 빛이 되어 대륙 연방의 중심부를 향해 미지의 폭풍처럼 날아올랐다.
그의 등 뒤, 구무림의 숲 위로 마침내 디스토피아의 오랜 밤을 깨부수는 진짜 새벽의 여명이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초음속으로 뻗어 나간 검은 잔상은 대륙 연방의 황량한 비포장도로 위로 거대한 균열을 남겼다.
지면이 사정없이 찢어지고,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압축되었다가 터져 나가는 폭음이 백 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 오른 진혁에게 더 이상 물리적인 이동 수단이나 기계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육신의 결을 타고 흐르는 순수한 마기와, 대지의 맥을 읽어내는 직관만으로도 공간은 그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콰아아앙―!
진혁이 지나간 자리마다 허공에 실오라기 같은 진공의 궤적이 길게 늘어섰다.
그의 목적지는 대륙 연방의 배후에 자리 잡은 거대 군수 복합단지, '아이언 포트리스'였다.
진무극이 소멸 직전 전 세계 메이저 기업 연합의 블랙 마켓 서버로 송출한 생체 실험 데이터 파편.
그 잔해를 주워 담아 제2의 천마 프로토콜을 가동하려는 탐욕스러운 무리들이 가장 먼저 결집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오나."
아이언 포트리스의 거대한 티타늄 성벽 위.
방어 시스템의 총사령관이자, 4세대 개조 수트를 장착한 사이보그 장군 '발뭉'이 이를 갈며 거대 레일건을 겨누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백 기의 전투용 자율 드론과 최정예 PMC 대원들이 진형을 구축하고 있었다.
진무극이 죽었다고는 하나, 그들이 손에 쥔 데이터 조각만으로도 자신들은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광기에 찬 확신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었다.
"전체 출력 개방! 목표물 포착 즉시 분자 단위로 소멸시켜라!"
발뭉의 고함과 동시에 성벽 전체가 번쩍이며 수천 발의 플라즈마 탄과 고주파 미사일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하늘을 시뻘겁게 물들이며 날아오는 탄막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지우고도 남을 만큼의 화력였다.
일반적인 초인이라 할지라도 그 폭풍 속에 휘말리면 뼈조차 남지 않고 증발할 터였다.
하지만 진혁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단전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마기를 끌어올렸다.
콰득, 우두둑―!
그의 육체 표면으로 칠흑 같은 뇌전과 마강이 얽혀들며 거대한 암흑의 갑주를 형성했다.
제11식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현대의 플라즈마 고열과 물리적 충격을 신체의 에너지로 치환하고, 오히려 자신의 투지를 가속하는 절대의 방어 체계였다.
슈우우우욱―!
진혁의 몸이 폭풍 속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폭음과 함께 거대한 화염의 바다가 그를 집어삼켰다.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발뭉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하! 아무리 괴물이라 한들 그 밀도의 에너지를 정면으로 맞고 버틸 수 있을 줄 알았……!"
발뭉의 웃음소리는 채 끝나지 못하고 목구멍에 틀어박혔다.
화염의 바다 중앙.
시뻘건 폭발의 연기를 단숨에 양옆으로 갈라치며, 한 줄기 칠흑 같은 빛이 성벽 위로 솟구쳐 올랐다.
기모아진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육체.
진혁의 손에는 독고운에게서 받아 허리에 차고 있던 낡은 검이 쥐어져 있었다.
"어, 어떻게……?!"
발뭉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 순간, 진혁의 검집에서 서늘한 쇳소리가 울렸다.
만물귀일(萬象歸一).
대기와 마기, 그리고 적들이 쏘아 올린 플라즈마 에너지의 잔해까지 진혁의 일섬을 중심으로 일시에 빨려 들어갔다.
스스로의 기술과 에너지를 역류당한 아이언 포트리스의 방어 시스템은 그야말로 자가당중에 빠져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콰릉릉릉―!
"크아아아악!"
성벽을 지키던 수백 기의 자율 드론과 PMC 대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낙엽처럼 떨어졌다.
발뭉 역시 자신이 입은 4세대 개조 수트의 출력이 순식간에 바닥나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 진혁의 발소리가 묵직하게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올린 발뭉의 시야에 담긴 것은, 공포나 분노조차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흑안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진무극도 사라졌는데, 왜 우리를……."
"정체 따위는 없다."
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그것은 판결을 내리는 집행관의 음성이었다.
"너희가 기계의 힘을 빌려 남의 고통을 짓밟고 세상을 지배하려 한 그 오만을, 내가 직접 끝내러 온 것뿐이다."
스으으으―.
진혁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궤적 속에서 발뭉의 4세대 개조 수트는 물론, 그가 타고 있던 거대 성벽의 중앙 기둥이 사선으로 스윽 갈라졌다.
잠시 후,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아이언 포트리스의 철옹성 같은 방벽이 거대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성벽의 잔해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진혁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쥐인 낡은 검은 여전히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서늘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륙 연방의 중심부, 메이저 연합의 본산이 위치한 '센트럴 타워'가 멀리서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의 잔해를 움켜쥐고 숨어 있는 자들의 본거지.
그곳을 향해 진혁이 다시 한번 마광신보를 전개하려는 찰나였다.
지직…… 지지직…….
허공에 떠 있던 거대 홀로그램 스크린들과 도시 전역의 비상 통신망이 일제히 노이즈를 일으키며 켜졌다.
그 스크린 속에서, 대륙 연방을 지배하는 12개 메이저 기업의 이사진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의 풍경이 투영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화면 너머의 총괄 이사인 브래드쇼가 떨리는 목소리로 화면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강진혁! 네 이놈……! 아이언 포트리스를 순식간에 함락시키다니, 네가 진정으로 전 인류의 적이 되겠다는 거냐! 프로토콜의 데이터는 우리 손에 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친들, 자본과 기술로 구축된 이 거대한 세계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화면 너머에서 쏟아지는 악에 받힌 함성들을 향해, 진혁은 대답 대신 차갑고 무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짐승을 내려다보는 포식자의 웃음이자, 낡은 시대를 끝장내러 온 자의 사형 선고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진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특히 너희 같은 기생충들이 만든 질서라면 더더욱."
쿠우우웅―!
진혁의 발밑에서 단전의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더 이상 시스템의 연산도,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심장박동과 의지만으로 벼려낸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파동이 대륙 연방 전체의 대지를 뒤흔들었다.
스스로가 곧 기준이 된 사내가, 메이저 연합의 심장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었다.
디스토피아의 밤을 태우는 진짜 마왕의 강림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