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혈맥의 진실
콰아아앙-!
지하 300미터 마혈 최심부.
천장을 뚫고 솟구친 칠흑빛 검강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우주적 포식자의 파편이 깃들어 있던 거대한 사념체는 강진혁의 일격에 분자 단위로 찢겨 나가며 악취를 풍기며 소멸했다.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걷혀 나갔다.
하지만 전투의 여운은 곧바로 무거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후우……."
강진혁의 입술 사이로 옅은 백색의 증기가 흘러나왔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단전에서 우러나온 마기(魔氣)와 혈기로 전신을 구동한 반동이다.
나노머신의 자동 수복 기능에 기대지 않고, 오직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2능인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자가 회복력만으로 근육과 뼈를 재조립했다.
지끈거리던 두개골의 통증이 가라앉고, 진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서서히 정면을 향했다.
거대한 사념체가 소멸한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낡은 데이터 터미널 하나였다.
티타늄 그룹의 메인 서버와 단절된 채, 지하 최심부의 독립 전력으로만 구동되던 기밀 저장고.
그 스크린 위에서 은은한 푸른빛의 홀로그램이 깜빡이고 있었다.
[ACCESS DENIED]
[마스터 키 인식 완료: 사용자 ID - 07]
"……."
진혁의 발걸음이 터미널을 향해 다가갔다.
뒤쪽 잔해 부근에서 숨을 몰아쉬던 윤아영과 진세린, 그리고 송수연이 그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윤아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진혁 씨! 거기 데이터, 뭔가 이상해요. 메인 네트워크랑 완전히 격리된 물리 저장소예요. 일반적인 기업 기밀이 아니야."
"알고 있어."
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는 손을 뻗어 터미널의 메인 하드웨어 포트에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나노머신과 결합된 신경 회로를 물리적으로 접속시키는 행위.
시스템 AI '설화'는 이미 소멸했기에 데이터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 진혁의 뇌리에 흘러들어 왔다.
지이익-!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시야를 강타했다.
[생체 실험체 07호 기밀 파일]
[대상: 강진혁]
[분류: 혈통 유전자 매칭 및 동기화 테스트]
홀로그램 스크린이 파르르 떨리며 텍스트와 유전자 서열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진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고아 출신 실험체로 알고 있었다.
티타늄 그룹이 신서울 하층 슬럼가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둬들여 생체 코어의 내구도를 실험하던 수많은 소모품 중 하나.
자신 역시 그 지옥 같은 폐기장 중 한 곳에서 굴러먹다 마침내 '천마 프로토콜'을 손에 쥐게 된 줄 알았다.
그러나 데이터의 깊숙한 곳, 진무극이 직접 승인하고 봉인했던 극비 문서의 암호가 해제되면서 진실의 실오라기가 드러났다.
[유전자 일치율 검사 결과]
[샘플 A: 1,000년 전 마교 유골 (천마 본인)]
[샘플 B: 실험체 07호 (강진혁)]
[동기화율: 98.4%]
[결론: 직계 방계 혈족의 최종 멜팅 포인터]
"……하."
진혁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아였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부모의 얼굴은 물론이고,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밑바닥 슬럼가의 부랑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선택'당해 은폐된 것이었다.
[기록 01 - 진무극의 수 일지 중에서]
> "천마의 유골에서 추출한 유전자는 완벽하나, 현대의 인공 개조체와 코어로는 그릇을 채울 수 없다. 기계는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육체는 스스로 붕괴한다.
> 유일한 해결책은 천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생체 유전자 서열을 가진 인간, 그중에서도 극한의 스트레스 환경에서 각성한 '그릇'뿐이다."
"내 몸은 처음부터 그 노인네가 설계한 림보(Limbo)였단 소리군."
진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진무극은 우연히 폐기장에서 자신을 주운 것이 아니었다.
