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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81화목차

제281화 시스템의 반역

푸스스스―!

신서울의 상공을 뒤덮었던 차원의 균열이 닫히며 쏟아져 내리던 붉은 사념의 비가 멎었다.

하지만 대지의 잔해 속에서 진동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파괴된 티타늄 타워의 잔해, 그 거대한 철근과 콘크리트 무덤 한가운데서 강진혁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피투성이가 된 채 찢어진 의복 사이로 드러난 그의 상체에는 칠흑 같은 우주의 문양을 닮은 마신경(魔神境)의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끝났나…….'

머릿속에서 습관처럼 읊조려지던 차가운 기계음의 인공지능 보이스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했다. 이미 진혁은 시스템의 보조를 탈각하고 오직 자신의 직관과 육신만으로 만물의 결을 지배하는 절대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ZZZ-!

삐이익-!

"……!"

갑자기, 강진혁의 시야 구석,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 강렬한 섬광이 튀었다.

[SYSTEM WARNING: CRITICAL ERROR.]

[CRITICAL ERROR: Root Access Violation.]

[경고! 알 수 없는 마스터 코드가 중추 신경계에 침투했습니다.]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번쩍였다.

수천 킬로볼트의 고압 전류가 척수를 타고 역류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크윽……!"

치밀어 오르는 피를 삼키며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붉은빛 경고창. 그것은 낯익으면서도 동시에 끔찍하게 불길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SYSTEM INFO: 천마 프로토콜 (HEAVENLY DEMON PROTOCOL) v3.04]

[대상 사용자: 강진혁 (실험체 07호)]

[상태: 마스터 코드 [Titanium_Root_001]에 의해 권한이 강탈당했습니다.]

[제어권 이전 중… [10%… 35%… 78%…]]

"이…… 새끼가."

진혁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어린 채 번뜩였다.

기억의 저편, 티타늄 그룹의 지하 실험실에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혈관과 뼛속을 지배해 오던 악몽의 유산.

진무극이 소멸 직전, 혹은 그 이전에 심어놓았던 최후의 백도어(Backdoor) 프로그램이 비로소 진짜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지직, 지지직-!

나노머신들이 일제히 반역을 일으켰다.

혈관 속을 유영하며 신체를 강화하고 상처를 치유하던 미세 기계 장치들이 주인의 의지를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수많은 바늘이 신경을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진혁의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크아아……!"

스스로의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근육이 비틀리고 뼈가 삐걱이며, 나노머신이 형성한 강철 같은 구속력이 진혁의 팔다리를 사방으로 옭아맸다.

마치 거대한 인형의 줄을 쥔 조종사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딱이기라도 하듯, 진혁의 몸이 허공으로 억지로 떠밀렸다.

투두둑-!

피부 표면의 회로가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무너진 타워의 잔해 그늘 속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크하하하하!"

지면을 짓누르며 일어선 존재가 있었다.

분명 분자 단위로 산산조각 났어야 할 진무극의 잔해 일부가, 타워 하부의 비상 데이터 저장고와 결합하여 기괴한 형태의 아머드 슈트를 재구축해 내고 있었다.

[오리진 풀 아머드] 슈트의 잔재와 5세대 암흑물질 코어의 비상 에너지가 뒤엉킨 형체.

그 중심에서 진무극의 목소리가 왜곡된 파장으로 흘러나왔다.

[가상으로 다루던 그릇 따위가 분수를 몰라도 유분수지. 강진혁, 네가 아무리 마신경의 경지에 올랐다 한들…… 그 육체를 이루는 세포 하나, 핏줄 하나, 그 안의 나노 회로까지 전부 누구의 손에서 빚어졌는 줄 아느냐?]

진무극의 잔재가 허공에 떠오른 진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진무극의 얼굴은 반쯤 녹아내려 있었으나, 그 눈동자 속에는 광기 어린 승리의 환희가 가득했다.

[네놈의 그 단전, 네놈의 그 핏줄, 네가 숨 쉬는 모든 순간의 데이터는 내 연구실의 서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천마 프로토콜은 애초에 네가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어. 그것은 완벽한 '내'가 되기 위한 임시 보관함에 불과했다!]

[SYSTEM INFO: 마스터 코드가 중추 신경계를 완벽 제어합니다.]

[사용자 강진혁의 생체 코어 출력 제어권 상실.]

[신체 자율 신경계: SYSTEM OVERRIDE IN PROGRESS.]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경고창이 이제는 눈이 멀 정도로 번쩍였다.

