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단절된 세계
슈우우우-!
타워의 120층, 그 거대한 철골 구조물과 강화 유리들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던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가 찢겨 나가는 소리였다. 진무극이 사출해 낸 최후의 자폭용 EMP 코어가 터지면서, 공기 중을 유영하던 모든 통신선과 미세 나노 회로들이 단번에 기능을 상실했다.
치지지직―!
스마트글래스도, 시야각 HUD도, 전자기력을 이용하던 모든 문명적 이기가 일시에 암전(暗電)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세상의 인위적인 정보가 끊어진 순간, 오히려 세계의 진짜 결이 강진혁의 눈앞에 낱낱이 드러났다.
시야가 푸른빛의 픽셀로 구성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강진혁의 망막은 오직 순수한 오감과, 체내를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치는 마기(魔氣)의 흐름으로만 세상을 인식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없다.’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을 짓누르던 기계적 연산 보조 장치가 사라지자, 세상이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명징하게 다가왔다.
바람의 결, 공기 중에 부유하는 철분의 냄새, 그리고 저 아래 어두운 지하 심층부로 추락하는 생체 수트의 불완전한 파열음까지.
콰구구구구-!
진무극이 당긴 비상 탈출 레버로 인해 타워의 바닥면이 통째로 함몰되었다.
수만 톤에 달하는 강화 콘크리트와 티타늄 합금이 얽혀 내려앉으며 거대한 싱크홀을 형성했고, 그 중심에서 찌그러진 오리진 수트를 걸친 진무극이 끝없는 지하의 암흑 속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커헉……! 크흣, 쿨록……!”
진무극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5세대 암흑물질 코어의 출력이 32,000 MW에서 0 MW로 급감했다. 나노머신이 굳어버린 수트는 이제 그에게 첨단 갑주가 아니라, 차라리 옴짝달싹할 수 없는 거대한 철제 관(棺)에 불과했다.
“강…… 진혁……!”
사방이 암흑인 수직 갱도를 추락하며, 진무극은 미친 듯이 수동 기폭 장치의 버튼을 더듬었다.
기계가 죽었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연결하면 그만이었다. 타워의 지하 최심부,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이 1,000년 전 고대 마교의 유적에서 발굴해 낸 ‘진짜 마핵(魔核)’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폭주시킨다면 신서울 전체가 증발할 터였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천마의 그릇을 차지하게 둘 수 없다는 뒤틀린 오기가 그의 남은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파앗-!
그때, 암흑으로 가득 찬 수직 갱도의 허공에서 검붉은 핏빛 잔상이 번뜩였다.
“어디로 가나, 진무극.”
마광신보(魔光神步).
나노머신의 추력 보조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벗어던졌다.
오직 두 다리의 근육과 뼛속까지 스며든 마기(魔氣)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역대 최강의 보법으로, 진혁은 중력의 법칙을 비웃으며 수직 낙하하는 궤적을 그대로 쫓아갔다.
“이…… 미친 놈이……!”
진무극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EMP 폭풍 속에서 어떻게 저런 출력을 낸단 말인가? 나노머신이 멈추었다면 인간의 육체는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강진혁은 상식을 논할 단계의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마신경(魔神境)]의 경지에서 육체와 기혈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심장의 박동 하나, 혈관을 타는 피 한 방울까지 모두 그의 의지 아래 통제되었다.
콰아아앙!
진혁의 오른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신을 두른 칠흑빛 마강(魔罡)이 EMP로 마비된 공기를 찢어발기며 진무극의 오리진 수트를 강타했다.
챙강-! 카득!
“크아아아악!”
이미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져 있던 오리진 수트의 흉갑이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다.
티타늄과 탄소 섬유의 결합체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진무극의 가슴 부근에 박혀 있던 생체 코어가 외부로 그대로 노출되었다.
스으으읍…….
진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단전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적의 에너지를 강탈하고 정제하는 절대의 흡인력, [흡원천공(吸元天功)]이 무음(無音)의 파동으로 발동했다.
“네놈이 품고 있던 그 오만한 힘의 근원도, 이제 내 안으로 흡수해주마.”
- 흡(吸).
단 한마디의 읊조림과 함께, 진무극의 코어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잔류 에너지가 뱀의 혓바닥처럼 진혁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단순한 기(氣)의 흡수가 아니었다. 진무극이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체들을 갈아 넣으며 축적해 온 생명력과, 고대 마교의 유골에서 추출한 파편적 데이터까지 강제로 탈취당하는 감각이었다.
