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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87화목차

제287화 천마일검(天魔一劍)

쿠구구구구——!

신서울의 상공, 대기를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티타늄 타워의 최정상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고, 그 잔해 사이로 쏟아지는 바람은 매섭고도 차가웠다.

더 이상 푸른빛의 HUD 인터페이스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야를 보조하던 시스템의 음성도, 연산 결과를 띄우던 창도 모두 꺼진 지 오래였다.

완벽한 무(無).

완벽한 고요.

그러나 그것은 약함이 아니었다.

체내의 단전에서 요동치는 내력은 그 어떤 기계 장치의 출력보다도 거대하고 선명하게 강진혁의 사지를 채우고 있었다.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

인공지능의 계산이나 나노머신의 자동 제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심장으로 느끼며, 자신의 의지만으로 기혈을 통제하는 절대의 영역.

강진혁은 칠흑 같은 흑안을 번뜩이며 앞에 선 잔해를 응시했다.

진무극의 잔재가 흩뿌려진 그곳에서,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오리진 수트의 붉은 코어가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큭."

낮게 짓씹는 목소리가 잔해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미 상하반신이 뒤틀리고 프라임 코어가 반쯤 박살 난 상태였음에도, 진무극은 독기 어린 눈으로 강진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진혁…… 이 방해꾼 같은 놈……."

"네 목숨이 질긴 건 인정하지."

강진혁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건조했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손바닥 끝에 모이는 것은 기계적인 플라즈마 에너지나 데이터 파편이 아니었다.

천마(天魔)의 혈족에 흐르는 순수한 마기(魔氣)와, 지금까지 흡수하고 깨달아 온 모든 무공의 이치가 응축된 칠흑빛의 검강(劍罡)이었다.

현대의 첨단 군사 기술도, 고대 마교의 마공도, 결국 인간이 다루는 무(武)의 한 갈래일 뿐이다.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고 마신경의 경지에 도달한 강진혁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진리였다.

일체의 낭비도 없는 궤적.

모든 것을 베어 넘기는 절대의 일격.

[천마일검(天魔一劍).]

슁——!

강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빛 검강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소리조차 먹어치울 만큼 압도적인 밀도를 자랑하며 타워의 상층부를 단번에 반으로 쪼개버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콘크리트와 티타늄 합금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검강의 궤적은 오직 한 곳, 진무극의 심장부에 박힌 오리진 수트의 메인 코어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진무극이 비명을 지르며 남은 출력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쾅——!

강진혁의 [천마일검]이 오리진 수트의 다중 방어막을 종이장처럼 찢어발겼다.

방어 회로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스파크를 튀기며 폭발했다.

파직, 지지직——!

"크윽…… 내, 내가…… 어째서……!"

진무극의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자본의 탑도, 인류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천마 프로토콜도, 이 단 한 번의 순수한 검강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되고 있었다.

강진혁은 그를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준 것은 기술일 뿐이다."

슈우우욱——!

검강이 오리진 수트의 메인 코어를 완전히 관통했다.

콰광——!

중앙 코어가 소멸함과 동시에, 신서울의 밤하늘을 수놓던 거대한 마력 기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지를 뒤흔들던 진동이 멎고,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타워 정상의 붕괴 속에서, 진무극은 피를 토하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불멸의 힘을 누리지 못하는 늙은 독재자의 눈동자에, 디스토피아의 차가운 새벽바람이 쓸쓸하게 비쳤다.

푸스스스…….

진무극의 육체가 분자 단위로 바스러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으로 티타늄 그룹의 절대 군주이자, 이 거대한 비극을 설계했던 창조주의 최후였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붉은 노을이 점차 걷히고, 폐허가 된 신서울의 대지가 드러났다.

탁.

강진혁은 무너져 내리는 잔해 위에서 가볍게 착지했다.

온몸에 엉겨 붙은 핏자국과 먼지가 그의 거친 숨소리에 맞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등은 그 어느 때보다 곧고 단단했다.

"진혁 씨!"

저 멀리 무너진 타워의 안전지대에서, 윤아영과 송수연, 그리고 생체 코어의 부상을 겨우 참아낸 진세린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외가 어려 있었다.

강진혁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스템의 보조도, 인공지능의 안내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자신의 숨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진스토피아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폐허의 대지 위에서, 칠흑의 회로가 은은하게 빛나는 새로운 천마의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진무극이 완전히 소멸한 자리에는 미세한 광자(光子)와 매캐한 오존 냄새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강진혁의 등 뒤로 동료들이 차례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윤아영은 태블릿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고, 송수연은 어깨에 걸친 대도(大刀)를 바닥에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세린은 자신의 가슴 부근을 감싸 쥔 채, 멍한 눈으로 진혁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단전에 내장된 생체 코어는 이제 폭주를 멈췄지만, 영구적인 과부하로 인해 언제 꺼질지 모르는 풍등(風燈) 같은 상태였다.

"진혁……."

송수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벅참과 허탈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끝난 거야? 정말로…… 티타늄 그룹이, 진무극이 끝장난 거냐고."

