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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63화목차

제263화 지상으로 향하는 길

"커헉……!"

티타늄 타워의 최상층.

지붕이 반쪽으로 날아가 버린 거대한 집무실 안에서 진세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가슴께에서는 여전히 옅은 흑황색의 잔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강진혁이 남긴 마기(魔氣)의 잔향이었다.

진무극이 버리고 도망친 코어의 파편과 죽음의 문턱에서 새롭게 개방된 단전(丹田)의 기운이 충돌하며, 그녀의 혈관 속으로 뜨거운 불길이 휘몰아쳤다.

"세린 대장, 괜찮아?!"

타워의 비상 계단과 붕괴된 외벽을 타고 올라온 송수연이 도검을 바닥에 꽂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너머로는 반(反)기업 저항군 ‘니르바나’의 정예 대원들과, 외벽에 중장갑 버스를 박아 넣은 윤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윤아영은 타워 중층의 방어 AI와 자동 포탑들을 완벽하게 셧다운 시키며 뚫어낸 진격을 완료한 참이었다.

"흡……,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지만…… 살아 있어."

진세린이 간신히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계의 절대권력자이자, 그녀의 아버지였던 진무극이 남긴 것은 분자 단위로 흩어진 핏자국과 녹아내린 5세대 프라임 코어의 잔해뿐이었다.

그리고 그 파괴의 중심에 강진혁이 서 있었다.

슈우우-!

진혁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칠흑빛 뇌전과 마강(魔罡)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스템의 HUD와 인공지능 '설화'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직관만으로 이뤄낸 [마신경(魔神境)]의 경지.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서는 우주적 포식자들의 붉은 눈동자보다 더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강진혁!"

윤아영이 소형 터미널 패드를 품에 안은 채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핑크빛 숏컷 헤어는 파괴된 타워의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극심한 공포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영이네. 위쪽은 정리됐나."

"정리랄 것도 없어! 타워 중층의 블랙 가드들은 우리가 진입하기도 전에 스스로 코어를 오버클럭하다가 자멸해 버렸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윤아영이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패드를 내밀었다.

패드의 홀로그램 화면 위에는 신서울 전역의 지도가 붉은 경보음과 함께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진무극 이 미친 영감이…… 죽기 직전에 지하 최심부의 프로토콜을 가동했어. 아니, 가동된 거야."

"지하 최심부?"

"그래. 티타늄 그룹 본사 지하 300미터 아래, 공식 문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구역. 1,000년 전 고대 마교의 본단 터 위에 지어진 극비 시설…… [게헨나(Gehenna)]야."

송수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교의 본단? 거긴 전설 속의 유적 아니었어? 티타늄 그룹이 그걸 발견해서 지하에 처박아 뒀다고?"

"발견한 정도가 아니야. 진무극 그 인간은 평생토록 그 고대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마공의 잔해와 천마의 데이터를 추출해 이 타워를 세웠던 거야. 문제는…… 진무극이 죽으면서 심어 둔 [데드맨 스위치(Dead Man's Switch)]가 작동했다는 점이야."

윤아영이 패드를 조작하자, 화면 속 신서울 지하의 12개 거대 요충지에서 거대한 붉은 기둥이 솟구쳐 오르는 시뮬레이션이 재생되었다.

[SYSTEM ALERT: 지하 최심부 에너지 출력 급상승]

[출력 한계치 돌파: 100,000 MW…… 150,000 MW……!]

[경고: 고대 마교의 봉인진과 5세대 암흑물질 코어가 공진을 시작합니다.]

"저게 뭐야?"

진세린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윤아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진무극은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자신이 죽는 순간, 지하에 봉인해 둔 고대 마교의 원시 마핵(魔核)과 티타늄 그룹의 전력망을 강제로 쇼트시키도록 설정해 둔 거야. 그 에너지가 신서울 상공의 찢어진 차원 틈새를 향해 거대한 '초공간 송신기' 역할을 하게 돼."

"……!"

"저딴 에너지가 하늘로 쏘아 올려지면, 지금 저 차원 틈새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주적 포식자'들의 본함(本艦)이 이 지구로 강림하는 건 시간문제야. 그야말로 이 세계의 종말이지."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진무극을 쓰러뜨렸다는 해방감과 승리의 카타르시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구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더 거대한 재앙의 아가리가 지상 아래서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송수연이 도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외쳤다.

"그럼 당장 그 지하로 내려가서 그 기계를 부숴야 하는 거 아니야?!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시뮬레이션상으로는…… 앞으로 30분이야. 그 안에 지하 300미터의 게헨나 최심부로 내려가 코어를 강제로 파괴하거나 정지시키지 않으면, 신서울 전체가 공중분해되면서 차원의 문이 완전히 열려."

