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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84화목차

제284화 네가 준 것은 껍데기뿐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니, 공기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통째로 굳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티타늄 타워의 최정상은 침묵에 잠겼다.

스파크가 튀던 잔해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멈춘 듯했다.

치지지직―!

진무극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의 마스터 코드가 허공에 불완전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띄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영롱하거나 압도적이지 않았다. 마치 배터리가 다 닳아 꺼져가는 스마트폰의 화면처럼, 파르스름한 잔광만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진무극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은발을 정갈하게 넘기며 완벽한 신사의 면모를 유지하던 그의 가면이 완전히 박살 난 것이다. 그토록 오만하게 인류를 내려다보고, 강진혁이라는 거대한 실험체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불멸의 그릇으로 삼으려 했던 절대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코드가 거부당했다고? 네놈의 뇌 속에 심어진 뉴럴 링크와 프로토콜은 내 설계 하에 움직인다! 나는 창조주다. 네놈의 심장박동 하나, 혈관을 흐르는 나노머신의 밀도까지 모두 내 손아귀에 있어야만 해!"

진무극이 미친 듯이 손가락을 허공에 놀렸다. 마스터 코드를 강제로 재입력하기 위한 비상 명령어들이 가상 화면을 채우려 했다.

하지만―

[SYSTEM ERROR: ACCESS DENIED.]

[FATAL: TARGET REJECTED THE PROTOCOL.]

[WARNING: CORE INTERFACE DISCONNECTED.]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리며 독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던 그 기계적인 음성이 이제는 완벽한 침묵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진혁이 스스로 그 소리를 지워버린 것이었다.

"창조주?"

저음의 목소리가 진무극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강진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 같은 흑안. 그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시스템이 뱉어내던 데이터의 파편이나 푸른빛의 HUD 인터페이스가 비치지 않았다. 오직 타오르는 시커먼 마기(魔氣)와,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생사의 직관만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네가 만든 건 철판과 나노머신 쪼가리에 불과해, 진무극."

진혁의 입술이 비틀리며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크윽……!"

진무극이 당황하며 급히 오리진 슈트의 출력 가속 레버를 당기려 했다. 전신을 감싼 암흑물질 파동이 흉포한 기세로 요동치며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강진혁의 형상이 시야에서 지워졌다.

파지지직!

마광신보(魔光神步).

순간 이동에 가까운 극초음속의 궤적이 대기를 찢었다.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 도달한 진혁에게 더 이상 인공지능의 궤적 예측이나 보조 연산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발끝의 감각과 지면의 반발력, 그리고 공기의 흐름 그 자체만으로 적의 허를 파고드는 절대의 보법이었다.

"커헉……!"

진무극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턱밑까지 육박한 진혁의 손이 뻗어 나왔다.

철컥!

단단한 합금과 암흑물질로 코팅된 오리진 슈트의 넥 라인. 그 가장 방어력이 높고 견고한 부위를 진혁의 손가락이 아귀처럼 움켜쥐었다.

철갑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악력에 진무극의 눈이 황망하게 커졌다.

"이, 이게 무슨……!"

"네가 내 몸에 심어준 건 기술이다."

진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진무극의 발을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키는 비슷했으나, 지금 진혁이 뿜어내는 기세는 마천루를 떠받치는 거대한 산맥 그 자체였다. 진무극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억세스 코드가 진혁의 팔을 타고 흘러들며 살갗을 태우려 했지만, 진혁의 피부 위를 감싼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칠흑빛 문양이 그것을 가볍게 튕겨내고 있었다.

"기계 쪼가리, 나노머신, 그리고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의 족쇄. 네놈은 그것들로 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진혁의 목소리가 타워 최정상의 거센 바람 소리를 뚫고 진무극의 고막에 박혔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진혁의 단전이 우물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단전 속에 응축되어 있던 십수 년 치의 내력과, 진무극으로부터 빼앗아 흡수한 원초적 에너지가 거대한 심장처럼 폭발적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비틀린 혈관을 따라 끓어오르는 기혈의 흐름은 그 어떤 인공지능의 계산식으로도 도출할 수 없는, 인간의 육체가 낼 수 있는 극한의 폭발력장이었다.

