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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83화목차

제283화 기술의 종말

시스템의 푸른빛 HUD가 꺼진 시야.

그것은 눈이 멀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뇌를 잠식하고 시야를 왜곡하던 인공지능의 차가운 렌즈가 깨끗하게 닦여 나간 것에 가까웠다.

강진혁의 망막에는 더 이상 에러 로그나 쿨다운 타이머가 표시되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결, 대기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적의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찰나의 궤적만이 온전히 박혔다.

“……이게 무슨……!”

진무극의 입에서 경악 어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그의 오리진 풀 아머드 슈트가 뿜어내는 붉은 암흑물질 코어의 출력이 9만 메가와트를 돌파하며 주위의 공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지구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초고출력 에너지 포격.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거대 자본과 초기술이 빚어낸 현대의 '신(神)' 영역이었다.

비이이이——!

공기를 태우며 타오르는 플라즈마 레이저가 거대한 빛의 창이 되어 진혁의 정면을 강타하려 했다.

과거였다면 프로토콜의 연산 보조를 받아 회피 궤적을 계산하고, 나노머신의 동기화율을 끌어올려 간신히 피하거나 방어막을 전개했어야 할 공격.

그러나 지금의 강진혁은 달랐다.

후우웅.

진혁의 몸이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광속에 가까운 플라즈마 레이저가 그의 귓가를 스치며 대지를 종이처럼 갈라놓았다.

오직 기계 장치의 연산 궤적과 입력된 프로그램에만 의존해 공격을 퍼붓던 진무극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브먼트였다.

슈트의 타겟팅 레이저가 진혁의 잔상을 쫓아 미친 듯이 꺾였다.

“어디로 도망치느냐, 이 버려진 실험체 놈이!”

“도망치는 게 아니다.”

진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그의 형체가 허공에서 지그재그로 꺾였다.

마광신보(魔光神步).

그것은 이제 시스템이 짜준 보폭과 각도를 따르는 무술이 아니었다. 심장의 고동, 발끝이 대지를 차고 나르는 순간의 반발력, 그리고 대기 중에 흩어진 마기의 흐름을 몸소 느끼며 스스로 발 디딜 곳을 창조하는 순수한 육신의 극치였다.

콰아아앙!

진무극이 난사한 플라즈마 난타가 진혁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바닥을 완전히 기화시켰다.

콘크리트와 티타늄 합금이 섞인 바닥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마그마처럼 끓어올랐다.

하지만 폭발의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잿더미가 된 잔해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마기를 두른 강진혁의 주먹이었다.

“크윽……?!”

진무극의 안면을 보호하던 오리진 슈트의 전면 플라즈마 실드가 푸르게 요동쳤다.

진혁의 주먹이 닿는 순간, 단순한 물리적 충격이 아니라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에너지를 단숨에 빨아들이는 거대한 와류가 발생했다.

흡원천공(吸元天功).

“크아악! 내 슈트의 출력이…… 빠져나간다?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진무극은 당황하며 뒤로 급격하게 물러섰다.

슈트의 메인 컴퓨터가 경고음을 미친 듯이 토해내고 있었다.

[경고! 미확인 에너지 흡수 현상 감지!]

[오리진 코어의 출력이 7.4% 강탈당했습니다!]

[대응 프로토콜 구동 불가……. 시스템 제어권 마찰 발생!]

“내 힘은 시스템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진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전신에 새겨진 은빛 회로 선들이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점멸하며 거대한 열기를 뿜어냈다.

나노머신은 더 이상 그의 몸을 통제하는 주인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혁의 의지와 기혈에 복종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진무극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1000년 전 천마의 유골을 발굴하고, 수십 년간 수많은 인간들을 실험체로 갈아 넣으며 완성한 '천마 프로토콜'이었다.

모든 데이터는 자신의 통제 아래 있어야 했고, 강진혁은 그 거대한 완제품을 담기 위한 가장 우수한 그릇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그릇이 스스로 주인의 손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방싯거리지 마라……! 네 놈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나다! 마스터 코드 오버라이드!”

