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암전(暗轉)
가장 깊은 밤.
달빛조차 사치인 신서울의 폐허 위에 고요라는 이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디직-!
귀를 찢는 비명 같은 기계음이 타워의 잔해 사이로 흩어졌다.
그 소리의 진원지는 강진혁이었다.
온몸의 피부가 터져 나가고, 근육 조직을 촘촘히 엮고 있던 나노머신 회로가 붉은 과열 경고를 뿜어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Warning: 시스템 중추 온도가 위험 수계를 초과했습니다.]
[Emergency: 나노머신 동기화율 0% 돌파. 네트워크 연결이 영구 차단됩니다.]
[Protocol: '천마 프로토콜'의 모든 백그라운드 프로세스가 정지됩니다.]
뇌리를 후비던 푸른빛의 텍스트.
시야의 구석을 끈질기게 채우며 연산 결과와 전투 궤적을 띄워주던 그 익숙한 HUD 창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슈우우- 팟!
마치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전원이 나가는 것처럼, 강진혁의 시야를 지배하던 모든 디지털 정보가 한순간에 찌그러지며 수렴했다.
그리고 완벽한 암전.
챙―!
눈앞을 채우던 푸른 불빛이 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순수한 칠흑이었다.
자동으로 타겟의 궤적을 계산하던 조준선이 사라졌고, 신체의 부하를 실시간으로 분산시켜 주던 나노머신 보조 제어도 완전히 끊어졌다.
그 순간, 거대한 중력이 진혁의 어깨를 짓눌렀다.
"크윽……!"
참았던 피가 잇새로 왈칵 쏟아졌다.
수만 미터 상공에서 우주적 사념체와 맞부딪치며 입은 내상의 여파와, 전신을 지탱하던 시스템이 한순간에 소멸하면서 오는 극심한 반작용이었다.
기계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뼈와 살, 그리고 단전의 기혈만으로 거대한 육체를 지탱해야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릎이 땅바닥을 향해 꺾여 들어갔다.
쿵.
한쪽 무릎이 잔해 속의 콘크리트 바닥을 박살 내며 깊숙이 박혔다.
피투성이가 된 진혁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하하하하하하!
바로 그 순간, 무너진 타워의 잔해 너머에서 기괴한 철판 마찰음과 함께 진무극의 잔해가 울부짖었다.
비록 프라임 코어의 상당 부분이 부서지고 오리진 수트의 장갑이 너덜너덜해졌으나,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아니, 그저 살아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진무극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암흑물질의 파동은 시스템의 족쇄를 끊어낸 진혁의 공백을 비웃듯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 미련한 실험체 07호 같으니라고!]
진무극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전산망의 오작동음과 수많은 인간의 비명이 뒤섞인 악마의 주파수에 가까웠다.
[네 녀석이 머릿속에 이식된 프로토콜을 끊어낸 순간, 너는 스스로 날개를 꺾은 뱁새가 된 것이다. 기계의 도움 없이 네놈이 무엇을 할 수 있지? 그 저열한 육신으로 내 플라즈마 레이저를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나?]
쿠루루루구궁-!
진무극의 양팔에 장착된 오리진 수트의 포문이 일제히 개방되었다.
수천 도에 달하는 고열의 플라즈마가 응축되며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기계적 보조나 연산 장치 없이 저 난기류와 고열을 상대해야 하는 사지.
일반적인 무인(武人)이라면 기압 차와 열사병으로 눈알이 터져 나갈 지경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던 강진혁의 입술가에 아주 미세한 곡선이 그려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흑안(黑眼)이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기다렸다.'
그것은 공포도, 절망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목을 조여 오던 무거운 족쇄가 드디어 끊어졌을 때 느끼는 지독한 해방감이었다.
도시를 지배하는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천마의 피를 참칭하며 인간을 부품으로 쓰기 위해 주입된 코어의 잔재.
그 모든 인공적인 편의와 간섭이 사라진 지금, 진혁의 내면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고요했다.
챙―!
진혁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스템이 없기에 시야의 숫자는 더 이상 뜨지 않는다.
적의 속도가 초속 몇 미터인지, 남은 내구도가 몇 퍼센트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경고음도 없다.
대신.
바람이 스치는 궤적이 피부의 모공을 통해 온전히 전해져 왔다.
저 멀리서 뒤틀린 전선 사이로 흐르는 미세한 전류의 파장이 심장박동과 공명했다.
