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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85화목차

제285화 초월천마경(超越天魔境)의 개현

타워의 잔해가 검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스으으-.

바람은 차가웠고, 세상은 지독하리만치 조용했다.

그것은 소음이 사라진 세계의 결말이었다. 마천루의 꼭대기,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였던 곳은 이제 거대한 크레이터만이 남아 대지의 흉터처럼 벌어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시야의 구석을 점령하던 HUD 창.

전투 보조 인공지능의 차가운 음성.

체력, 마력, 코어의 출력, 그리고 적의 남은 생체 데이터까지 낱낱이 계산해 주던 그 편리한 족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심장박동이었다.

쿵, 쿠웅-.

단전의 깊은 곳.

과거에는 그저 기계적 회로와 인공 코어의 동력원에 의존해야 했던 그 허전한 공간이, 지금은 거대한 성운처럼 소용돌이치는 순수한 에너지의 바다로 변해 있었다.

‘시스템이 없다.’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짓누르던 거대한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동시에 대지 전체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묵직했다.

파직, 지지직-.

진혁의 피부 위로 아스라이 흐르던 은빛 회로 선이 돌연 짙은 흑빛의 문양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나노머신의 인위적인 제어가 아니었다. 진혁의 세포 하나하나가, 뼛속까지 스며든 마기(魔氣)와 결합하여 스스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진정한 완성.

[ SYSTEM ERROR: Connection Lost ]

[ Protocol Disconnected ]

환영처럼 떠올랐던 마지막 로그마저 완전히 꺼진 시야 속에서,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흑안(黑眼)이 허공을 향하는 순간, 대기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기계의 계산이 필요 없었다.

적의 궤도를 예측하기 위해 0.1초의 연산 시간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이제 진혁의 감각은 물리 법칙의 결을 직접 꿰뚫고 있었다. 바람의 흐름, 대기 중의 기압, 저 멀리 슬럼가의 잔해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인간의 심장박동까지.

만물의 이치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선명하게 읽혔다.

“……진혁 님.”

뒤편, 폐허의 잔해에 기대어 있던 윤아영이 숨을 헐떡이며 불렀다.

그녀의 얼굴은 흙투성이였고, 한쪽 팔에는 응급 패치가 칭칭 감겨 있었다. 송수연과 부상을 추스르고 있던 진세린 역시 숨죽인 채 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달랐다.

이전까지 진혁은 '강력한 기술을 다루는 개조 인간' 혹은 '프로토콜의 승계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재앙이자, 대지를 짓누르는 절대자의 위압감 그 자체였다.

진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아니, 인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다.

티타늄 그룹이 수십 년간 연구하고, 수천 명의 실험체를 갈아 넣으며 갈구했던 '완벽한 천마의 그릇'.

진무극은 그것을 가졌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진무극이 만든 것은 기계 장치와 데이터의 덩어리일 뿐이었으니까.

진짜 천마는, 그 모든 조작된 시스템을 스스로 부수고 나온 파괴자로부터 탄생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그냥 흔들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신서울 전체를 감싸고 있던 지하 전력망의 잔재와, 진무극이 소멸하며 사방으로 뿌려놓았던 데이터 파편들이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고: 미확인 잔류 주파수 감지.]

[지하 네트워크 전역에서 자율 방위 회로가 활성화됩니다.]

진혁의 귀에 들린 것은 시스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기 중에 잔류한 기계적 파동이 진혁의 고막과 신경망을 직접 때리며 울려 퍼지는 공명음이었다.

진무극이 죽기 직전, 전 세계의 지하 네트워크로 송출했던 데이터의 파편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신서울 지하에 잠들어 있던 수천 기의 방위 로봇과, 폐기된 프로토콜의 부산물들이 일제히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슈우우우-.

타워의 부서진 바닥 밑에서 수백 개의 붉은 눈빛이 일제히 점멸했다.

티타늄 그룹의 중앙 제어 시스템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한 잔류 AI들이 집단 군집을 형성한 것이다.

“진혁 씨! 지하의 잔존 회로들이 연결되고 있어요! 무인 방위병들이 이쪽으로 몰려옵니다!”

