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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93화목차

제293화 연대의 잔물결

‘센트럴 시티’의 외곽 방벽이 무너져 내린 시각, 신서울의 공기는 전과 완전히 다른 질감을 띠고 있었다.

더 이상 하늘을 가로지르는 티타늄 그룹의 공중 감시정이 비행하지 않았고, 하층 슬럼가의 골목마다 매캐한 매연 대신 비 온 뒤의 흙내음이 옅게 감돌았다. 자본의 채찍질 아래 신음하던 도시가 긴 잠에서 깨어난 생명체처럼 느리게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두 사람이 있었다.

티타늄 타워의 잔해가 내려다보이는 구(舊) 임원실.

탁자 위에는 홀로그램 화면 대신 종이로 출력된 방대한 데이터 시트와 재설계 도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탁!

윤아영이 숏컷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태블릿 PC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 밑에는 며칠 밤낮을 서버 복구와 탈중앙화 코드 작성에 매달린 탓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형기(形氣)롭게 빛났다.

"하…… 미치겠네. 진무극 이 영감탱이, 죽는 순간까지도 전 세계 블랙 마켓 서버에 폭탄 메일을 뿌려대고 가 줬잖아? 덕분에 대륙 연방의 메이저 PMC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서울 잔류 서버를 해킹하려고 달려들고 있어."

윤아영의 웅얼거림에,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진세린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이 노리는 건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 데이터와 오리진 아머드의 설계도야. 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자,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려던 악의의 증거지."

"맞아. 그 개판 난 데이터를 내가 지금 올빼미 프로토콜로 싹 다 긁어모아서 대중의 오픈 소스로 풀어버리는 중이야. 기업 놈들이 독점하던 생체 코어 효율 계산식부터 나노머신 자가 치유 알고리즘까지 전부 다 말이지."

윤아영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통쾌함과 피로가 뒤섞인 웃음이었다.

"기업들이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건 기술을 독점했기 때문이잖아? 그 독점권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는 거지. '화이트 섀도'의 잔당들이랑 니르바나의 송수연 언니가 밑바닥부터 정보망을 단단히 엮고 있으니까, 이제 대륙 연방에서 어떤 녀석들이 기어와도 신서울의 코어 네트워크를 다시 쥐락페락하진 못할 거야."

진세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가슴 부근, 3세대 생체 코어가 이식되어 있던 자리에 은빛으로 얽힌 흉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과거라면 과부하로 인해 신경이 불타오를 통증이었으나, 강진혁이 남겨준 마기의 잔여 파동이 단전의 혈도를 부드럽게 다듬어준 덕분에 지금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진정한 통증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세린."

윤아영이 의자에서 일어나 진세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또 혼자서 티타늄 그룹의 원죄를 다 뒤집어쓰려고 하지? 자산 사회 환원이니, 기술 개방이니 하는 거… 네가 직접 앞에 나서서 십자가를 짊어질 필요는 없어."

"아냐."

진세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은발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내 아버지였어. 그리고 나 역시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며 누군가를 짓밟았던 공범이다. 강진혁이 칼을 뽑아 비정상적인 뿌리를 도려냈다면, 그 허허벌판에 새로운 토양을 다지는 건 내 몫이야. 티타늄 그룹의 모든 자산과 인프라를 슬럼가 주민들과 저항군에게 무상으로 귀속시킨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야."

"……너답네, 진짜."

윤아영은 픽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플래시 드라이브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이게 뭔데?"

"진혁이 그 인간, 센트럴 시티로 넘어가기 전에 백업해 둔 마지막 개인 로그야. 시스템 HUD가 완전히 꺼지기 직전, 자신의 시야에 기록된 무공의 궤적과 마신경(魔神境)의 운기 조식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

진세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걸 이렇게 쉽게 줘도 되는 거야? 프로토콜의 잔재가 담긴 데이터라면 메이저 기업들이 목숨을 걸고 탐낼 만한 보물인데."

"보물? 하! 진혁이 그 인간이 웃으면서 한 말 못 들었어? '프로토콜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기준이다'라고 했잖아."

윤아영은 모니터를 툭툭 치며 당차게 말을 이었다.