티타늄 그룹의 정보망이 하층 슬럼가 구석구석을 뒤져, 1,000년 전 마교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전자 파편을 가진 아이를 찾아내 일부러 실험체로 던져 넣었던 것이다.
고통과 절망,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생체 실험.
그 모든 과정은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천마의 유전자를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한 거대한 사육 과정에 불과했다.
"진혁 씨…… 이거……."
뒤에서 다가온 윤아영이 홀로그램에 떠오른 가계도와 유전자 대조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이…… 천마의 핏줄이라고? 그냥 융합 실험의 성공작이 아니라…… 진짜 그 옛날 괴물의 후손이었다고?"
"핏줄?"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터미널의 하드웨어를 서서히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핏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혁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천마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도달했다고?
진무극이 자신을 그렇게 설계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신천마'가 될 수 있었다고?
만약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면, 진혁은 진무극이 파놓은 거대한 무덤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진무극이 죽는 그 순간까지 외쳤던 말.
“네 힘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너는 내가 만든 잔에 불과하다!”
그 저주 같은 말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진혁은 알고 있었다.
진무극이 준 것은 유전자 조각과 실험 데이터, 그리고 낡아빠진 시스템의 껍데기뿐이었다.
그 껍데기 속에서 절망을 씹어 삼키며 뼈를 깎고 단전을 부수어가며 '마신경'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누구인가.
기계가 계산하지 못하는 무도의 본질을 깨닫고, 스스로의 의지로 혈맥을 뚫어 '신천마신공'을 완성한 것은 누구인가.
핏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천마의 피가 흐른다 한들, 그것은 단지 육신을 이루는 수많은 재료 중 하나에 불과했다.
"노인네가 착각한 게 있지."
진혁이 터미널을 향해 가볍게 손을 쥐었다.
콰아아아-!
순간, 칠흑빛 마기가 폭발하며 터미널 전체가 먼지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데이터의 잔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 따위, 진혁의 눈앞에서는 이미 태울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으니까.
"그 자는 내가 '천마의 그릇'이 되길 원했지."
진혁이 고개를 돌려 지상으로 이어지는 무너진 통로를 올려다보았다.
신서울 상공.
진무극이 죽으면서 완전히 찢어진 차원의 틈새 너머로, 지구를 집어삼키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우주적 포식자들의 붉은 눈동자 수천 개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상 방어선에서는 송수연의 저항군 '니르바나'와 남은 생존자들이 사태를 수습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진세린이 비틀거리며 진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단전 부근에서 진혁이 남겨준 마기의 잔향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강진혁. 위쪽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차원 침공군의 선봉이 내려오고 있어."
"그래."
진혁은 허리춤에 차인 칠흑빛 검병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시스템의 보조 HUD도, 기업의 데이터도, 1,000년 전 혈통의 잔재도 이제는 없다.
오직 자신만이 남았다.
"핏줄이든, 시스템이든, 우주에서 기어들어온 괴물이든 상관없다."
진혁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흉포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걷는 길이 곧 천마의 길이고, 내가 휘두르는 검이 곧 천마의 법이다."
파지지직-!
진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대기를 찢으며 허공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마광신보(魔光神步)]
쾅-!
발밑의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분쇄되며, 진혁의 형체가 음속을 몇 배나 뛰어넘는 극초음속으로 지하 300미터의 어둠을 뚫고 지상으로 수직 상승했다.
차원의 벽을 부수고 내려오는 우주적 포식자들을 향해, 진정한 '신천마'가 최후의 전장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신서울의 밤하늘을 가르는 극심한 폭음과 함께, 지상 수천 킬로미터 상공의 찢어진 차원 틈새에서 거대한 섬광이 쏟아져 내렸다.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
그 선봉에 선 수만 기의 기괴한 비행 생명체와 거대 함선들은 마치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집어삼키겠다는 듯 붉은 안개를 토해내며 대기권을 강타하고 있었다.
"방어선 일제히 사격 개시-!"
