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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91화목차

제291화 남겨진 자들의 선택

쿠구구구-.

신서울을 뒤덮었던 거대한 마천루, 티타늄 타워의 꼭대기가 무너져 내린 자리는 거대한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하늘은 더 이상 기업의 네온사인이 만들어낸 가짜 빛으로 오염되지 않았다. 진무극의 소멸과 함께 타워의 중추 중앙 서버가 완전히 박살 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신서울의 공기는 무거웠고, 밤하늘에는 오랜만에 진짜 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스템의 시대는 끝났다.

강진혁이 만든 핏빛 검강(劍罡) 하나로 세상의 절대자가 붕괴했다.

"……하아."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진세린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가슴 부근에서 은빛으로 빛나던 3세대 생체 코어의 회로가 툭, 툭 불꽃을 튀기며 꺼져갔다. 영구적인 과부하 상태. 자폭 직전까지 갔던 육체는 강진혁이 주입해 준 마기(魔氣)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후유증은 심각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단전 부근은 짓이겨진 것처럼 아팠다.

그럼에도 세린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타워의 로비,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이었다.

"총수님. 아니…… 이제 그 호칭도 옛말이군요."

타워의 잔해 사이로 블랙 가드의 잔존 병력과 임원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진무극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사라진 세계.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사냥개들 같았다.

"……."

진세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저항군 '니르바나'의 대원들과 송수연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송수연의 손에는 대형 도검이 들려 있었으나, 지금은 적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 중 일부 사병들이 주머니 속의 무선 기폭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반란. 혹은 탈출. 이 거대한 자본의 카르텔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회장님이 사라지셨다! 진세린, 네 년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이 사단을 냈어!"

임원 중 한 명이 악을 썼다.

그의 손가락 끝이 세린을 향했다.

"티타늄의 군사 부대와 블랙 가드는 아직 건재하다! 전 세계 메이저 기업 연합의 블랙 마켓 서버로 데이터가 송출되었어! 대륙 연방의 PMC들이 이 바닥을 먹으러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서울을 장악해야 한다!"

그 외침에 잔당들 사이에서 수백 개의 총구가 일제히 올라왔다.

현대 군사 기술로 무장한 사병들. 코어를 개조한 특수전 부대의 잔존 세력들이 세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채비를 마쳤다.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송수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검을 치켜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피식.

진세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차갑고 오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진무극의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의 그것이었으나, 품고 있는 결은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가 남긴 데이터? 블랙 마켓? 대륙 연방의 PMC?"

세린이 낮게 읊조리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손목에 채워진 관리자용 마스터 패드가 푸른 불빛을 잃고 완전히 셧다운되었다.

"그 바보 같은 소리를 아직도 믿고 있나."

"……뭐, 뭐라고?"

"진무극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다. 너희들은 그저 그가 불멸을 얻기 위해 쓰고 버릴 부품에 불과했어. 천마 프로토콜? 그건 인간을 초월하기 위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강진혁의 육체를 빼앗기 위해 만든 껍데기였을 뿐이다."

진세린의 목소리는 타워의 잔해 속에 선명하게 박혔다.

임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진실의 단편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린이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주머니에서 작은 데이터칩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박살 난 칩 위로 그녀의 군화 구두가 짓밟고 지나갔다.

"그 껍데기는 이미 깨졌다. 강진혁이라는 진짜 괴물이 그 모든 시스템을 분자 단위로 찢어발겼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끝장이다……! 이대로 자본을 다 빼앗기고 슬럼가 거지들한테 목이 따일 줄 알아!"

잔당 중 한 명이 격분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공기가 폭발했다.

진세린의 등 뒤,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폭음과 함께 칠흑빛 마기(魔氣)의 잔향이 흩어졌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강진혁이 대륙 연방을 향해 떠나기 전 남기고 간 잔류 마기의 여파만으로도 공간의 기압이 완전히 뒤틀렸다.

두려움.

본능적인 공포가 티타늄 잔당들의 심장을 쥐어짰다. 방아쇠를 잡고 있던 손들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진혁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미 그들에게 있어 극복할 수 없는 천재지변 그 자체였다.

"내 말 잘 들어라."

진세린이 차가운 눈으로 사병들을 둘러보았다.