“아…… 안 돼…… 내 힘이……! 내 불멸이……!”
진무극의 얼굴이 순식간에 늙어갔다.
탱탱하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은발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스라졌다. 기계의 힘에 의존해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육체는, 무공의 본질을 깨달은 진짜 '천마'의 손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영원(永遠)이란 없다, 진무극.”
진혁의 목소리는 차가운 심해의 빙하와 같았다.
“기술로 빚어낸 가짜 불멸 따위는, 내 검 끝에서 단 한 줌의 재가 될 뿐이다.”
콰아아아궁!
두 사람의 추락이 끝났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티타늄 타워의 가장 밑바닥, 지상 수천 미터 아래에 감춰져 있던 ‘제0 연구동’이었다.
거대한 강철 문들이 뒤틀려 있었고, 그 중앙에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여전히 검붉은 맥박을 뛰놀고 있는 거대한 구체 형태의 유적이 박혀 있었다.
1,000년 전 마교의 본산에서 발굴되었다는 고대 천마의 심장, 그 자체였다.
쿵, 쿵, 쿵…….
그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지하 전체의 공간이 미세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진무극은 그 거대한 심장 앞에 처참하게 내던져졌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코어가 박살 난 채,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간신히 눈을 떠 그 거대한 마핵을 바라보았다.
“크흣…… 크하하하……!”
진무극이 피를 토하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거품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보이나, 강진혁……? 저게 바로…… 우리를 이 지옥으로 몰아넣은 진짜 ‘본질’이다…….”
“…….”
“네가 날 죽여도 소용없어. 저 마핵은 이미 나와 공명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내가 죽는 순간, 저 안에 봉인된 고대 마교의 에너지 코드가 연쇄 폭발을 일으킬 거다……! 신서울 전체가, 아니, 이 대륙의 반이 이 지하와 함께 증발할 거라고……!”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세상 전체를 함께 무덤으로 끌고 가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찌르르륵-!
진무극의 손가락 끝이 마핵의 기폭 단자에 닿으려 했다.
그 순간에도 EMP 폭풍의 여파로 지상의 통신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고, 윤아영을 비롯한 저항군의 해킹 지원도 이 깊은 지하까지는 닿지 않았다.
오롯이 강진혁의 판단과 무력만으로 이 폭주를 막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시간이 없다.’
마핵의 표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가속화되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수십 초.
이 거대한 마핵의 에너지가 폭주하면, 진혁 자신이라도 이 지하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진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스템의 계산도, AI의 보조도 없었다.
오직 온몸으로 체득한 무도의 극의만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만상귀일(萬象歸一).’
진혁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신에 깃든 것은 현대의 나노머신도, 티타늄 그룹의 고출력 에너지도 아니었다.
오직 그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와 혈관을 타고 흐른, 100% 순수한 자신의 내공과 마기(魔氣)의 결합체였다.
츄우우우우-!
공간이 비틀렸다.
진혁의 검 끝에 모인 칠흑빛 검강은 주변의 모든 빛과 소리마저 빨아들이듯 거대한 암흑의 구체를 형성했다.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블랙홀처럼, 그것은 진무극이 발악하며 기폭시키려던 마핵의 파동마저 억누르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말도 안 돼…… 그 상태로 그런 출력이……?!”
진무극이 눈을 부릅떴다.
수트의 도움 없이, 순수한 인간의 육체와 내공만으로 저 정도의 에너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물리 법칙을 초월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마신(魔神)'의 권능이었다.
“네가 만든 기술은 여기까지다, 진무극.”
진혁의 입술이 낮게 울렸다.
그의 검이 허공을 향해 단 한 번 내리쳐졌다.
“그리고 이 세상의 주인을 정하는 것도, 내 검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제0 연구동 전체가 백색광과 칠흑빛 마강에 의해 완전히 지워졌다.
마핵의 기폭 장치로 향하던 진무극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춰 섰고, 그의 육체는 검강의 여파 속에서 분자 단위로 분해되며 허공의 먼지로 흩어져 갔다.
마침내, 티타늄 그룹의 절대 군주였던 진무극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쿵.
진혁의 부츠가 먼지 쌓인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사방은 조용했다.
진무극이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거대한 폭주를 일으키려던 마핵 역시 진혁의 [흡원천공]과 [파천검강]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되어 고요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비록 지상의 EMP 폭풍과 통신 두절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신서울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가장 거대한 암흑은 진혁의 손으로 끝맺음 되었다.