윤아영이 급하게 단말기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데이터의 흐름을 보니, 그 양은 단순히 몇 대의 로봇 수준이 아니었다. 신서울 지하에 박혀 있던 군사 공장의 자동 생산 라인이 다시 가동되며 수천 기의 살인병기들이 지상으로 기어올라올 기세였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콰구구구구-.

진혁의 단전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거대한 마기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전까지의 마기는 검고 날카로운 투기에 가까웠으나, 지금의 그것은 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천 개의 별이 회전하는 듯한 기묘한 심연의 압도감.

그것이 바로 제5단계, 초월천마경(超越天魔境)의 기운이었다.

“……스스로 기어 나오는가.”

진혁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한마디가 신서울 상공의 공기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슈아아아아-.

지하의 잔해를 뚫고 첫 번째 무인 방위병, 4세대 전투형 사이보그 수십 기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들은 일제히 플라즈마 포와 고주파 블레이드를 전개하며 진혁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휘이익-. 쾅! 콰쾅!

사방이 빛의 세례로 물들었다.

윤아영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폭발의 열풍이 여기까지 밀려와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날렸다.

그러나.

“……어?”

폭연이 걷힌 자리.

진혁은 그저 제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수십 기의 사이보그가 뿜어낸 플라즈마 포화는 진혁의 몸에서 불과 1미터 전방에서 멈춰 서 있었다.

공간 자체가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이 주조해 낸 마신경의 경지는 물리적 공격의 궤도를 눈으로 보고 피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날아오는 에너지의 주파수와 진동수를 감각만으로 파악하여, 주변의 공간 격리를 통해 그대로 무력화시키는 절대의 영역.

만법귀마(萬法歸魔).

현대 공학이 자랑하는 플라즈마 에너지도, 고대 마교의 비기도, 진혁의 앞에서는 그저 한 줌의 바람에 불과했다.

“네놈들이 만든 기술이다.”

진혁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며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따위, 애초에 존재할 가치도 없었어.”

우우우웅-.

진혁의 손바닥이 뒤집혔다.

그 순간, 공간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했다.

흡원천공(吸元天功).

과거에는 단전의 용량과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야만 겨우 사용할 수 있었던 강탈의 비기.

그러나 지금의 진혁에게 그것은 의지만으로 만물의 에너지를 삼키는 무한의 구멍이었다.

파아아아앗-.

수백 미터 반경에 퍼져 있던 무인 방위병들의 코어 에너지가 일제히 역류했다.

기계의 핵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의 고출력 에너지가 뱀의 혀처럼 얽히며 진혁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지직, 파직! 쾅! 쾅! 쾅!

공중으로 도약했던 수십 기의 사이보그들이 에너지를 강제로 빨린 끝에 내부 회로가 타들어가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철컥, 툭.

고철덩어리가 된 잔해들이 비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진혁의 흡원천공은 지상에 국한되지 않았다. 신서울 지하 깊은 곳, 진무극이 남겨둔 잔류 데이터 파편과 중앙 서버의 남은 동력원까지 그 마수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쿠구구구구구-.

“끄아아아악……!”

신서울 일대의 지하 구역 어디선가, 잔류 데이터를 처리하던 서브 AI들의 비명 같은 경고음이 사방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경고! 중앙 코어 서브넷에 과부하 발생!]

[에너지 역류율 300% 초과! 시스템 격리가 불가능합니다!]

[제어권 상실! 제어권 상실—!]

파직, 지지직-. 쾅!

신서울의 밤하늘을 수놓던 대형 홀로그램 광고판들이 일제히 스파크를 튀기며 꺼졌다.

불야성을 이루던 상층 마천루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차갑게 식어갔다.

인공 자본이 만들어낸 영원한 불빛의 도시, 신서울 전체가 진혁의 손짓 하나에 전력 공급이 차단되며 암흑 속으로 잠겨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둠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어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진혁의 지배 아래 놓인 완벽한 밤이었다.

“후우.”

진혁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안개처럼 흩어졌다.

단전의 바다에서 태동하던 에너지가 마침내 완전히 안정되며, 온몸의 세포와 동기화되었다.

[제5단계: 초월천마경(超越天魔境) 정착 완료.]

머릿속에서 들릴 리 없는 시스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쳐 지나갔으나, 진혁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시스템 따위는 이제 필요 없었다.

