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프로토콜의 잔해
대륙 연방과 신서울의 경계선.
모래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황무지 위로 칠흑 같은 그림자가 내리꽂혔다.
쾅—!
음속을 돌파하며 대지를 강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진혁(姜振赫)의 발끝이 가라앉았던 모래사장을 박차며 정지했다. 은빛 회로 선이 옅게 흐르던 목과 손목의 피부 위로, 이제는 오직 순수한 생명력과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만이 서려 있었다.
후우-
진혁이 내쉬는 숨결이 차가운 공기와 부딪혀 하얀 김이 되었다가 이내 흩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철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철옹성, 대륙 연방의 메이저 기업 연합이 통치하는 심장부이자 자본의 유토피아라 불리는 ‘센트럴 시티’였다.
저 멀리 거대 마천루들의 불빛이 밤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전자기파와 보안 주파수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진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전이었다면 그의 시야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
[SYSTEM INFO: 천마 프로토콜 v3.04]
[경지: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
[생체 코어 출력: 측정 불가]
푸른빛의 HUD 창.
인공지능 설화의 무기질적인 보이스.
적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궤적을 예측하던 시스템의 차가운 계산식.
하지만 지금, 그의 시야는 완전히 맑았다.
푸른색의 잔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세상의 결, 대기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센트럴 시티의 거대한 방벽 뒤에서 꿈틀거리는 수만 명의 이방인들과 방위병들의 심장 소리만이 고스란히 귀에 박혔다.
‘완벽하게 비워졌군.’
진혁은 자신의 가슴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진무극이 남긴 5세대 암흑물질 코어와 프로토콜의 핵심 데이터는 이미 [흡원천공(吸元天功)]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체도 없이 분해되어 단전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 그것은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된 시스템의 명령어가 아니었다. 강진혁이라는 한 인간의 의지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완벽한 자신의 내력(內力)이자 마기(魔氣)였다.
시스템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곧 타인의 손에 쥐여 있던 목줄을 스스로 끊어버렸음을 의미했다.
그 순간, 진혁의 신경망 속에서 마지막 남은 프로토콜의 잔여 데이터가 파스스 부서지며 완전히 소멸했다.
[경고: 시스템 코어가 영구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자율 제어 권한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프로토콜의 보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필요 없다.”
진혁의 입술이 낮게 열렸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떨림도 없었다.
시스템이 없기에 오히려 완벽했다. 타인의 계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직관만으로 우주의 이치와 무공의 궤적을 꿰뚫는 경지.
그것이 바로 마신경(魔神境)의 진정한 극치였다.
콰르릉—!
문득, 센트럴 시티의 거대한 외곽 방벽 위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시뻘건 서치라이트 수십 개가 황무지를 가로지르며 진혁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준했다.
- [경고! 미등록 초인 감지!]
- [방벽 구역 7번, 소닉 캐논 및 플라즈마 터렛 활성화!]
- [대상을 즉살하라. 진무극 회장의 긴급 데이터 파편을 회수한다!]
센트럴 시티의 방위 시스템이 반응한 것이다.
진무극이 소멸 직전 전 세계 메이저 기업 연합의 블랙 마켓 서버로 송출한 생체 실험 데이터의 파편. 그것을 움켜쥐기 위해, 그리고 진무극을 죽이고 홀로 살아남은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대륙 연방의 수많은 PMC와 기업 직속 특수부대들이 이미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삐비비비빅-!
방벽 위에서 일제히 전개된 수십 문의 플라즈마 포와 중기관총들이 푸른빛의 살기를 뿜어냈다.
이전의 진혁이었다면, 그 위협적인 탄도 계산과 방어막의 공진 주파수를 파악하기 위해 프로토콜의 연산 능력을 끌어다 써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눈에 보인다.”
진혁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소용돌이쳤다.
포신이 회전하는 속도, 탄환이 장전되는 기계적 마찰음, 그리고 방벽의 에너지 코어가 뿜어내는 출력의 미세한 맥동까지. 그 모든 것이 진혁의 뇌 속이 아니라, 온몸의 피부와 심장박동으로 직관적으로 읽혀 들어왔다.