윤아영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강진혁.

그는 아무 말 없이 창가에 서서 타워 아래의 부서진 시가지와, 그 위를 덮치듯 소용돌이치는 핏빛 차원의 균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흩날렸고, 목과 손목을 따라 흐르던 은빛 회로의 잔재는 이제 완전히 칠흑 같은 마기로 뒤덮여 있었다.

시스템의 도움 따윈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천마 프로토콜의 HUD가 꺼진 지 오래였지만, 진혁의 감각은 오히려 그 전보다 수배, 수천 배 더 선명하게 세계의 이면을 꿰뚫고 있었다.

지하 300미터에서 꿈틀거리는 1,000년 전 마교의 저주 어린 마기(魔氣).

그리고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미지의 사념체들.

진혁이 입술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서진 타워 안을 울렸다.

"기계 따위에 의존해 세상을 지배하려던 늙은이의 마지막 발악이군."

"진혁 씨, 어떻게 할 거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와 메인 샤프트는 진무극이 죽으면서 전부 자폭시켰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30분 안에 그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없어!"

윤아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진혁은 천천히 허리춤에 차인 검을 내려다보았다.

파천검강(破天劍罡)의 여운이 여전히 날끝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갈 필요는 없다."

"……뭐?"

"밑에서 기어올라 온다면, 우리가 직접 뚫고 내려가면 그만이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타워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무극이 추락했던 그 거대한 대공동(大空洞),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짙고 탁한 1,000년 전의 마기(魔氣)가 진혁의 피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진세린이 자신의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누르며 말했다.

"강진혁, 나도 같이 가겠어. 내 아버지의 자식이자, 이 타워의 후계자였던 내가 알던 비밀 통로가 하나 있어. 지상에서 게헨나로 바로 이어지는 비상 보급로야."

"비상 보급로?"

"그래.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시스템으로는 열 수 없지만…… 네가 가진 그 마기라면, 그 문을 강제로 찢어발길 수 있을 거야."

진혁은 잠시 진세린을 바라보다가 곧게 선 그녀의 눈동자에서 비장함을 읽어냈다.

그녀 역시 부모의 그늘과 티타늄 그룹이라는 거대한 악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좋다."

진혁이 단 한 마디를 내뱉고는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콰아아앙-!

[마광신보(魔光神步)]!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극초음속의 보법이 타워의 잔해를 폭발시켰다.

진혁의 잔상이 남은 자리에 거대한 진공 펄스가 치솟았고, 그는 이미 타워의 최상층에서 단숨에 중층의 바닥을 관통하며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따라간다!"

송수연이 도검을 뽑아 들고 진세린과 함께 그 뒤를 쫓았다.

윤아영 역시 특수 단말기를 품에 안고 니르바나의 정예들과 함께 그들의 뒤를 엄폐하며 비상 계단으로 질주했다.

지하 300미터.

티타늄 그룹의 가장 어두운 비밀이자, 1,000년 전 마교의 유적이 잠들어 있는 지옥의 문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SYSTEM INFO: 경고. 미지의 생체 반응 및 고대 마기 농도 임계점 초과.]

[사용자 자율 제어 영역 진입.]

두뇌 속에서 더 이상 기계적인 AI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진혁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 그리고 단전에서 요동치는 [신천마신공]의 포효뿐이었다.

"오너라, 진무극이 남긴 유적이든 천 년 전의 망령이든."

진혁이 허공에서 검을 내리치며 마기를 폭발시켰다.

콰구구구구궁-!

신서울의 대지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반으로 갈라지며, 지하 최심부로 향하는 길목이 완전히 열렸다.

콰구구구구궁-!

대지를 찢어발긴 것은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었다.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 이른 강진혁의 의지, 그 자체였다.

순수한 마기와 천마무상체의 탄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낙하 충격은 티타늄 타워의 기초 콘크리트와 수백 톤에 달하는 방위용 합금 장갑을 순두부처럼 가르며 지하로 내리꽂혔다.

"커헉……!"

진세린은 진혁이 만들어낸 마기(魔氣)의 방패 안쪽에 밀착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음속의 속도로 수직 낙하하는 동안, 온몸의 살과 뼈가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극심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만약 그녀가 방금 전 단전을 개방해 진혁의 잔향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이 초고속 하강의 기압 차만으로도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었을 터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제부터 진짜다."

진혁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진세린의 고막을 때렸다.

바람 소리가 멎고,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현대 도시의 지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괴하고 압도적인 공간이었다.

쿵-!

진혁의 발이 차가운 대지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진세린과 뒤를 이어 뛰어내린 송수연, 그리고 윤아영과 니르바나 정예 대원들이 착지하며 주변의 먼지를 쓸어냈다.