"그 기술을 무공으로 소화하고, 짓밟힌 지옥 속에서 내 것으로 만든 건 오직 나 자신이니까."

"크아아악……!"

진무극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진혁의 손바닥에서 흘러넘친 마기가 진무극의 슈트 내부로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흡원천공(吸元天功).

적의 에너지를 강탈하는 그 잔인한 무공은 이제 단순히 에너지를 빼앗는 것을 넘어, 진무극이 평생 동안 쌓아올린 권력과 기술의 근본,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오리진 프라임 코어의 핵데이터까지 송두리째 빨아들이고 있었다.

[경고! 프라임 코어의 무결성이 붕괴됩니다!]

[에너지 역류 지수 한계 초과!]

[시스템: 강제 종료 프로세스를 실행합니다. 실…패…….]

들릴 리 없는 환청 속에서, 진무극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오만함이 사정없이 부서져 내렸다.

"강진혁……! 이, 이 괴물 새끼……!"

"괴물은 내가 아니다. 인간을 숫자로만 재단하던 네놈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괴물이었지."

진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 기나긴 실험을 끝낼 시간이다."

콰아아아앙-!

진혁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와 기혈의 폭발이 진무극의 전신을 감쌌다.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의 모든 첨단 공학적 방어막과 고대 마교의 심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태어난, 순수한 파멸의 힘이었다.

진무극의 오리진 슈트가 삐그덕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균열을 일으켰다. 합금으로 이루어진 장갑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그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던 암흑물질의 파동이 역류하여 진무극의 육체를 안팎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큭……!"

진무극의 입에서 시커먼 혈변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오만과 냉혹함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눈앞의 공포와,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이 한 명의 실험체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뿐이었다.

"네가 준 껍데기는 여기서 끝이다, 진무극."

진혁의 오른손에 칠흑빛 뇌전과 마강이 결합한 압축된 검강이 응집되었다.

신천마신공 제13식 파천검강(破天劍罡) - 참단(斬斷).

그것은 허공을 가르는 검이 아니었다. 공간의 결을 읽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의 분자 결합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절대의 일격이었다.

파지지직-! 슈우우웅-!

"아……."

진무극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진혁의 손에 들린 검강이 진무극의 심장 부근, 즉 오리진 슈트의 메인 코어가 박힌 자리를 향해 가감 없이 찔러 들어갔다.

소리 없는 섬광이 타워 최정상을 하얗게 집어삼켰다.

쾅──────!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진무극의 전신이 수천 개의 빛의 조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와 살이 튀는 죽음이 아니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쌓아올린 모든 자본, 기술, 그리고 불멸에 대한 집착이 분자 단위로 곱게 갈려나가며 허공으로 안개처럼 흩어지는 장엄한 소멸이었다.

"크흣…… 크하하하……."

소멸해 가는 과정 속에서도 진무극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완전히 사라져 가는 시야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진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진혁……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서…… 끝날 것 같나……? 내가 뿌린 데이터의 파편들은…… 이미 전 세계의 지하 네트워크를 타고 돌고 있다……."

"……."

"제2의, 제3의 프로토콜이…… 네놈의 목을 조러 올 것이다…… 크하하하하……!"

마지막 잔광마저 완전히 잦아들었다.

진무극이라는 이름의 존재, 티타늄 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신서울의 지배자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졌다.

후우우우―.

폐허가 된 타워의 잔해 사이로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진혁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손끝에 남은 잔여 에너지를 천천히 털어냈다.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더 이상 귀를 거슬리게 하던 시스템의 경고음도, 불필요한 연산을 강요하던 HUD의 푸른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호흡과, 심장박동만이 단전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알고 있다."