자신의 감각, 자신의 의지, 그리고 자신이 개척한 무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남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윤아영과 송수연, 그리고 진세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 전체의 전력이 나간 암흑 속에서, 오직 진혁의 눈동자만이 타오르는 흑색의 화염처럼 빛나고 있었다.

“진혁 씨…… 도시의 전산망이 완전히 다운됐어요.”

윤아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 파편들도 전부 소멸했고요. 이제 정말…… 티타늄 그룹의 잔재는 완전히 끝났어요.”

“끝난 게 아니다.”

진혁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밤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가 시선을 신서울의 저 너머,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는 거대한 슬럼가와 하층 구역으로 향했다.

“시작일 뿐이지.”

진무극이라는 거대한 악은 소멸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상처와, 자본과 힘에 짓눌려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기계의 족쇄가 부서진 세상.

법도, 기업의 통제도 사라진 이 무법천지의 디스토피아에서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가려내는 일은 이제부터였다.

진혁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타박, 타박-.

그가 걸을 때마다 대지가 미세하게 울렸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을 완성한 자.

시스템을 찢고, 운명을 거부하며 스스로 신(神)의 영역에 도달한 남자가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신서울의 밤은 깊었으나, 그 끝에는 마침내 진짜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박, 타박-.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는 고요한 신서울의 잔해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진혁의 걸음걸이는 느리지도, 그렇다고 조급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만물의 호흡과 발맞추듯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윤아영이 그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급히 뒤를 따랐다. 송수연과 진세린 역시 부서진 장갑을 추스르며 진혁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된 티타늄 타워의 밑동에서부터 신서울의 하층 슬럼가로 이어지는 대로(大路)는 이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과거에는 거대 기업의 로고가 박힌 비행선들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무자비한 자율 치안 드론들이 하층민들의 머리 위를 핏빛 레이저로 겨누던 디스토피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통제의 장치들은 진혁이 뿜어낸 흡원천공의 파동과 초월천마경의 여파로 완전히 고철덩어리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진혁 씨, 앞으로 어쩔 겁니까?”

송수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티타늄 그룹이라는 거대한 절대악이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유토피아로 변할 리 없었다. 자본의 공백, 권력의 부재는 언제나 또 다른 하이에나들을 불러들이기 마련이다. 전 세계로 송출된 진무극의 데이터 파편들이 어떤 괴물을 싹트게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진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쓸어버린다.”

간결하지만 서늘한 세 글자였다.

그것은 단순히 복수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와 자본, 그리고 왜곡된 힘으로 인간을 억압하던 모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질서를 완전히 뿌리째 뽑아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잔해가 남았다면 밟아 부수고, 썩은 뿌리가 있다면 도려낸다. 그 이상은 없다.”

진혁의 흑안이 어둠에 잠긴 슬럼가의 골목을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기업의 지배가 사라진 공포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있었다. 과거의 강진혁이라면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힘이 없고,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갈려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한 마리의 실험체에 불과했겠지.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나 프로토콜이 허락한 허상 속의 강자가 아니었다.

오직 스스로의 의지와 깨달음으로 단전을 열고, 우주의 이치를 꿰뚫어 마신경의 극치에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천마(天魔)’였다.

파직, 지지직-.

진혁의 어깨를 스치는 바람 속에 미세한 마기(魔氣)의 잔상이 흩날렸다.

그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자, 대기 중의 기압이 미세하게 요동치며 주변의 공간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초월천마경.’

인공지능의 연산 보조도, 차가운 HUD의 수치도 필요 없다.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천지의 기운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절대의 경지. 이 경지에 도달한 이상, 이 세상에 더 이상 진혁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진세린이 입술을 깨물며 진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였던 진무극을 손으로 직접 소멸시킨 남자의 곁. 그늘이 드리워진 가문과 혈통의 굴레 속에서, 그녀 역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 있는 듯했다.

“……나도 함께 가겠다.”

진세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다부진 결기가 어린 것을 본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목만 잡지 마라.”

“……헛소리.”

피식, 진혁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차가운 디스토피아의 밤을 가르며 걸어가는 그들의 뒤로, 신서울의 동쪽 하늘에서 붉은 여명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기계의 시대가 저물고, 자본의 족쇄가 부서진 그 대지 위에서—

진정한 무(武)와 자유를 품은 새로운 천마의 전설이 비로소 그 진짜 서막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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