"여기가…… 게헨나?"

윤아영이 숨을 고르며 소형 홀로그램 터미널을 펼쳤다.

그러나 패드의 화면은 전파 방해라도 받는 듯 지지직거리며 검은 노이즈로 가득 차 있었다.

"전파가 완전히 차단됐어! 아까 지상에서 보던 10만 MW짜리 공진 에너지가 이 지하 전체를 거대한 전자기 감옥으로 만들고 있어!"

윤아영의 경고대로, 그들이 도달한 지하 300미터의 공간은 상식의 바깥에 존재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현대식 나노 공장과 고대 마교의 석탑, 그리고 정체 모를 주술적 진법들이 기괴하게 뒤섞인 거대한 지하 도시였다.

수백 개에 달하는 거대한 철제 파이프들이 천장에 얽혀 있었고, 그 파이프 안으로는 붉은빛을 띤 암흑물질 냉각수가 펄펄 끓어 넘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뿜었다.

그 파이프들의 뿌리가 닿아 있는 중앙에는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거대한 흑요석 석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1,000년 전 마교의 본단 터.

티타늄 그룹은 그 유적 위에 그대로 연구소를 지어 올리고, 천마의 유골 데이터와 마교의 원시 마핵을 강제로 추출해 자신들의 5세대 코어 기술로 개조해 왔던 것이다.

"크으으……."

송수연이 저도 모르게 도검의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魔氣)의 농도가 지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헤집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염 물질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마교의 흉포한 사념이 생명체의 정신을 갉아먹는 독기였다.

"이 공기…… 보통이 아니야. 일반 대원들은 몇 분만 숨 쉬어도 미쳐버릴걸?"

실제로 니르바나의 정예 대원들 중 몇 명은 이미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진혁이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흑안 속에서 만물의 기류와 마기의 흐름이 낱낱이 파악되었다.

'진무극의 잔재가 이곳의 마핵과 완전히 동기화되었다.'

진무극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5세대 프라임 코어의 파편들과 지하 최심부에 봉인되어 있던 원시 마핵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폭주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폭주의 끝은 신서울 상공의 차원 틈새를 완전히 개방하여 우주적 포식자들을 이 땅으로 끌어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지하 도시 전체를 거핵폭탄처럼 터뜨려 신서울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SYSTEM INFO: 경고. 지하 최심부 핵융합로 출력 200,000 MW 돌파.]

[경고. 마교 원시 마핵의 폭주율 87% 상승. 15분 후 연쇄폭발 발생 예상.]

두뇌 속에서 울리는 것은 시스템의 보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혁 자신이 과거 천마 프로토콜을 이식받았을 때 새겨진 잔존 경고 회로이자, 스스로의 직관이 만들어낸 생존의 경보였다.

"시간이 없다."

진혁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의 걸음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짙은 흑기(黑氣)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혁 씨, 저기 봐!"

윤아영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거대한 흑요석 석탑의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생체 포드(Pod)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 안에는 티타늄 그룹의 실험복을 입은 수많은 인간들…… 아니, 마공 실험에 실패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한 실패작들의 시체가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포드들의 중앙, 석탑의 제단 위에서 거대한 붉은 빛의 심장 같은 코어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쿵-! 쿵-! 쿵-!

그것은 지구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의 심장이 뛰는 듯한 불규칙한 박동이었다.

그 박동에 맞춰 공간이 찢어지고, 허공에는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 형상을 한 사념의 파편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인간…… 마침내…… 문이 열린다…….-

환청인지 실제 소리인지 모를 끔찍한 음성이 일행의 머릿속을 후벼팠다.

송수연이 얼굴을 창백하게 굳히며 검을 겨눴고, 진세린은 아버지의 유산이 만들어낸 이 괴기한 지옥도를 보며 치를 떨었다.

"저게…… 진무극이 숨기려 했던 진짜 비밀이야."

진세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티타늄 그룹은 애초에 인간을 강화하기 위한 기업이 아니었어. 저 지하에 잠든 외계의 사념과 마교의 마기를 결합해, 이 세계를 그들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문을 여는 열쇠였던 거지."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칠흑빛 검강이 더욱 선명한 푸른 뇌전을 품으며 요동쳤다.

시스템도, 진무극도, 그 어떤 거대 자본과 기술도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각인시키는 것뿐이었다.

"숨어 있어라."

진혁의 짧은 명령과 함께,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기가 신서울의 지하 300미터를 집어삼킬 듯 뿜어져 나왔다.

파앗-!

진혁의 신형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채 거대한 흑요석 석탑을 향해 포탄처럼 사출되었다.

지하 최심부, 세상의 종말을 부르는 마교의 본단 한복판에서 참된 천마(天魔)의 최종 격전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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