"그 데이터는 시스템이 가르쳐 준 정답이 아니야. 진혁이 스스로 뒹굴고 깨지면서 몸으로 익힌 '결(結)'의 기록이지. 그걸 기계가 분석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 오직 사람의 손으로, 직접 단전을 돌리고 기혈을 열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무공이야."

진세린은 천천히 플래시 드라이브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강진혁…… 그 남자는 지금쯤 어디쯤 갔을까."

"어디긴 어디겠어."

윤아영은 창밖의 북쪽 하늘, 거대 마천루의 불빛이 아득하게 부서지는 대륙 연방의 중심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본과 기술로 세상의 꼭대기에 군림하겠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의 턱밑에 도달했겠지. 시스템의 눈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육감과 마기만으로 세계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을 거야."

동시 시각, 대륙 연방의 관문이자 메이저 기업 연합의 총본산인 '센트럴 시티'의 방위선.

쾅—! 쿠구구구궁—!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대지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방어막 최대 출력! 전방에 에너지 포격 집중해! 저놈을 당장 갈아버려!"

센트럴 시티의 외곽 상공을 뒤덮은 수십 대의 중(重)장갑 전술 건쉽과 프라임 아머드 유닛들이 일제히 붉은색 플라즈마 레이저를 쏟아부었다. 도시 전체의 전력망을 끌어다 쓴 초고출력 포격은 그야말로 도시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그러나.

"시끄럽군."

나직한 음성과 함께 칠흑 같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허공에 나타났다.

강진혁.

그의 눈동자는 시스템의 푸른빛 HUD로 채워져 있던 과거와 달리, 깊고 깊은 심연처럼 새까맣고 고요했다. 인공지능의 보조 연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온몸을 타고 흐르는 마기와 자가 연산 100%의 육감만이 공간의 미세한 떨림을 읽어내고 있었다.

슈우우우—!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흡원천공(吸元天功)]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눈앞의 플라즈마 포격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사방으로 흩어져야 할 엄청난 열에너지가 역류하며 진혁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의 전신을 감싼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은빛 회로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타올랐다.

"이…… 이런 미친! 에너지를 역으로 흡수한다고?!"

"코어 출력이 한계치를 초과했다! 제어 불능이다!"

앞을 가로막던 메이저 연합의 PMC 사령관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진혁의 발이 대지를 가볍게 차고 나갔다.

[마광신보(魔光神步)]

음속을 돌파하는 장벽이 터지며 백색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혁의 잔상이 남은 자리에 공간이 찢어지듯 왜곡되었고, 다음 순간 그는 최정예 특수부대 사령관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내 무공은 시스템이 만들어준 게 아니다."

진혁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사령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너희들이 믿는 자본도, 코어도, 기술도 아니야. 내가 부딪치고 깨지며 완성한 것이다."

콰아아앙—!

진혁의 손바닥이 사령관의 흉부 전술 아머드를 강타했다.

순간, 사령관의 몸을 지탱하던 5세대 프라임 생체 코어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며 수억 개의 조각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진혁이 허공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신천마신공 제13식 파천검강 - 참단(斬斷)]

지평선 끝까지 닿을 듯한 칠흑빛 검강이 센트럴 시티를 둘러싼 거대한 티타늄 방벽의 상층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고요했다.

잠시 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방벽의 상단부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대지로 무너져 내렸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대륙 연방의 밤하늘을 채웠다.

센트럴 시티의 최고 사령탑, 메이저 기업 연합의 이사들이 대형 유리에 비친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진혁의 압도적인 살기와 초월적인 무력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범주를 아예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방벽의 잔해 속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걸어 나오는 강진혁.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센트럴 시티의 중심부, 가장 높이 솟아오른 총괄 타워의 최상층을 향해 고정되었다.

"다음은 너희 차례다."

진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시스템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자본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진정한 신천마(新天魔)의 발걸음이 다시 한번 대지를 짓밟으며 센트럴 시티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갔다.

"이, 이사님……! 외곽 방벽 제1구역과 제3구역이 동시에 함락되었습니다! 방위군 잔당들은 전멸 상태고, 적의 접근을 저지할 수단이……!"