지상에서 저항군 '니르바나'의 총수 송수연이 개조된 대공 포탑을 붙잡고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지휘 아래, 티타늄 그룹의 잔여 방어 시설과 니르바나의 화력이 일제히 상공을 향해 불을 뿜었다.
투둥둥둥-!
플라즈마 포화와 대공 미사일이 밤하늘을 수놓았지만, 차원 침공군이 두른 중력 장막 앞에서는 그저 눈 내리는 것처럼 무력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
인류의 기술력으로는 그 거대한 존재들의 발끝조차 닿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전장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콰구구구궁!
지하 300미터의 마혈 최심부, 그 무너진 잔해 속에서 칠흑 같은 한 줄기의 섬광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폭음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지상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쏠렸다.
"저건……!"
윤아영이 눈을 부릅뜨며 홀로그램 스캐너를 두드렸다.
하지만 스캐너의 액정은 이미 적의 강력한 전자기파와 마기의 잔류 파동으로 인해 하얗게 타버린 지 오래였다.
기계의 눈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두 눈으로만 담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감.
그것은 강진혁이었다.
신경 회로를 보조하던 시스템 HUD도, 몸속을 지탱하던 나노머신의 자동 연산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과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마기(魔氣)만으로 대기를 딛고 선 채, 진혁은 허공 한복판에 멈춰 섰다.
파지지직- 콰르릉!
진혁의 주변을 감싼 칠흑빛 뇌전이 공간의 결을 따라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마신경(魔神境)의 정점에 도달한 자만이 볼 수 있는 '만물의 결'이 진혁의 망막에 선명하게 박혀 들어왔다.
우주적 포식자들의 함선이 뿜어내는 중력 파동의 흐름, 차원 틈새의 미세한 균열점, 그리고 이 세계의 물리 법칙이 꺾이는 지점까지.
그 모든 것이 진혁의 직관 속에서 하나의 정교한 수식처럼 낱낱이 파악되었다.
[진무극이 남긴 유산 따위는 필요 없다.]
[천마의 핏줄이라는 굴레 역시 내가 정의하는 바가 아니다.]
진혁의 입가에 옅고도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직 힘만이 진실이다."
나지막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대기 중의 마기를 타고 전장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때렸다.
진혁이 오른손에 쥔 검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수억 톤의 마기와 지상의 잔해에서 피어오른 투지가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진혁의 검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원천공(吸元天功).
적의 에너지를 빼앗는 데만 국한되었던 이 고대 마공은 이제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기운마저 강제로 굴복시켜 자신의 단전에 채우는 절대의 '만상귀일(萬象歸一)'로 승화되어 있었다.
콰아아앙-!
진혁의 단전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 안에서 요동치던 내력과 마기와 생체 코어의 잔류 에너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13식.
[파천검강(破天劍罡)]
더 이상 시스템의 연산 보조나 완벽한 각도를 계산하는 AI의 가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강진혁 자신의 육체 감각과, 뼛속까지 새겨진 무도의 본질만이 검끝을 지배했다.
쉭-
진혁이 허공을 박차며 차원 침공군의 최전방 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의.
빛보다 빠르게 공간을 도약한 진혁의 형체가 거대한 우주모함의 정중앙에 그대로 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방!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수만 톤에 달하는 우주적 포식자의 기함이 종이장처럼 무력하게 반으로 쪼개졌다.
분자 단위로 쪼개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밤하늘을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수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끝내주마."
진혁의 검광이 멈추지 않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압박해 오던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대는, 단 한 명의 인간이 휘두르는 칠흑빛 검강 앞에서 차례대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그 장관을 지켜보던 송수연과 윤아영, 그리고 진세린은 넋을 놓은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계의 시대가 저물고, 자본과 기업이 지배하던 디스토피아의 밤하늘 아래.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천마'의 경지에 도달한 한 인간의 검이, 새로운 세계의 서막을 열어젖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