타앗!
진혁의 발이 대지를 밟았다.
고오오오—!
초음속을 아득히 초월하는 폭음과 함께,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반경 수십 미터에 걸쳐 분자 단위로 함몰되었다.
지면이 붕괴하고 모래바람이 허공으로 치솟는 그 순간, 진혁의 형체가 허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마광신보(魔光神步)]
빛보다 빠르게, 소리보다 먼저.
진혁의 몸이 허공을 갈라치며 센트럴 시티의 거대한 철옹성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쳤다.
“뭐야?! 저 속도는……!”
“궤적 포착 불가! 타겟이 사라졌……!”
방벽 위에서 포격 지휘를 하던 기업 연합의 사령관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이미 늦었다.
쾅—!
센트럴 시티의 정문이자, 수 미터 두께의 티타늄-탄소 합금으로 주조된 메인 게이트의 정중앙에 진혁의 주먹이 박혀들었다.
콰아아아앙—!
단 한 번의 타격이었다.
정교한 방어 마크와 고출력 에너지 실드가 둘러져 있던 거대한 철문이 진혁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강(魔鋼)과 충돌하는 순간,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퍼버버벅!
방벽 위에 배치되어 있던 수십 문의 플라즈마 터렛이 내부에서부터 발생한 공진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철문 전체가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키며 안쪽으로 찌그러졌다.
“크윽……! 방벽이 뚫린다! 막아라!”
“전군 사격! 모든 화력을 집중해!”
내부에서 지휘관의 비명과 함께 수백 명의 메이저 연합 소속 사이보그 특수부대원들과 4세대 생체 코어를 이식받은 정예 초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고주파 진동검과 입자 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진혁을 향해 죽음의 세례를 퍼부었다.
쏟아지는 탄막과 플라즈마 광선이 진혁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휘황찬란한 폭발의 섬광이 센트럴 시티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고, 거대한 화염이 그를 완전히 감쌌다.
하지만 폭발의 중심부에서, 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터벅, 터벅.
화염을 뚫고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전장의 모든 소음을 압도했다.
진혁의 옷자락은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그의 피부 표면을 감싼 칠흑빛 마기와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나노-분자 결합 구조가 적들의 화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분산시켜 버린 덕분이었다.
“인간의…… 육체로 저런 화력을 버틴다고?”
“괴물…… 저건 사내가 아니야. 진짜 천마(天魔)다!”
공포에 질린 부대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 앞에 선 진혁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혁은 오른손을 스윽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 위로 거대한 흡원천공의 소용돌이가 전개되며, 센트럴 시티 전체를 지탱하는 거대한 지하 전력망의 에너지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웅-!
주변의 모든 빛과 전자기파가 진혁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칠흑보다 깊은 어둠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프로토콜은 끝났다.”
우두둑- 콰지지직!
“이제부터는 내가 기준이다.”
진혁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간 검강이 센트럴 시티의 밤하늘을 반쪽으로 가르며 거대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자본과 기술로 쌓아 올린 철옹성의 대문이 무너지고, 대륙 연방의 심장부를 향한 진격의 서막이 처절한 핏빛 불길 속에서 비로소 올랐다.
콰구구구궁—!
센트럴 시티의 거대한 외곽 방벽이 반으로 쪼개지며 터져 나갔다.
지하 전력망에서 역류한 에너지가 연쇄 폭발을 일으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메인 게이트와 방위 타워들이 거대한 불덩이로 화했다. 철옹성이라 자부하던 도시의 전력 시스템이 단 한 번의 기류 역류로 완전히 다운된 것이다.
- [경고! 메인 전력망 붕괴율 94%!]
- [중앙 제어실과의 연결이 차단되었습니다!]
- [방어 시스템 전면 마비! 모든 구역에 비상계엄을 발령합니다!]