진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무극이 죽었다고 해서 세상의 어둠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데이터의 파편들은 또 다른 욕망을 가진 자들의 손에서 새로운 불씨로 피어오르겠지.

하지만―

"그때도 짓밟아주면 그만이다."

진혁이 고개를 들어 신서울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있는 지평선 너머로, 디스토피아의 오랜 밤을 끝내는 희미한 여명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스템의 족쇄도, 창조주의 그늘도 벗어던진 채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 신천마(新天魔)의 시선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묵직하게 빛났다.

치지직-.

타워의 잔해 사이로 타다 남은 전선들이 마지막 단발마를 토해내며 스파크를 튀겼다.

사방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진무극이 소멸한 자리에 남은 것은 한 줌의 재조차 없었다. 오리진 슈트의 암흑물질이 분자 단위로 분해되며 대기 중으로 기화한 흔적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진혁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의 두 손바닥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쿠구구구-.

단전의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내력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과거에는 시스템의 연산 보조와 인공지능의 개입이 없으면 제어조차 버거웠던 마기(魔氣)였다.

폭주할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던 그 힘이, 이제는 제 손가락 끝의 미세한 떨림 하나까지 완벽하게 복종하고 있었다.

‘이것이…… 마신경(魔神境).’

타인의 기술을 빌리고, 시스템의 허락을 받아 강해지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그는 완벽한 자립(自立)을 이뤄냈다.

그 순간, 진혁의 시야 구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완전히 암전되었다.

[SYSTEM OFFLINE.]

[프로토콜 서버와의 연결이 영구히 차단되었습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완전히 삭제됩니다.]

눈앞을 둥둥 떠다니며 때로는 길잡이가 되고, 때로는 족쇄가 되었던 푸른빛의 HUD 창이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이 한순간에 캄캄해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답답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를 가로막던 인공적인 시각 정보가 사라지자, 세상의 이치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스치는 궤적, 대기 중에 흩어진 미세한 에너지의 파동, 그리고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동료들의 생체 신호까지.

모든 것이 육감(肉感)과 직관만으로 완벽하게 파악되었다.

“……진혁 씨!”

타워의 무너진 계단 아래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잔해를 헤치며 올라오는 이들은 윤아영과 송수연, 그리고 진세린이었다.

윤아영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로도 태블릿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송수연은 거대한 도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진세린은 생체 코어의 과부하로 인해 얼굴 절반이 차가운 은빛 회로로 뒤덮인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최정상에 홀로 서 있는 진혁을 향했다.

“진무극은……?”

송수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무극이 서 있던 빈 공간을 향해 있었다.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송수연의 입이 벌어졌다가 이내 헛웃음과 함께 닫혔다.

“하…… 끝난 거야? 정말로 그 괴물이……?”

“끝났다.”

진혁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타워를 울렸다.

그의 뒤로, 신서울의 거대한 마천루들이 새벽의 찬 바람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무극이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곧바로 지상낙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무극이 소멸 직전 언급했던 데이터의 파편들은 이미 전 세계의 지하 네트워크와 잔존 세력들의 단말기로 퍼져나갔을 터였다.

기업이 지배하던 디스토피아의 잔해 위에서, 권력을 잃은 거대 자본의 파편을 차지하려는 하이에나들이 고개를 치켜들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남이 만들어 놓은 프로토콜의 규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진혁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동료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대지의 기운이 그의 발소리에 맞춰 미세하게 진동했다.

“가자.”

진혁이 윤아영과 송수연, 그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진세린을 차례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청소할 게 아직 남았다.”

새벽의 여명이 완전히 터져 오르며, 썩어빠진 자본의 도시 신서울 위로 붉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족쇄를 부수고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천마(天魔)의 경지에 도달한 강진혁.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묵직하게 내딛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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