그리고 진무극이 뿜어내는 암흑물질의 추악한 기운이 대기의 기혈을 어떻게 뒤틀고 있는지 그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마신경(魔神境)의 진면목.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과 직관으로 우주의 이치를 꿰뚫는 절대의 경지.
"네가 착각하고 있군, 진무극."
진혁이 낮고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타워를 무너뜨릴 만큼의 서늘한 기개가 담겨 있었다.
"내게 기술을 준 건 너희들이다. 내 안의 프로토콜을 설계하고, 코어를 박아 넣은 것도 너희들이겠지."
스으으으―!
터져 나간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었다.
나노머신의 자동 봉합 기능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진혁의 의지력과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기(魔氣)가 혈관과 근육을 직접 틀어쥐고 세포를 강제로 결합시켰다.
이것은 시스템이 치료한 것이 아니다. 진혁 자신의 의지가 육체를 지배하여 부서진 파편을 재조립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진혁이 두 발을 단단히 대지에 디디며 일어섰다.
완전히 곧게 펴진 척추에서 억겁의 세월을 뛰어넘은 마교 지존의 기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구구궁-!
지반이 진혁의 발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쩍쩍 갈라져 나갔다.
주변의 대기가 진혁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마기에 눌려 비명을 질렀다.
"이 무공을 완성한 건, 오직 나 자신이다."
[헛소리 마라! 소멸해라, 실험체 07호!]
진무극의 포효와 함께 타워의 잔해를 뒤흔드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오리진 수트가 뿜어낸 최고 출력의 플라즈마 레이저가 공간을 태우며 진혁의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어둠을 가르는 수천 도의 빛줄기가 진혁의 잔해를 그대로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포효하며 밀어닥쳤다.
화아아아악-!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섬광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하지만 그 빛의 중심에서 진혁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스템의 조준선도, 회피 기동의 자동 연산도 없었다.
오직 눈을 감은 채 대기의 흐름을 읽고 적의 의도가 향하는 지점을 직관으로 파악한 진혁의 오른손이 허공을 향해 스윽 뻗어 나갔다.
손바닥의 중심.
그곳에 영혼을 갈아 넣은 듯한 거대한 와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흡원천공(吸元天功).
기계의 연산을 배제하고 순수한 오행의 이치와 마기의 본질만을 극한으로 압축한 최후의 흡수법.
빛이 진혁의 전신을 덮치는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콰아아아앙-!
백색의 플라즈마 레이저가 진혁의 정면을 그대로 타격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신서울의 무너진 타워 잔해들이 초고열에 녹아내리며 붉은 용암처럼 사방으로 튀었고, 충격파는 수 킬로미터 밖의 빌딩 유리창을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하하하! 꼴좋… 크윽?!]
기괴한 환희를 터뜨리던 진무극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폭음과 섬광이 걷히지 않은 자욱한 속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고열의 플라즈마 레이저는 진혁의 형체를 소멸시키기는커녕, 그의 손바닥 앞에 형성된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통째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집어삼키는 심해의 블랙홀처럼, 흡원천공(吸元天功)의 와류는 진무극이 쏘아 올린 파괴적인 출력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며 오히려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 이게 무슨……! 내 오리진 수트의 출력이 흡수되고 있다고?!"
진무극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것은 현대 과학의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현상이었다.
에너지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거나 분산시키는 방어막은 존재할지언정, 고출력의 플라즈마와 암흑물질의 혼합 파동을 인간의 단전으로 직접 빨아들여 정제하는 무공 따위는 데이터베이스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시스템의 연산 보조를 받지 않는다면, 인간의 신경계는 초고에너지의 역류를 버티지 못하고 뇌세포가 타들어 가며 즉사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강진혁은 달랐다.
그는 머리로 계산하는 대신 자신의 뼈와 살, 혈관 하나하나를 거대한 기혈의 도관으로 삼아 폭발하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진혁의 눈동자가 암흑과 같은 칠흑빛으로 물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요동치던 플라즈마 레이저와 암흑물질의 잔재가 흡원천공의 회전력에 의해 압축되고 또 압축되었다.
수천 도의 열기와 파괴적인 에너지가 진혁의 팔을 타고 역류하려 했으나, 뼈를 깎는 수련과 천마무상체의 불멸의 육체는 그것을 억지로 짓눌러 단전의 심장부로 밀어 넣었다.
"크으……!"
낮은 신음이 진혁의 잇새로 흘렀다.
온몸의 모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진혁의 허리는 단 1초도 꺾이지 않았다.