휘익-.
지하 갱도의 차가운 바람이 진혁의 흑발을 쓸어넘겼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눈앞의 거대한 적은 쓰러뜨렸지만, 120층 타워 위에서 목격했던 그 광경――신서울 상공의 찢어진 차원 틈새에서 번뜩이던 수만 개의 붉은 눈동자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진무극과의 싸움은 끝났으나,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올 테면 와라.”
진혁이 검을 거두며 나지막이 뇌까리는 그 순간,
지하 갱도의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 씨……! 안에 있습니까?!”
윤아영의 목소리였다.
그녀 뒤로 진세린과 송수연을 비롯한 저항군의 기류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 대신, 상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재앙에 대한 극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윤아영?”
진혁이 고개를 돌렸다.
통신망이 완전히 마비된 EMP 폭풍 속에서, 저항군과 윤아영이 어떻게 이 깊은 지하 최심부까지 뚫고 내려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스쳤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순간, 진혁은 질문을 거두어들였다.
윤아영의 숏컷 분홍 머리는 땀과 먼지로 엉망이었고,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 단말기는 연기를 내뿜으며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진혁 씨!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하지만 지금 숨 돌릴 시간이 없어요.”
윤아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진혁에게 달려왔다. 그녀의 뒤를 이어, 전신에 마기의 잔향을 휘감은 채 아슬아슬하게 부상을 억누르고 있는 진세린과 대형 도검을 겨누고 선 송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이 어때?”
진혁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윤아영이 단말기 파편을 내던지며 급히 말했다.
“지상의 EMP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광범위해요. 티타늄 타워가 무너지면서 그 자리에 설치되어 있던 비상 백업 서버들이 일제히 연쇄 과부하를 일으켰거든요. 그런데 그게 단순히 통신만 끊은 게 아니에요.”
“…….”
“신서울 상공의 찢어진 차원 틈새, 기억하시죠? 그 균열에서 발산되는 사념파가 지구의 자기장과 공명하면서…… 지금 대기권 전역의 물리 법칙이 뒤틀리고 있어요.”
송수연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거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맞아, 진혁. 지상 방어선에 있던 니르바나 대원들이 보고하길, 차원 틈새에서 괴물들만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야. 그 거대 함선 군단이 내뿜는 압력이 신서울 전역의 중력을 짓누르고 있어. 이대로 가면 일주일 안에 이 도시 전체가 가라앉아.”
진혁의 시선이 타워의 무너진 천장 틈새, 그 너머의 어두운 밤하늘을 향했다.
진무극이 죽음의 순간까지 틀어쥐려 했던 마핵은 제압했으나, 그들이 열어젖힌 문 너머의 존재들은 이미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진세린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 하며 진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허망함과, 새로운 단전을 개방하며 얻은 결연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진무극은 끝났지만, 그 노인이 남긴 유산이 방금 전까지 저 마핵을 통해 차원 침공군의 주파수와 동기화되고 있었어. 우리가 이곳에 내려오기 직전까지, 그들은 좌표를 송신하고 있었다고.”
“좌표라면.”
“그래.”
진세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신서울만이 아니야.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티타늄 그룹의 12개 거대 지하 요충지 전체가 지금 차원 틈새의 하강 포인트를 가리키고 있어. 진무극 그 미치광이는 처음부터 자기가 지배하지 못할 바에는 세상을 전부 저 괴물들에게 바치려고 했던 거야.”
잠시 동안의 무거운 침묵이 지하 연구동을 채웠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순수한 자신의 감각과 무력만으로 세계의 위기를 직시한 강진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려움은 없었다.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거대한 장치에 갇혀 실험체로 버려졌던 과거. 그 시스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
그 모든 인위적인 틀이 완전히 박살 난 지금, 비로소 세상은 진짜 강진혁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진혁이 천천히 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칠흑빛 마강이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전신을 감싸던 마기가 단전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시스템도, 회장 녀석도 끝났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흑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단순하다.”
“……뭘 할 생각이야, 진혁?”
윤아영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강진혁은 타워의 무너진 천장 너머, 붉은 눈동자들이 거대하게 군림하는 차원의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읊조렸다.
“저 하늘의 주인을 베러 간다.”
신서울의 밤하늘 위로, 새로운 천마의 검광이 다시 한번 찢어진 구름을 갈라놓기 위해 솟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