진무극이 가슴팍에 장착된 메인 콘솔의 비상 레버를 강제로 밀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번뜩이며 신서울 전역에 깔려 있던 티타늄 그룹의 네트워크 잔재가 진혁의 신경망을 향해 재차 락온(Lock-on)을 시도했다.

지직, 지지직—!

진혁의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튀었다.

뇌리에 박혀 있던 프로토콜의 잔재가 강제로 재구동되려 하는 통증.

하지만 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을 헤집는 기계적 명령어들을 향해 자신의 내공을 검강처럼 날카롭게 갈아 세웠다.

툭.

뇌리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완벽한 단절.

더 이상 진무극의 서버나 신서울의 메인 컴퓨터가 보내오는 주파수는 진혁의 신경망에 닿지 못했다.

“……코드가, 거부되었다고……?”

진무극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공포가 서렸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던 시대, 그 최정점에 서 있던 독재자가 맛보는 통제 불능의 경외감이었다.

“네놈이 만든 건 껍데기뿐이다.”

진혁의 발소리가 허공을 밟았다.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몸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진무극이 다시 한번 오리진 슈트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양팔의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전개했다.

파지직-! 웅장한 고주파음과 함께 공간을 가르는 참격이 날아왔다.

하지만 진혁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진무극의 심장 박동과 슈트 내부 기판의 전류 흐름만이 선명한 파문으로 다가왔다.

슈우욱.

진무극의 참격이 진혁의 잔상을 베었을 뿐, 진혁의 본신은 이미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와 있었다.

“어……?”

“끝이다, 진무극.”

진혁의 손이 진무극의 목을 감싸고 있는 오리진 슈트의 넥 라인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거대한 마기가 흡원천공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진무극이 지닌 모든 코어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콰구구구궁—!

“크아아아아악——!”

진무극의 입에서 비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리진 풀 아머드 슈트의 핵심 동력원인 5세대 암흑물질 코어와 프라임 생체 코어가 동시에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진혁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흡원천공(吸元天功)의 와류는 단순한 에너지 탈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무극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권력과 자본, 그리고 타인의 목숨을 제물 삼아 얻어낸 불멸의 환상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절대의 사형선고였다.

지직, 지직, 지지지직—!

“안 돼…… 내 코어가……! 내가 만든 완벽한 세계가……!”

진무극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그의 피부가 급격하게 늙어가기 시작했다. 생체 코어가 공급하던 막대한 에너지가 순식간에 차단되고, 오히려 역류한 마기에 의해 세포가 파괴되는 노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나노머신과 최첨단 시술로 30대의 젊음을 유지하던 그의 외견이 본래의 나이인 60대 중반의 흉측한 노인네로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기계로 치장한 가짜 불멸의 몰락.

그것은 자본이라는 신(神)을 믿고 인간성을 버린 자가 맞이해야 할 당연한 종말이었다.

“진혁아……! 기다려라……! 네가 원한다면 티타늄 그룹의 모든 권력과 지분을……!”

“권력? 지분?”

진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목을 움켜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자, 진무극의 슈트 장갑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지며 기괴한 금속 파열음을 냈다.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너와 함께 지옥에나 가져가라.”

콰아앙!

진혁의 단전에서 압축된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신천마신공 제12식 '만상귀일(萬象歸一)'의 응축된 기류가 진무극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진무극의 오리진 슈트가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일으켰다.

초고출력 플라즈마를 발생시키던 기판들이 견디지 못하고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암흑물질의 제어가 풀리며 사방으로 파괴적인 에너지가 흩어졌다.

쿠구구구궁—!

신서울의 상공을 가르며 우뚝 솟아 있던 티타늄 타워의 잔해가 완전히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과 강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파멸의 중심에서 진혁은 진무극의 멱살을 잡은 채 하늘로 솟구쳤다.

“이것이 네가 말하던 천마의 그릇인가.”

진혁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놈이 만든 것은 단 한 번도 천마가 아니었다. 오직 네 비열한 욕망을 담기 위한 찌그러진 깡통에 불과했지.”

“크큭…… 크하하하……!”

진무극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미친 듯이 웃어댔다.

