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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77화목차

제277화 진세린의 결단

신서울 상공을 뒤덮은 차원의 균열에서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가 쏟아져 내리는 동안, 지상의 도시는 거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티타늄 그룹의 마천루, 그 상층부는 진무극과 강진혁의 격돌로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붕괴했다. 그리고 타워의 가장 깊은 곳, 지하 통제실의 거대한 메인 모니터 앞에 선 한 여인의 눈동자가 푸른빛의 경고등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진세린.

티타늄 그룹의 적통 후계자이자, 한때 강진혁의 목을 노리던 냉혹한 특수전 후사대 대장.

아버지였던 진무극이 강진혁의 손에 분자 단위로 소멸한 직후, 그녀의 가슴속에 남은 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오직 차갑게 식어버린 허무와, 진무극이 저지른 광기의 청구서뿐이었다.

"세린 언니! 당장 거기서 나와야 해! 타워 전체의 지하 영맥 코어가 오버클럭되기 시작했어! 진무극 이 미친 영감이 죽으면서 시한폭탄을 심어놨다고!"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윤아영의 목소리는 다급함을 넘어 비명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모니터에 점멸하는 수치를 분석하던 아영의 시스템이 전역 경보를 울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CRITICAL WARNING: 티타늄 타워 프라임 메인 코어, 자폭 프로토콜 강제 가동.]

[트리거 조건: 마스터 유저(진무극)의 생체 신호 소실 직후 300초 경과 시 발동.]

[예상 파급력: 신서울 전역 지하 매설 플라즈마 파이프라인 연쇄폭발. 반경 50킬로미터 초토화.]

"……아버지."

진세린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고, 인정을 갈구했던 기업의 총수라는 자는 애초부터 자식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자신이 실패할 경우, 혹은 자신이 죽을 경우 이 거대한 신서울 전체를 함께 무덤으로 끌고 가겠다는 뒤틀린 소유욕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아영아. 타임 리미트가 얼마나 남았지?"

"120초! 그 안에 메인 포트의 하드웨어 단자를 물리적으로 강제 커트하지 않으면 신서울 전체가 날아가! 하지만 언니 손에 남은 코어 출력으로는 그걸 버텨내지 못해! 당장 탈출해!"

탈출.

그 단어가 진세린의 귓가를 맴돌았다.

잠시 전, 강진혁이 남긴 마기의 잔향 속에서 그녀의 부서진 단전이 기이한 형태로 재개방되었다. 진혁이 진무극을 상대로 자아낸 순수한 무도의 결이 그녀의 신경 회로와 융합하며 일시적인 초인의 힘을 부여해주긴 했으나, 이 거대한 티타늄 타워의 메인 자폭 시스템을 멈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진세린은 천천히 자신의 가슴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이식되어 있던 4세대 생체 코어는 이미 한계 출력을 초과해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이 코어의 남은 수명을 모두 짜내어 하드웨어 단자에 주입한다면, 물리적으로 자폭 회로를 짓누를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는 코어의 완전 파괴이자, 그녀 자신의 심장 마비와 죽음을 의미했다.

"탈출할 곳이 어디 있어."

진세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빌어먹을 도시가 무너지면, 우리가 도망칠 곳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어."

"언니……? 지금 무슨 소리야!"

"아영아. 네 해킹 툴을 내 뉴럴 링크로 다이렉트 연결해."

"안 돼! 미쳤어? 그 짓을 하면 언니의 뇌와 신경계가 과부하로 타버릴 거야!"

"잔말 말고 연결해. 네가 외부에서 방화벽을 뚫고, 내가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회로를 짓누른다. 그거라면…… 이 미친 자폭 코드를 늦출 수 있어."

진세린의 목소리에는 일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진무극이라는 거대한 악의 그늘 아래서 평생을 방황했던 자신. 그 핏줄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자 선택이었다.

[뉴럴 링크 동기화 시작.]

[경고: 사용자 생체 코어 과부하율 95% 돌파.]

[경고: 신경 세포 소실 위험.]

바닥을 진동시키는 저주파 진동음과 함께, 통제실의 강화 유리 너머로 상공의 차원 균열이 내뿜는 붉은빛이 번쩍였다.

진세린은 이를 악물며 메인 통제 콘솔의 철판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목을 타고 은빛 회로 선이 뱀처럼 피어올라 콘솔의 마스터 케이블과 엉겨 붙었다.

동시에, 상공 수천 미터의 허공.