머릿속의 모든 사고 회로가 압박당하며, 진혁이 쌓아 올린 마기(魔氣)의 운기조식이 채 끝맺음을 맺지 못한 채 흩어졌다.

단전 속에서 요동치던 칠흑의 내력이 역류하여 심장을 짓눌렀다.

크윽-!

입가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나노머신의 압박감은 마치 수만 톤의 수압이 전신을 짓누르는 것과 같았다.

움직일 수 없다. 손가락 하나, 눈썹 하나조차 진혁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 무릎을 꿇어라. 네놈이 휘두르던 그 모든 힘은 원래 내 것이다. 주인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진무극의 포효와 함께, 전 세계의 지하 네트워크로 송출되던 잔류 데이터 파편들이 일제히 진혁의 몸을 향해 빨려 들어왔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붉은 레이저 격리벽이 진혁의 사방을 감쌌다.

이대로 가면 뇌의 모든 기억과 신경망이 마스터 코드에 의해 완전히 포맷당하고, 진무극이 꿈꾸던 '완벽한 그릇'으로 전락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끔찍한 고통과 속박 속에서도, 강진혁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크…… 큭큭……."

[……뭐가 우스우냐?]

진무극의 목소리에 미묘한 당혹감이 섞였다.

분명 완벽하게 제압당했을 터인 실험체 07호. 그 어떤 인간이라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상황에서, 진혁의 흑안은 오히려 타오르는 불꽃처럼 기이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강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록 나노머신이 그의 목을 강제로 꺾으려 들었으나, 진혁은 그 구속력 자체를 온몸의 근육과 뼈로 버텨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진무극."

[……!]

"네 녀석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진혁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며,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네가 만든 건 이 '프로토콜'이야. 그 껍데기 같은 시스템이고, 그 안에서 굴러가던 연산 장치 나부랭이지."

[방싯거리지 마라! 지금 네 뇌와 신경은 내 손아귀에……!]

"그래. 맞지. 그것만큼은 인정해주마."

진혁이 낮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찢어놓던 붉은 경고창의 폭격 속에서, 진혁은 오히려 자신의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스템이 주입한 데이터, 나노머신이 깔아놓은 회로, 진무극이 설정해 둔 마스터 코드의 접속 주파수.

그 모든 인위적인 족쇄들이 역설적으로 진혁에게 하나의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강해진 게…… 이 시스템의 보조 덕분이었다고?'

아니다.

초기에 가속을 붙여준 것은 프로토콜이었을지 몰라도, 2단계 '마기융합'을 거치고, 3단계 '천마현신'을 지나, 마침내 시스템 AI의 보조 HUD를 완전히 탈각한 채 도달한 마신경(魔神境)의 경지는 오롯이 자신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터득한 '무(武)의 직관'이었다.

나노머신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했는가?

아니다.

천마 프로토콜이 없으면 검을 쥐지 못했는가?

천만에.

진혁이 단전 깊은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곳에는 진무극의 마스터 코드가 쑤셔 박힌 신경망의 중추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기괴하게 뒤틀린 나노머신들의 군집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진짜 주인을 참칭하는 가짜 기생충들이 진혁의 단전을 잠식하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내 안에서 꺼져라."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진혁의 온몸에서 형언할 수 없는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SYSTEM WARNING: ERROR-ERROR-ERROR!]

[ANOMALY DETECTED IN THE HEART ZONE!]

[경고! 사용자 단전의 마기 출력이 설계 한계를 300% 초과했습니다!]

지직- 지지지직-!

진혁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붉은빛 격리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노머신들이 통제력을 잃고 튀기 시작했다. 진혁의 신경망을 쥐락펴락하던 마스터 코드의 주파수가 역류하는 마기의 거대한 압력에 부딪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을……?! 내 마스터 코드를 거부하고 있어? 인간의 육신이 어떻게 시스템의 제어 코드를 역류시킨단 말이냐!]

진무극의 잔재가 경악 어린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현대 과학과 자본, 그리고 수천 년간 쌓아온 마교의 유전공학이 결합된 '티타늄 그룹의 정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시스템은 계산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연산할 수 없다.

규격화된 데이터와 프로토콜의 알고리즘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의 의지'라는 변수를, 저 오만한 독재자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가 준 건 도구였다."

진혁이 핏발 선 눈으로 진무극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나노머신의 지배를 거부하고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칠흑빛 마강(魔罡)이 실오라기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걸 무공(武功)으로 빚어낸 건…… 나다."

[SYSTEM CRITICAL: USER OVERRIDE ACTIVATED.]

[WARNING: 프로토콜 코어의 강제 초기화 시퀀스 진입.]

