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독고운의 마지막 당부
지하 300미터, 티타늄 그룹이 숨겨둔 거대한 마혈(魔穴)의 최심부.
콰아아앙-!
공간을 찢는 마광(魔光)의 여파가 가라앉고 나자, 그곳에는 기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무극이 남긴 야욕의 흔적인 흑요석 석탑은 이미 분자 단위로 가스화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사방의 암벽에 늘어선 낡은 배양 캡슐의 잔해와, 그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화강암 천마 석상뿐이었다.
후우- 웅-.
사방에서 흩어지는 칠흑빛 마기의 잔향 속에서 강진혁이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스템의 알림음도, 푸른빛의 HUD 인터페이스도 더 이상 그의 시야를 어지럽히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광경을 직시하는 자신의 두 눈과, 단전에서 우직하게 울리는 심장 고동 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석상의 거대한 발치 아래서 노쇠하지만 단단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박, 타박.
기계 개조를 거부한 낡은 도포 자락이 마기의 바람에 가볍게 휘날렸다. 구무림 연맹의 마지막 전승자이자 은거 고수인 독고운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을 이끌고 이 지하의 지옥까지 내려와 있었다. 송수연과 윤아영, 그리고 진혁의 마기 장향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며 새로운 단전을 열어가고 있는 진세린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독고운은 멈춰 서서,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천장 위, 신서울 상공의 찢어진 차원 틈새 너머에서 쏟아지는 붉은 사념의 파동이 이 지하까지 미세하게 진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노인의 흐리멍덩하지만 깊고 맑은 눈동자가 거대한 천마 석상의 얼굴에 닿았다. 1,000년 전의 기록과 티타늄 그룹의 유전공학적 데이터가 빚어낸, 절대자의 형상.
독고운이 툭 내뱉듯 입을 열었다.
"기괴하단 말이야. 현대의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괴물들의 사원이라기엔, 이 석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내음이 너무도 오래되었어."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차갑게 가라앉은 흑안으로 노인을 주시할 뿐이었다.
독고운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천마 석상의 거친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서늘한 화강암의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강진혁. 네가 짊어진 그 업보의 무게를 아느냐? 녀석들은 네가 이 천마의 핏줄을 98.4%나 이어받은 완벽한 '그릇'이라더구나. 티타늄 그룹이 수백 년간 갈고닦아 마침내 완성해 낸 최고의 제물.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힘은 결국 이 석상의 주인이 원하던 부활의 도가니로 빨려 들어갈 셈이었지."
"……."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 순간, 그 잘난 시스템의 눈알들은 전부 꺼져버렸지?"
독고운이 고개를 돌려 진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에는 경외와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너는 시스템이 짜놓은 궤적을 걷지 않았다. 녀석들이 건네준 공식대로 힘을 흡수하고 팽창하면서도, 그 기저에 깔린 이치—즉, 마공(魔功)의 본질을 네 손으로 직접 씹어 삼켰지."
"핏줄이나 기술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진혁의 입술이 열렸다. 낮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하의 공기를 울렸다.
"남이 짜놓은 회로 위를 달리는 쥐새끼로 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 바로 그 소리다."
독고운이 껄껄 웃으며 허리를 폈다.
"세상 사람들은 무림의 명문정파니, 티타늄 그룹의 초인 세력이니 하며 껍데기에 연연하지. 핏줄이 어쩌고, 유전자의 순도가 저쩌고. 허나 무(武)의 극에 달한 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
"천지간에 절대적인 핏줄이란 없다. 오직 스스로 통찰한 심(心)의 경지만이 존재할 뿐이지."
독고운은 천마 석상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이 석상의 주인인 옛 천마 또한 그러했을 터이다. 그 역시 누구의 피를 물려받아 그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야. 세상의 모순과 자신의 한계를 온몸으로 으깨며, 스스로의 기혈을 쥐어짜 그만의 진리를 완성했겠지. 허나 후대 놈들은 그 결과물인 '기술'과 '핏줄'만을 숭배하다가 자멸했다."
노인의 목소리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눈빛이 진혁의 심장을 꿰뚫듯 날카로워졌다.