메이저 기업 연합의 중앙 AI가 발신하는 비상 경보가 센트럴 시티 전역의 마천루 스피커를 통해 찢어지는 듯한 소음으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어떤 경고음도 진혁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진혁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백 명의 메이저 연합 정예 특수부대와 중장갑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4세대, 심지어 일부는 5세대에 육박하는 최고급 생체 코어와 군사형 나노머신으로 무장한 대륙 연방의 최정예 살인병기들이었다.
“죽여라! 저 괴물을 당장 가루로 만들어!”
“후방 지원 포격 대기! 타겟의 퇴로를 차단해!”
지휘관의 악에 받친 고함과 함께, 특수부대원들이 일제히 마그네틱 라이플과 고주파 진동검을 치켜들며 진혁을 향해 돌진했다.
음속에 육박하는 기동력으로 사방을 에워싼 채, 사각 없는 탄막을 쏟아붓는 전술적 움직임은 과연 신서울의 하층 부대와는 차원이 다른 숙련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느리다.’
그것은 물리적인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보조 HUD가 없어도, 진혁의 감각은 적들의 근육 수축 하나, 총구의 미세한 떨림 하나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 오른 이에게 그들의 초음속 기동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느리게 흘렀다.
타앗—!
진혁의 몸이 지면을 박찼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마광신보(魔光神步)]가 발동되는 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폭음이 터지며 진혁의 형체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 어디 갔지?”
“상부다! 위에서 떨어진다!”
최정예 대원들이 황급히 총구를 위로 치켜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의 오른손에 감긴 칠흑빛 마강이 허공을 갈라치며 내리꽂혔다.
푸시식-!
가장 먼저 진혁의 경로에 있던 중장갑 파괴자의 4세대 생체 코어가 단 한 번의 손짓에 반으로 쪼개졌다.
코어가 품고 있던 고압의 에너지가 역류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그 부근에 있던 수십 명의 특수부대원들이 폭풍에 밀려 종잇장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비명조차 지를 겨를이 없었다.
진혁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와 강철의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신천마신공 제11식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적들의 고주파 진동검이 진혁의 어깨와 옆구리를 강타했지만, 그의 피부 표면을 흐르는 나노-분자 결합체와 마기가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무력화했다. 베이지도 않고, 뚫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가질 수 있는 방어력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진정한 의미의 불멸(不滅)에 가까운 육신이었다.
“쏘지 마! 총알이 통하지 않아!”
“이런 미친……! 코어가, 내 코어의 출력이 강탈당하고 있다!”
대원들 사이에서 공포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진혁이 손을 뻗어 그들의 단전을 향해 [흡원천공(吸元天功)]을 전개할 때마다, 적들이 장착한 고출력 생체 코어의 에너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진혁의 단전으로 흡수되었다.
적들의 에너지를 빼앗을수록 진혁의 마기는 더욱 짙고 거대해졌다.
피를 마실수록 강해지는 마귀(魔鬼)처럼, 진혁은 센트럴 시티의 최정예 방위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극을 펼치고 있었다.
쾅! 쿠구구구궁—!
마천루의 외벽이 무너지고, 장갑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나뒹굴었다.
수백 명의 정예 부대가 단 10분 만에 진혁의 발아래 무릎을 꿇거나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살육의 현장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선 진혁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센트럴 시티의 최고 사령탑이자, 대륙 연방 메이저 기업 연합의 수뇌들이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총괄 타워가 밤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타워의 최상층 통유리창 너머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업 이사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진무극이 소멸한 후, 천마 프로토콜의 잔해와 생체 실험 데이터를 가로채 권력을 독점하려던 또 다른 탐욕의 군상들이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끝내 숨을 곳을 찾았나.”
낮게 읊조린 진혁의 음성이 전장의 잔해 위로 흩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의 족쇄도, 진무극의 음모도, 대륙 연방의 철옹성도 이제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하고 개척하는 무(武)의 정점.
참된 '천마(天魔)'가 내딛는 한 걸음마다, 자본과 기계가 지배하던 디스토피아의 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