입안에서 터져 나온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여전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치자. 하지만 강진혁, 잊지 마라. 내가 전 세계 지하 네트워크로 송출한 그 데이터의 파편들은 이미 수많은 음지에 퍼져 나갔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도, 네가 밟고 서 있는 이 세상 곳곳에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네가 나를 죽여도, 제2의 진무극이, 제3의 프로토콜이 네 목을 조여올 것이다……!”

소름 끼치는 저주.

하지만 진혁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들이 기어오른다면, 그때마다 전부 짓밟아주면 그만이다.”

진혁의 오른손에 엄청난 양의 칠흑빛 마강(魔罡)이 모였다.

더 이상 시스템의 보조 연산도, 프로토콜의 안정화 장치도 없었다. 오직 강진혁 자신의 심장박동과 뼈마디를 타고 흐르는 순수한 무공의 경지, 마신경(魔神境)의 극치만이 그 검강을 지탱하고 있었다.

신천마신공 제13식.

파천검강(破天劍罡) - 참단(斬斷).

슈우우우웅—!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바람도, 무너져 내리는 철골의 소리도, 진무극의 숨소리도 완벽하게 차단된 진공의 세계.

진혁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칠흑빛 검강이 진무극의 오리진 슈트와 프라임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지이잉—! 툭.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의 정적.

진무극의 동공이 한없이 확장되었다. 그의 가슴팍에 박힌 5세대 암흑물질 코어가 분자 단위로 잘게 쪼개지며 빛을 잃어갔다.

“아……”

진무극의 입에서 마지막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오리진 풀 아머드 슈트가 사방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철갑이 부서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육체 역시 진혁의 검강이 뿜어낸 고압의 마기에 의해 단숨에 증발하기 시작했다.

빛.

그리고 완벽한 암전(暗轉).

티타늄 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천마 프로토콜을 창조하여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괴물 진무극은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콰구구궁—!

진무극이 소멸한 자리에 남은 것은 거대한 폭발의 파문뿐이었다.

진혁은 그 폭풍의 폭우 속에서 홀로 공중에 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던 하층 슬럼가의 매캐한 연기와 먼지가 걷히고, 신서울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진혁의 뺨을 스쳤다.

툭.

진혁의 몸이 타워의 무너진 잔해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단전의 내력은 한계까지 소모되어 찌릿한 고통을 전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머릿속을 웅웅거리며 괴롭히던 시스템의 알람 소리도, 감정을 강제하던 푸른빛의 HUD도 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숨을 쉬고, 스스로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완벽한 자유.

그것은 진혁이 지난 수년 동안 지옥 같은 실험실과 슬럼가의 바닥을 구르며 갈망해 마지않았던 진정한 힘이었다.

“……진혁 오빠!”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진 타워의 잔해 사이로 윤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는 저항군 '니르바나'의 송수연과 부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진세린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윤아영은 진혁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다 그의 온몸이 피투성이인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의 푸른빛 안경 너머로 데이터를 스캔하려던 시선이 허공에서 멈췄다.

“진혁 씨…… 시스템이…… 반응이 없어요. 네트워킹 창이 완전히 닫혔어. 프로토콜이…… 진짜로 소멸한 거야?”

윤아영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묘한 해방감이 묻어났다.

진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초부터 내 안에 있던 건 없었어.”

진혁의 말에 윤아영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안도한 듯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송수연이 거대한 도검을 땅에 짚은 채 진혁에게 다가와 투박하게 어깨를 툭 쳤다.

“기어코 해냈군, 진혁. 신서울의 하늘이 아주 깨끗해졌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무극이 만들어낸 인공 구름과 차원 침공군이 남긴 붉은 균열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차갑지만 맑은 새벽의 여명이 동쪽 끝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비록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의 파편들이 전 세계 지하 네트워크에 흩어져 또 다른 불씨를 피워 올릴지라도, 그리고 세상이 완벽하게 평화로워지지 않을지라도 상관없었다.

진혁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그 어떤 시스템의 보조 없이도 완벽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끝이 아니야.”

진혁의 나지막한 음성이 새벽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기계와 자본이 지배하던 디스토피아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모든 족쇄를 부수고 스스로 천마의 경지에 오른 강진혁의 발걸음이, 이제는 주인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묵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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