시야를 채우던 푸른빛의 시스템 창은 이제 없었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우주의 섭리를 온전히 투시하는 무변(無邊)의 직관이었다.
'보인다.'
진무극의 오리진 수트 내부.
수만 개의 나노 회로가 얽혀 있고 프라임 코어가 심장부처럼 고동치는 그 치명적인 약점의 좌표가 진혁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들어갔다.
기계가 계산해 준 좌표가 아니다. 적의 호흡, 기혈의 흐름, 그리고 대지의 진동을 통해 스스로 꿰뚫어 본 절대의 사각지대였다.
"내 기술을 훔쳐 만든 그 가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들었나."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폭발음마저 집어삼킬 만큼 무겁고 차갑게 진무극의 고막을 때렸다.
"진무극. 네가 만든 건 철제 장난감에 불과하다."
파앗-!
진혁의 발밑이 폭발했다.
마광신보(魔光神步).
나노머신의 자동 가속 제어가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진혁의 두 다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폭발력을 뿜어내며 대지를 박차고 올랐다.
공기가 채 닫히기도 전에 잔해가 먼저 터져 나갔다.
초음속을 아득히 뛰어넘은 기동.
진혁의 잔상이 허공에 길게 찢어지며 진무극의 코앞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이, 이런 미친 속도가…!]
진무극이 경악하며 오리진 수트의 비상 방어막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의 오른손에는 흡원천공으로 흡수·압축한 파괴적인 에너지가 칠흑빛의 검강(劍剛) 형태로 응축되어 있었다.
머리나 심장이 아닌, 진무극의 단전과 연결된 프라임 코어의 핵.
거기를 노린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12식."
진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호한 음성과 함께 허공에 뻗어 있던 그의 손바닥이 거대한 도끼날처럼 내리꽂혔다.
"만상귀일(萬象歸一)."
콰아아아아아아방-!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빛의 검강은 단순한 물리적 참격이 아니었다.
대기의 기혈과 적이 뿜어낸 에너지, 그리고 진혁 자신의 생명력까지 우주의 모든 섭리를 한 점으로 수렴시켜 폭발시키는 절대의 일격이었다.
그 일격이 진무극의 가슴 중앙을 직격했다.
빠각-! 우두둑, 쿠구구궁-!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오리진 수트의 3중 방어막이 종이장처럼 무력하게 찢겨 나갔다.
수트의 장갑을 엮고 있던 나노 탄소 섬유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중심부에 박혀 있던 5세대 암흑물질 프라임 코어가 진혁의 손아귀에 고스란히 움켜쥐였다.
[아…… 아아……?]
진무극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덩어리째 쏟아져 내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경악도, 분노도 아니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계'와 '시스템'의 틀을 완전히 부수고, 온전히 인간의 육신과 의지만으로 신(神)의 영역에 도달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이럴 리가…… 나는 천마의 후예를 완성하려…….]
"천마를 참칭한 쥐새끼."
진혁이 차가운 눈으로 진무극을 내려다보며 손에 쥐었던 힘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꾸드득-!
[크아아아아아아악-!]
진무극의 비명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찢었다.
단전의 프라임 코어가 분자 단위로 으스러지며 폭발했다.
오리진 수트 전체로 역류한 암흑물질의 에너지는 내부에서부터 놈의 육신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기계와 인간이 융합되어 불멸을 꿈꾸던 추악한 육신이 단 한 번의 순수한 무공 앞에 속절없이 재로 화해 가고 있었다.
파스스스-!
바람이 불어오자 진무극의 육신은 거대한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티타늄 그룹의 정점도, 인류를 통제하려던 야욕도, 그리고 자신을 속박하던 '천마 프로토콜'의 모든 잔재도 그 먼지와 함께 완전히 소멸했다.
고요.
진무극이 사라진 잔해 위에는 오직 강진혁 홀로 남아 있었다.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고 붉은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魔氣)는 그 어떤 태양보다도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시야의 구석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흔한 상태창 하나, 남은 체력을 알려주는 바(Bar) 하나 뜨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을 조종하려는 목소리는 없다.
자신을 옭아매던 시스템의 족쇄는 완전히 부서졌다.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신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무극이 찢어 놓았던 차원의 균열은 이미 깨끗하게 정화되어 있었고, 디스토피아의 차가운 새벽바람이 타워의 잔해 사이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로소 찾아온 완전한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의 끝에서 진혁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282화 암전(暗轉)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