"오늘부로 티타늄 그룹은 해체된다."

"……뭐……?!"

"이 타워에 남은 모든 자산, 생체 코어 생산 라인, 나노머신 연구 데이터, 그리고 지하 금고에 쌓아둔 자본은 전부 신서울의 하층 슬럼가와 시민들에게 사회 환원한다."

임원들이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경악했다.

자산의 사회 환원? 그것은 티타늄 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완전한 자결을 의미했다.

"정신 나갔어?!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 파산이야! 아니,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단 말이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당장 그 총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세린의 목소리에 일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서 불꽃을 튀기던 3세대 생체 코어를 뜯어낼 듯 손으로 움켜쥐었다.

"나 또한 아버지의 공포로 이 도시를 지배하려 했다. 하지만 끝을 봤지. 힘으로 쌓아올린 탑은 힘이 사라지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는 걸."

세린이 뒤를 돌아보며 송수연과 저항군들을 바라보았다.

송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타늄의 군사 부대와 블랙 가드는 전원 해산한다. 저항하는 자는…… 강진혁이 직접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마기로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스으으읍-.

세린의 손끝에서 희미한 마기의 파문이 피어올랐다.

비록 진혁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녀 역시 진혁의 곁에서 마기를 다루는 법을 어깨너머로 익힌 상태였다. 그 위압감에 압도되어, 총을 들고 있던 사병들의 손에서 무기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컥, 덜그덕-.

기계음을 내며 나뒹구는 총기들을 바라보며, 세린은 차갑게 선언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신서울의 주인은 기업이 아니다."

티타늄 타워의 잔해에서 시작된 변화는 신서울 전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하층 슬럼가.

햇빛이 들지 않아 언제나 회색빛 매연과 빗물만이 가득했던 그곳에 드디어 진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게…… 정말 다 우리 거야?"

구멍 난 철판집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앞에 세워진 대형 운반 트럭에서는 티타늄 그룹의 로고가 박힌 상자들이 무더기로 내려지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식량과 의료용 나노머신 키트, 그리고 깨끗한 식수를 만들어내는 정화 장치들이 가득했다.

"그렇다니까! 이제 더 이상 기업의 감시 로봇 눈치를 보며 쓰레기를 뒤지지 않아도 돼!"

저항군 '니르바나'의 대원들이 웃으며 상자들을 나눴다.

송수연은 가죽 재킷을 걸친 채, 폐허가 된 슬럼가의 중심 광장에 세워진 임시 행정 텐트 앞에 서서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다.

"수연 누나! 북동쪽 구역의 전력망 복구 작업 완료됐습니다! 티타늄의 중앙 서브넷이 완전히 다운되면서, 이제 우리 자체 망으로 구내 전력을 돌릴 수 있어요!"

윤아영이 숏컷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아영의 손에 들린 단말기 화면에는 신서울의 새로운 지도와 자원 배분 계획이 실시간으로 띄워지고 있었다.

"진짜 대단하네…… 진혁 오빠가 타워를 박살 낸 덕분에, 숨겨져 있던 블랙 마켓의 비자금 계좌까지 전부 우리 손으로 들어왔어. 이걸로 슬럼가 재건축은 물론이고, 아예 새로운 자치 도시 행정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어."

송수연은 도검을 텐트 기둥에 기대어 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했다, 아영아. 네가 아니었으면 이 방대한 데이터를 전부 해독하는 데만 몇 달은 걸렸을 거야."

"헤헤, 이 정도야 뭐. 근데…… 진혁 오빠는?"

아영의 질문에 송수연의 시선이 신서울의 북쪽 경계, 즉 대륙 연방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향했다.

거기는 이미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갔어."

"어디로요?"

"신서울을 넘어서. 진무극이 소멸 직전 송출한 데이터 파편…… 그 뒤를 쫓아서."

송수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진혁은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고,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핏줄과 인연의 잔재를 끊어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넓었고, 티타늄 그룹 외에도 고대 마공의 비밀과 천마 프로토콜의 파편을 노리는 거대 자본과 메이저 기업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진혁은 그 모든 악의 근원을 뿌리 뽑기 위해 홀로 대륙 연방의 중심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오빠는…… 혼자서 그 거대한 괴물들을 다 상대하려는 거야?"