센트럴 시티 최고층, 특수 방탄 강화유리로 둘러싸인 통제실 안은 사색이 된 임원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중앙 홀의 초대형 홀로그램 모니터에는 강진혁이 방벽의 잔해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대지가 종이처럼 찢겨 나가는 광경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 화면 속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았다.

진무극 회장이 남긴 5세대 프라임 코어와 암흑물질 엔진마저 흡원천공(吸元天功)으로 소화해 낸 강진혁은, 이제 숨을 쉴 때마다 주변의 공간 압력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의 보폭 하나에 센트럴 시티 전체의 지각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진정해! 바보들아!"

수석 이사이자 메이저 연합의 실세인 카를로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광기 어린 집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진무극 영감탱이처럼 무능하지 않아. 그가 남긴 데이터 파편, 즉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 소스는 이미 우리 전역 서버 백업망에 분산 저장되었다! 강진혁 그놈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가 보유한 연합의 총출력 에너지와 자본의 힘을 무한대로 쏟아부으면……!"

콰아아앙—!

카를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통제실의 수십 톤짜리 삼중 압축 티타늄 정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쪽으로 박살 나 튀었다.

"컥……!"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최정예 사이보그 가드들이 반격조차 해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스윽.

파편이 나뒹구는 자리에 칠흑 같은 흑안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혁.

그의 어깨 위로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과, 옷자락에 묻은 핏자국은 그가 거쳐 온 파멸의 궤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통제실 안의 모든 임원들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몇몇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네, 네놈……! 어떻게 여기까지……!"

카를로스가 떨리는 손으로 홀로그램 콘솔을 조작했다.

"이 통제실은 센트럴 시티 전체의 에너지를 직결한 요새다! 이 안에서 방출되는 전자기 포격과 플라즈마 레이저는 인간의 육체로는 절대 버틸 수 없어! 자, 자폭 코드를 가동한다! 우리와 함께 죽는 거야!"

카를로스의 손이 자폭 기동 버튼을 내리꽂으려던 그 순간.

탁.

진혁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인공지능의 보조 연산 HUD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수백 번의 사투와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직감은 카를로스의 근육 미세 수축과 뇌파의 흐름을 이미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슈욱—!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극초음속 잔상이 통제실의 공간을 갈랐다.

카를로스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진혁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쇠사슬처럼 움켜쥐었다.

"크윽……! 목이……!"

"자폭?"

진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소했다.

"너희가 만든 시스템과 자본의 그물망 안에서, 나는 수없이 버려지고 개조당하며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그 공포를 너희에게 돌려주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기, 기다려라……! 우리와 거래를 하자! 진무극이 남긴 전 세계의 데이터와 자산, 그 모든 통제권을 너에게 넘겨주마! 메이저 연합의 지배권을 너에게 바칠 테니……!"

카를로스가 발버둥 치며 애원했지만, 진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필요 없다."

진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런 썩어 빠진 찌꺼기들은 전부 쓸어버릴 테니까."

콰드득—!

진혁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며 카를로스의 목뼈가 가차 없이 부러졌다.

동시에 진혁은 단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흡원천공(吸元天功)]의 기운을 통제실 전역으로 개방했다.

지이이잉—!

센트럴 시티의 메인 서버와 연결된 수백 개의 고출력 생체 코어, 도시 전체를 지탱하던 에너지 배터리들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통제실의 모든 홀로그램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치지직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메이저 기업 연합이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자본의 심장부가, 강진혁의 손아귀 안에서 단 몇 초 만에 재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주저앉아 공포에 떨던 다른 이사들은 기겁하며 도망치려 했으나, 진혁의 전신을 감싼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에 압도되어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진혁은 그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통제실의 거대한 통유리창 밖으로 돌렸다.

기계의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던 대륙 연방의 중심부.

그 찬란하고도 추악한 디스토피아의 야경 위로, 진혁의 칠흑 같은 흑안이 깊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시스템의 족쇄도, 핏줄의 굴레도, 자본의 사슬도 모두 끊어졌나니.

"이제 시작이다."

진혁의 입술이 조용히 호선을 그리며, 센트럴 시티의 밤을 향해 묵직한 선언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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