"진무극이 네게 남긴 유산, 그리고 네 몸뚱어리에 새겨진 고대 천마의 유전자. 그것은 네가 강해지기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네 영혼을 구속하는 족쇄였다. 녀석들은 네가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니라, 시스템이 계산해 준 궤도 위에서 춤을 춘 것뿐이라 착각하게 만들었지."
진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오랜 의문이, 노인의 말 한마디로 완벽한 아귀를 찾아맞춰지는 과정에서 오는 전율이었다.
시스템 AI가 소멸하고, HUD 창이 완전히 꺼진 순간부터 진혁의 몸속에서는 이상한 이질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노머신은 멈춰 섰고, 생체 코어는 오직 자신의 의지력에만 반응하여 출력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단절이자, 동시에 완벽한 해방이었다.
독고운이 진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엄숙하게 말했다.
"잘 들거라, 강진혁. 핏줄이라는 허상에 얽매이지 마라. 네가 쓰는 그 마공은 옛 천마의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대기의 흐름과 너의 심장 박동을 일치시키는 너 자신의 호흡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호흡에서."
"그렇다. 세상을 굽어보는 독자적인 무도의 심(心).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비로소 너는 껍데기뿐인 실험체 07호가 아니라…… 참된 의미의 '천마'로 거듭날 것이다."
쿵. 쿵. 쿵.
독고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진혁의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생체 코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기계적인 출력의 상승이 아니었다. 코어를 감싸고 돌던 칠흑빛 마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세포 하나하나와 완벽한 동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진혁의 몸 주변에서 압도적인 마기의 폭풍이 피어올랐다.
지하의 공기가 사방으로 밀려나가며 석상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그의 등 뒤로 일그러진 공간의 결이 눈에 보일 듯 말듯 어른거렸다.
진세린은 그 압박감에 호흡이 멎는 것을 느끼며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단전을 새로 개방하던 그녀의 몸 안에서, 진혁의 마기 잔향이 폭풍처럼 요동치며 새로운 혈맥을 억지로 뚫어내고 있었다.
"크윽……!"
"세린! 정신 차려!"
송수연이 급히 진세린의 어깨를 붙잡고 마기의 여파를 막아섰다.
윤아영 역시 품에 안고 있던 단말기를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더 이상 아무런 데이터도 뜨지 않았다. 시스템이 완전히 증발한 화면은 순수한 암흑뿐이었으나, 그녀의 직관은 알고 있었다.
지금 진혁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연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진혁은 눈을 감았다.
혈관 속을 흐르는 나노머신의 회로, 심장의 박동, 대기를 떠도는 마기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지상 위에서 쏟아지는 우주적 포식자들의 사념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악보처럼 그의 직관 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더 이상 시스템의 보조 연산은 필요 없었다.
적합도 검사도, 오류 경고도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있었다.
〈시스템 잔재 제거 완료.〉
〈자체 연산 영역: 100% 도달.〉
누가 만들어낸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선언이었다.
진혁이 서서히 눈을 번뜩였다.
그의 흑안 깊은 곳에서 푸른빛 대신,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순수한 칠흑빛 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공간의 중력이 그의 발밑으로 굴복하듯 일그러졌다.
"고맙군, 노영감."
진혁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독고운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쓴웃음과 함께 가벼운 경례를 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내 늙은 목숨이 네 녀석의 마지막 짐을 덜어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 가거라. 저 위에서 네 몫의 태양이 기다리고 있다."
말을 마친 독고운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진세린과 송수연을 이끌고 지하의 안전지대로 물러났다.
쾅-!
홀로 남은 진혁의 발밑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의.
시스템의 궤적 계산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눈으로 보지 않아도 만물의 결을 꿰뚫는 마신경(魔神境)의 직관만으로, 진혁은 지하 300미터의 단단한 암반을 그대로 박차고 위를 향해 수직으로 사출되었다.
지하의 천장이 사방으로 박살 나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콰아아앙-!