"혼자가 아니야."

송수연이 아영의 어깨를 툭 치며 미소 지었다.

"그 남자는 이제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아. 그저 자기 자신의 의지와 무(武)의 직관만으로 숨을 쉬고 있지. 우리가 여기서 신서울을 똑바로 세우고 지켜내는 것…… 그게 그 남자의 뒤를 받치는 유일한 방법이야."

아영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곧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빠가 뒤를 돌아보지 않게 우리가 이 도시를 철저하게 접수해 버리는 거지!"

슬럼가 전역에서 환호성과 함께 불꽃놀이가 터져 올랐다.

기업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생체 코어로 등급이 매기지던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대륙 연방의 거대 자본가들과 PMC 연합이 천마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칠 터였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서, 강진혁은 조용히 음속을 돌파하고 있었다.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대륙 연방으로 향하는 국경 지대의 철조망을 두드렸다.

음속을 돌파하며 질주하던 강진혁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평선 너머, 거대한 고층 마천루들이 불야성을 이루며 거대한 괴물의 형상처럼 도사리고 있는 곳. 신서울과는 차원이 다른 자본과 군사 기술의 집합체, 메이저 연합의 본거지인 '센트럴 시티'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야의 구석.

과거에는 그토록 익숙하게 떠올랐던 푸른빛의 HUD 창과 인공지능 설화의 보조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SYSTEM OFFLINE.]

[DATA DESTROYED.]

완전히 까맣게 가라앉은 시야.

그러나 진혁의 눈동자는 그 어떤 시스템의 연산보다도 선명하게 세상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바람의 결, 대기의 압력, 저 멀리 국경 경비초소에 설치된 적외선 센서의 주기적인 스캔 각도, 그리고 수 킬로미터 밖에서 대기 중인 PMC 연합의 중장갑 기계화 부대가 뿜어내는 미세한 진동까지.

모든 것이 육감과 순수한 무도의 직관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필요 없다.'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천마 프로토콜은 그저 자신이 태어난 태반에 불과했다. 그 태반을 찢고 나온 이상,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주먹과 검강뿐이었다.

찌르르-, 툭.

심장 부근에서 미세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진무극의 코어를 흡원천공(吸元天功)으로 완전히 분해하여 단전에 집어넣은 이후, 강진혁의 내공은 일류나 절정을 아득히 넘어선 마신경(魔神境)의 극치에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고, 미세한 마기가 대기 중의 전자파를 산산조각 냈다.

"거기 서라! 신원 미상의 침입자! 즉시 정지하지 않으면 소형 플라즈마 포격이 개시된다!"

쿠쿵-!

국경 지대의 방벽 위로 거대한 메이저 연합 소속의 무인 경비 로봇들과 PMC 용병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화기는 신서울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출력의 중장비들이었다.

그들은 진무극이 소멸 직전 송출한 데이터 파편을 수신한 직후였다.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 기술과 마공의 비밀을 가로채기 위해 이 국경 지대에 사냥개처럼 모여든 자들이었다.

"오오, 저놈인가? 티타늄 타워를 무너뜨린 그 실험체 07호란 놈이!"

"생체 코어 출력이 감지되지 않는다?! 데이터 오류인가? 아니, 저 미친 존재감은 뭐지……!"

용병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기계의 출력과 나노머신의 동기화율로 상대의 강함을 측정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강진혁에게서는 그 어떤 기계적 파장도, 코어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몸뚱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마기(魔氣)만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진혁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흑안에 담긴 것은 분노도, 경멸도 아니었다. 단지 눈앞에 놓인 벌레들을 정리하듯 무심한 시선뿐이었다.

"프로토콜은 끝났다."

진혁이 입술을 달싹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기준이다."

콰아아앙-!

그의 발밑에서 대지가 종이장처럼 찢어졌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초음속 전개가 대기를 폭발시켰다.

인공지능의 보조 연산도, 시스템의 궤적 예측도 없었다. 오직 강진혁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육신과 마기가 하나로 융합된 절대의 일격이 대륙 연방의 어둠을 향해 내리꽂혔다.

신천마신공의 새로운 역사가, 비명과 함께 찬란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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