"크아아아악―!"

신서울의 밤하늘을 장악한 우주적 포식자의 거대한 사념체 군단 속에서, 전함 크기의 생체 주력함 한 척이 반으로 쪼개지며 폭발했다.

그 중심에 선 강진혁의 눈에 서린 칠흑빛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쿠구구궁!

하늘을 뒤덮은 붉은 눈동자들 사이로, 상위 사념체가 토해낸 파멸의 광선이 진혁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키고 공간을 왜곡하는 절대의 열기.

하지만 강진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 궤도에, 건방지게 어디를."

진혁의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가운 기계음도, 짐승의 울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만물의 결을 꿰뚫은 자아가 뱉어내는 절대적인 지배자의 선언이었다.

우웅-!

진혁의 오른손에 엉겨 붙은 나노머신들이 격렬한 진동음과 함께 압축되기 시작했다.

진무극이 남긴 암흑물질의 잔여 에너지는 물론, 하방의 신서울 대기 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흡원천공(吸元天功)]으로 강제 역류시켜 정제한다.

단 한 점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순수한 파괴 에너지로 응축된 그것은,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SYSTEM INFO: 사용자 자율 제어 100% 달성.]

[외부 인공지능 보조장치: OFF.]

[오리지널 신공 무기 응고율: 100%.]

찰나의 순간, 진혁의 손에 쥐어진 것은 검이었다.

형태를 가질 수 없는 마기와 초고주파 나노머신, 그리고 천마무상체의 극치를 압축하여 허공에서 직접 응고시킨 칠흑빛의 괴검(怪劍).

[신천마신공 제13식 파천검강 - 참천마멸(斬天魔滅)]

콰아아앙!

진혁이 허공을 박차며 수직으로 솟구쳤다.

그가 휘두른 칠흑빛 검강은 상위 사념체가 발사한 파멸의 광선을 정중앙에서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광선이 사방으로 산란하며 신서울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고, 그 거대한 충격파의 여파가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타격의 여파가 신서울 하층부의 빌딩군을 강타하려던 그 찰나.

지이이잉―!

티타늄 타워 하부 통제실.

진세린의 온몸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이 유니폼을 태우고, 코피와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화벽 안정화 40%…… 60%……!]

[경고: 코어 출력 한계 초과! 자폭 지연 링크 고정 완료!]

"크윽……!"

진세린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은 메인 하드웨어 케이블을 놓지 않았다.

상공에서 쏟아진 충격파가 타워의 잔해를 흔들었지만, 자폭 코드가 지연되면서 신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가야 할 연쇄폭발의 연쇄고리가 끊어졌다. 대참사는 막아냈다.

"해냈어…… 언니!"

윤아영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하지만 진세린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야가 하얗게 바래져 갔고, 가슴속에 박힌 생체 코어의 푸른빛이 완전히 꺼져갔기 때문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진세린의 뇌리에 귓가를 때리는 거대한 검강의 폭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 위에서, 강진혁이 차원의 균열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강진혁…….'

그녀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 썩어빠진 세계의 끝에서, 저 남자는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그리고 통제실의 어둠 속에서, 진세린의 의식이 서서히 침전해 갔다.

상공 수만 미터.

차원의 균열 바로 앞.

강진혁의 검끝이 우주적 포식자 본대의 중심, 가장 거대한 붉은 눈동자를 겨누었다.

지상에서 피어오른 단 한 명의 결단이 자신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음을 느낀 것일까.

진혁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끝을 내주마."

마광신보를 다시 한번 발동한 진혁의 몸이 공간을 접어두듯 사라지며, 차원의 균열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아아아궁―!

신서울의 밤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섬광과 함께, 진정한 최후의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쿠구구구궁―!

차원의 균열 내부로 빨려 들어간 강진혁의 시야를 채운 것은 현세의 물리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빛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거대한 사념과 뒤틀린 중력의 파동만이 소용돌이치는 우주적 포식자의 본거지. 그 한가운데서 행성 만한 크기의 상위 사념체가 수만 개의 붉은 눈동자를 일제히 번뜩였다.

-……인간. 멸망의 찌꺼기 주제에.

음성 기관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뇌리에 내리꽂히는 기괴한 정신파가 진혁의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수천 톤에 달하는 중력 압력이 진혁의 전신을 사방에서 짓눌렀다.

우드득―!