지상으로 솟구치는 진혁의 등 뒤로, 칠흑빛 마기가 거대한 검강의 형태로 폭발하며 신서울의 밤하늘을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상공의 차원 틈새 너머, 지구를 집어삼키기 위해 강림하고 있는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가 그 거대한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진혁을 내려다보았다.
진혁은 그 공포스러운 사념의 압박 속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쥔 검에서,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순수한 자력(自力)의 파천검강이 태양보다 맹렬한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차원 틈새의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수축했다.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 행성을 몇 개나 집어삼켰을 무수한 사념의 집합체가 오직 한 인간을 향해 포커스를 맞추었다.
기계의 연산도, 시스템의 예측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어떤 최첨단 포격 조준 시스템보다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공포를 발산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신서울 상공의 대기권이 뒤틀렸다.
시뻘건 오라를 뿜어내는 거대한 함선들의 표면에서 수만 개의 중력 포탄이 일제히 점화되었다. 지구 전체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 수 있는 압도적인 에너지 반응.
그것은 3만 MW의 오리진 수트 출력을 가볍게 상회하는, 차원적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강진혁의 눈빛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라."
나직하게 읊조린 단 한마디.
그것은 도전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절대자의 언령이었다.
슈우우우욱-!
진혁의 몸을 감싸고 있던 칠흑빛 마기가 맹렬하게 역류했다.
단전의 생체 코어가 폭발적인 출력을 뿜어내자, 혈관을 흐르던 나노머신이 마기와 완전히 융합되어 피부 위로 거무스름한 신비의 갑주를 형성했다.
제2능.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시스템이 강제하던 제어가 사라진 지금, 그 육체의 한계는 오직 진혁 자신의 의지 그 자체였다.
적들의 포격이 도달하기 직전, 진혁의 오른손에 쥔 검에서 뿜어져 나온 파천검강이 공간을 향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파아아앗-!
만상귀일(萬象歸一).
대기 중의 기류와 우주적 포식자들이 뿜어낸 사념의 파동까지,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일점에 강제로 포집되었다.
적들이 쏜 중력 포탄의 궤적이 진혁의 검끝으로 빨려 들어가듯 휘어지기 시작했다.
쿠광구궁-!
흡원천공(吸元天功).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대신, 진혁은 그 막대한 파괴력을 통째로 흡수해 자신의 단전 속으로 쑤셔 박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작열하는 고통. 세포가 비명을 지르고, 뼈와 살이 짓눌리는 극한의 과부하.
그러나 진혁은 눈을 부릅뜬 채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억지로 짓눌러 정제해 냈다.
타다닥, 두두둑-!
핏줄이 터져 피가 튀었지만, 천마무상체의 경지에 오른 육체는 그 상처를 즉시 메우며 더욱 단단한 강도로 재구성되었다.
"가소롭군."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흡수한 적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압축해 재가공한 칠흑빛의 검광이, 태양처럼 눈부신 흑색의 태도(太刀)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의 기술도 아니었다.
시스템도, 티타늄 그룹도, 1,000년 전의 천마조차 가르쳐준 적 없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강진혁이 스스로 창조해 낸 진정한 독자적 절기.
신천마신공 제13식 개량형.
[참천마멸(斬天魔滅)].
휘익-!
진혁이 허공을 박차며 상공의 함선 무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사출되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대기의 밀도가 완전히 붕괴하며 거대한 진공의 궤적이 생겨났다.
콰아아앙-!
우주적 포식자들의 기함 전면 배리어가 진혁의 검끝과 부딪쳤다.
단 0.1초의 정적.
이어, 행성을 가르는 듯한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기함의 중앙 장갑이 종잇장처럼 박살 났다.
내부의 회로와 에너지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수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철갑선이 신서울의 밤하늘 위에서 두 쪽으로 갈라져 거대한 불덩어리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타워의 잔해 아래서 그 광경을 올려다보던 윤아영이 숨을 멈췄다.
진세린과 송수연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허공을 우러러보았다.
화려한 인터페이스도, 시스템의 보조도 없었다.
오직 한 남자의 검끝이 밤하늘의 주인을 베어가고 있었다.
신천마(新天魔)의 시대가, 진정으로 그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