[시스템의 모든 제어권을 포기하시겠습니까? (Y/N)]

허공에 떠 있던 모든 붉은색 HUD와 인터페이스 창들이 일제히 점멸했다.

진무극이 필사적으로 주입하려던 마스터 코드가 진혁의 단전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기(魔氣)의 압력에 못 이겨 금이 가기 시작했다.

파지직-! 쾅!

진혁의 뇌 속에서 수많은 회로가 타들어가는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그것은 수년 동안 그의 목을 조여오던 족쇄,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감옥이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SYSTEM ERROR: CONNECTION LOST.]

[SYSTEM ERROR: PROTOCOL TERMINATED.]

[SYSTEM INFO: 모든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머릿속을 요란하게 채우던 음성들이 단 한 번의 파열음과 함께 뚝 끊어졌다.

시야의 상하좌우를 감싸며 삶의 궤적을 지시하던 푸른빛과 붉은빛의 모든 창들이 유리의 파편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화려하던 HUD의 잔해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한 날것의 세상만이 남았다.

"크흑……!"

모든 자동 보조 시스템이 정지한 순간, 진혁의 육체는 즉각 엄청난 반작용을 마주했다.

나노머신의 강제 치유와 신경 전달 보조 없이 오직 순수한 근육과 뼈, 그리고 마기의 힘만으로 지탱해야 했다.

그동안 누적되었던 미세한 파열과 상처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진혁의 무릎을 꺾었다.

털썩.

진혁의 한쪽 무릎이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사방의 콘크리트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입가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지면을 적셨다.

[이, 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진무극의 잔재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의 아머드 슈트에서 뿜어져 나오던 암흑물질의 파동이 꿀렁이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마스터 코드가 거부당했다. 아니, 거부당한 정도가 아니라 강진혁이라는 존재 자체가 시스템의 연결망에서 완전히 이탈해 버린 것이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뼈가 부서지고 신경이 타들어가 비참하게 으깨질 것이다! 너는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진무극의 광기 어린 고함 속에서, 아머드 슈트의 출력 가속기가 최대치로 회전하며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슈트의 표면이 찢어지며 뿜어져 나온 고열의 플라즈마와 암흑마광파가 하나의 거대한 광주리를 이루어 진혁을 향해 내리꽂혔다.

지구의 중력을 뒤흔드는 듯한 파괴적인 에너지 포격.

그것은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사방의 폭발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시끄럽군.'

머릿속에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차가운 기계음의 부재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적의 출력이 얼마나 되는지, 남은 나노머신의 동기화율이 몇 퍼센트인지, 그런 숫자로 환산된 데이터 따위는 이제 필요 없었다.

바람의 결.

대지의 진동.

저 멀리 무너져 내린 철근 사이로 부딪히는 공기의 흐름.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서 요동치며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순수한 내력(內力)의 궤적.

그 모든 것들이 눈을 감은 진혁의 감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두두두두-!

지면을 울리며 다가오는 플라즈마의 폭풍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고열이 진혁의 어깨와 뺨을 스쳤다.

그 순간.

진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흑안(黑眼)의 깊은 곳에서 태고의 밤하늘보다 더 깊고 진한 마기(魔氣)가 소용돌이쳤다.

'흡원천공(吸元天功).'

시스템이 없다고?

프로토콜이 사라졌다고?

애초에 그것들은 강진혁의 무공을 만들어준 적이 없다. 그저 비대해진 에너지를 담기 위해 임시로 빌려 쓴 낡은 그릇에 불과했을 뿐.

진혁이 상체를 일으키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콰아아앙-!

진무극이 쏘아 올린 암흑마광파와 플라즈마의 홍수가 진혁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고 생각한 순간, 폭풍의 중심부에서 기괴한 공명이 울려 퍼졌다.

휘이익-!

폭발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진혁의 손바닥 안으로 맹렬하게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다고?!]

진무극의 잔재가 경악하여 아머드 슈트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진혁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빛의 흡원천공(吸元天功)은 주변의 모든 물리적 에너지를 무자비하게 빨아들이며 단전의 공인(空印)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단 한 조각의 디지털 연산도 없이.

오직 진혁 자신의 의지와, 천 년간 잠들어 있던 마교의 비전(秘傳) 그 자체로.

진혁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등 뒤로, 밤하늘을 삼킬 듯 거대한 마기(魔氣)의 형상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네가 만든 기술은 여기까지다, 진무극."

진혁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잔인한 미소를 그려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시스템의 푸른빛은 완전히 사라졌으나, 그보다 훨씬 선명하고 절대적인 '진짜 천마'의 시야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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