"끝났어."

강진혁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칠흑빛의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단전의 심처에서 소용돌이치던 마기(魔氣)가 비로소 평온을 되찾고 혈관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스템의 경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심장 구역 마기 폭주 위험도 12.4%’ 같은, 인공지능이 띄우던 잔소리 같은 숫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완벽한 자기 통제감이 채우고 있었다.

윤아영이 셔츠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다가와 자신의 홀로그램 단말기를 터치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진혁 씨, 방금 전 세계 지하 네트워크로 송출되던 진무극의 비상 데이터 패킷을 완벽히 차단했어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업 서버들이 자가 복제 프로토콜을 가동할 뻔했거든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파수 소스 자체를 [만법귀마]의 역류 코드로 싹 지워버렸으니까."

아영의 목소리에는 해방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화이트 섀도와 니르바나를 거치며 티타늄 그룹의 디지털 감시망 아래서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신서울 전체의 중앙 서버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거대 자본의 독점과 감시로 점철되었던 신서울의 디지털 심장이 멈춘 것이다.

"고생했다, 아영아."

진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며 아영의 어깨를 툭 쳤다.

아영은 그 무뚝뚝한 손길에 픽 웃으며 코를 찡긋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저기 혼자서 전차 부대랑 맞짱 깐 진혁 씨가 했지. 근데…… 진짜 시스템 없이 괜찮겠어요? 늘 시야 구석에 떠 있던 그 HUD 말이에요. 갑자기 사라지니까 적응 안 되지 않아요?"

"없으니까 오히려 조용해서 좋군."

진혁의 흑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소모품'이자 '그릇'으로 인식하도록 설계된 도구에 불과했다.

그 도구가 사라졌기에 비로소 강진혁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무공의 모든 분자 단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진세린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과거 티타늄 그룹의 특수전 후사대 대장 시절처럼 매섭고 곧았다.

"강진혁."

"말해라."

"아버지는 사라졌고, 티타늄 타워는 무너졌어. 이 거대한 공백을 메우려 들 하이에나들은 벌써부터 신서울 외곽의 슬럼가와 지하 벙커에서 기어 나오고 있겠지.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진세린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강진혁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행보가 아니라, 이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질문이었다.

강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신서울의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의 지배자였던 마천루의 불빛들은 모두 꺼졌고, 그 자리에 차갑지만 투명한 새벽의 여명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주인? 그런 걸 세울 생각은 없다."

진혁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티타늄 그룹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거대 기업이나 세력이 들어선다면, 그건 껍데기만 바뀐 똑같은 지옥일 뿐이지. 내가 할 일은 그 싹을 처음부터 뽑아버리는 것이다."

"싹을 뽑아?"

"그래. 자본과 힘으로 인간을 구속하고 등급을 매기던 모든 부조리한 프로토콜을 이 대지 위에서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마공의 끝이자, 새로운 천마(天魔)의 길이다."

진혁의 목소리에는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단전에서 피어오른 미세한 마기가 주변의 대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은 공포나 파괴의 기운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와 해방의 기운이었다.

송수연이 가죽 자켓의 지퍼를 올리며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 멋진 소리네! 그래, 기업 놈들이 빨아먹던 피를 이제 우리 손으로 되찾아야지. 니르바나의 잔류 부대들도 이미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어. 슬럼가 애들과 손잡고 신서울의 남은 감시탑들을 전부 밀어버리면 완벽하겠는데?"

"감시탑뿐만이 아니야."

윤아영이 단말기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진무극이 소멸하기 직전 전송한 데이터의 파편 중 일부가 대륙 연방의 다른 메이저 기업들로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됐어요. 그 녀석들도 천마 프로토콜의 기술이나 마공의 데이터를 노리고 이쪽으로 눈을 돌릴 거예요.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겠는걸요."

"오라고해라."

강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칠흑빛 전류가 스파크처럼 튀었다.

과거에는 시스템의 연산과 나노머신의 보조를 빌려야만 겨우 상대할 수 있었던 거대 기업의 특수 정예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신경(魔神境)에 도달한 그에게, 외부의 기술력 따위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누구든 내 길을 가로막는다면, 기계 쪼가리든 자본의 권력이든 전부 내 단전에 처박아 흡수해 주지."

진혁의 오만한 선언에 동료들은 오히려 묘한 쾌감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디스토피아의 밤은 끝났고, 새로운 세상의 여명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천마'가 눈을 뜨고 있었다.

탁, 탁, 탁——.

강진혁이 무너진 타워의 잔해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이어 윤아영, 송수연, 그리고 부축을 받으며 걷는 진세린이 나란히 따랐다.

철컥, 지지직…….

타워의 잔해 속에서 마지막까지 오작동을 일으키던 경비 로봇의 잔해가 완전히 전원 차단되며 불꽃을 튀겼다.

기계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의지와 무공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서울의 거친 새벽바람이 진혁의 흑발을 거칠게 헤집고 지나갔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폐허의 대지와, 그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여정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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