천마무상체의 극치로 단련된 근골과 티타늄-탄소 분자 결합체조차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핏줄이 터져 나오며 전신이 피로 물들었지만, 진혁은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시끄럽다."

진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호한 한마디가 중력의 파동을 정면으로 찢어발겼다.

우웅-!

진혁의 단전 깊은 곳에서 태풍처럼 회전하던 내공과 마기가 폭발적으로 역류했다.

[흡원천공(吸元天功)]의 진가가 비로소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상위 사념체의 중력 에너지와 붉은빛의 사념 파동을 진혁이 역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키기긱……! 흡수라고……? 이 차원의 에너지를?

상위 사념체의 수만 개의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인간의 몸 따위에 흡수될 리 없는 우주적 포식자의 권능이, 지금 한 명의 무인에 의해 억지로 정제되어 단전으로 쑤셔 박히고 있었다.

진혁의 혈관이 터져 나가며 검붉은 피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매섭게 빛났다.

육체의 한계가 도달할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는 마신경(魔神境)의 경지.

"네놈들이 이 세상에 싼 똥이다. 고스란히 돌려주마."

진혁이 오른손에 쥔 칠흑빛의 괴검, [신천마신공 제13식 파천검강 - 참천마멸(斬天魔滅)]에 모든 에너지를 일극(一極)으로 집중시켰다.

흡수한 우주적 에너지와 자신의 마기가 결합하여 생성된 검강은 단순한 물리적 참격을 넘어섰다. 그것은 공간의 결합을 끊어내고, 사념 자체를 소멸시키는 절대의 파괴력 그 자체였다.

콰아아앙!

진혁이 허공을 박차며 상위 사념체의 정중앙을 향해 수직으로 쇄도했다.

-방해된다, 감히―!

사념체가 분노를 토해내며 수만 개의 촉수를 뻗어 진혁을 꿰뚫으려 했다.

하지만 진혁의 보법은 사념체의 반응보다 빨랐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초음속 궤적이 암흑의 공간 속에서 수십 갈래의 잔상을 그려냈다.

촉수들이 진혁의 잔상만을 꿰뚫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사이, 진혁의 본신은 이미 상위 사념체의 가장 거대한 중심부, 그 심장부에 해당하는 핵(Core) 앞에 도달해 있었다.

"죽어라."

검이 떨어졌다.

칠흑빛 뇌전과 마강이 결합된 참천마멸의 검강이 상위 사념체의 핵을 정중앙에서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기괴한 비명조차 터져 나올 새가 없었다.

핵이 분자 단위로 붕괴하며 사방으로 흩어지자, 행성 만한 크기를 자랑하던 상위 사념체의 거대한 형체는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연쇄적인 대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궁―!

차원의 균열 내부가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한편, 지상.

신서울의 상공.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를 이끌던 상위 사념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붉은색 차원의 균열이 비명을 지르며 닫히기 시작했다.

콰광! 쿠릉!

하늘에서 쏟아지던 포격과 사념파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지하 통제실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윤아영과 니르바나의 정예들, 그리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진세린까지 모두 고개를 들어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붕괴하는 차원의 균열 틈새로, 한 명의 형체가 낙하하고 있었다.

칠흑빛으로 물든 옷자락은 너덜너덜해졌고, 전신은 피투성이였지만…… 그 누구도 그를 패배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강진혁.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었고, 창조주의 그늘을 벗어났으며, 마침내 이 세계를 삼키려던 우주적 포식자의 본대를 단신으로 궤멸시켰다.

쾅!

진혁의 발이 신서울의 무너진 티타늄 타워 최정상 헬리패드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닫히던 차원의 균열이 완전히 소멸하며 신서울의 밤하늘 위로 거짓말처럼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휴우-.

진혁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단전에서 요동치던 폭발적인 기운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혈관 속을 흐르던 나노머신들이 파괴된 세포를 순식간에 재구성하며 상처를 아물게 했다.

"……끝났어."

지상에서 통신기를 통해 들려온 윤아영의 멍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이 묻어 있었다.

강진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티타늄 그룹의 독재는 무너졌고, 차원의 침공은 저지되었다.

시스템이 정해놓은 운명의 프로토콜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기계의 부품이 되고, 자본이 무력이 되던 디스토피아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부터 이 세상의 룰을 정하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천마(天魔)'에 도달한 한 명의 무인, 강진혁 그 자신일지니.

진혁이 검을 거두며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새로운 시대의 새벽이, 피로 물든 신서울의 잔해 위로 조용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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