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추심의 밤
새벽의 한기는 난도질당한 살갗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매서웠다. 산서의 험준한 산세에 자리 잡은 청운문(靑雲門)의 낡은 처마 끝에서 떨어진 서리는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바스러졌고, 달빛은 짙은 먹구름 뒤로 몸을 숨긴 채 대지에 흐릿하고 음산한 그림자만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위는 죽은 듯 고요했으나, 한소운의 망막 위에 각인된 천명장부(天命帳簿)의 금빛 문구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오르며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 부채 47 / 100 】
【 공덕 10 】
【 청구 진행 중: 그림자회의의 내부 분열을 위한 첫 번째 밀서가 전달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172일) 】
화산파(華山派)의 장로에게 익명으로 밀서를 던진 지 겨우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소운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별채 마루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었다. 흑련회와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두 바위 사이에 작은 균열을 내기 위해, 그는 제 운명의 한 조각을 기꺼이 도려내어 던졌다. 강호의 거대 문파인 화산의 시선이 남궁가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미래의 인과는 미세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미세한 비틀림조차 하늘의 장부에는 거대한 빚으로 기록되어 돌아왔다.
‘너무 빨리 움직였나…….’
소운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마른기침을 입술을 깨물며 삼켰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릿하고 뜨거운 피 맛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사맥체(死脈體)라는 저주받은 몸뚱이에 억지로 기운을 우겨넣는 역맥 수련, 그리고 미래의 지식을 꺼내 써 하늘의 섭리를 거스른 대가였다. 인과를 비틀 때마다 그의 단전과 경맥은 보이지 않는 칼날에 베인 듯 미세하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의 적막을 깨고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의 주인은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그 안에는 깊은 고뇌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대사형 진무겸이 서 있었다. 무겸은 자다 일어난 듯 검포를 대충 걸치고 있었지만, 투박한 가죽 칼집을 쥔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호쾌함을 잃은 채, 형언할 수 없는 결연함과 슬픔으로 번득였다.
“소운아. 이 깊은 밤에 아직도 청승맞게 앉아 있는 게냐.”
“대사형. 잠이 오질 않아서요. 바람이 좀 차군요.”
무겸이 소운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거친 한숨이 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겸은 한참 동안 먼 산줄기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너와 서린이에게 그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뒤로 나 역시 눈을 붙일 수가 없더구나. 5년 뒤, 우리 청운문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고…… 제자들이, 내 형제들이 개처럼 살해당한다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정해진 파멸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요.”
“처음엔 미친 소리라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가져온 정보들, 그날 밤 우리를 노렸던 흑련회의 척후들, 그리고 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기이한 일들을 목도하니 더는 부정할 길이 없더구나. 소운아, 너는 대체 어떤 지옥을 홀로 걷다 돌아온 것이냐.”
소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깊게 숙였다. 20년의 세월, 잡역부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강호의 시체 산을 넘고 피 냄새 진동하는 밑바닥을 전전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 고독과 절망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무겸이 투박하고 커다란 손을 뻗어 소운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 손길은 뜨거웠고, 삼류 문파의 대사형으로서 동생을 지키겠다는 짐승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라. 네놈 혼자 미래를 바꾸겠답시고 위태롭게 날뛰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혀 견딜 수가 없단 말이다. 우리는 이미 공동 장부라는 인연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냐. 네가 짊어진 그 가혹한 빚, 우리도 같이 갚아 나갈 것이다. 그것이 형제고 동문이다.”
“대사형……”
“그러니 오늘은 그만 들어가 쉬어라. 내일은 장문인 몰래 서린이와 함께 산서 외곽의 채소밭과 보급로를 점검하기로 했다. 문파의 식량과 방어선을 조금이라도 더 공고히 해두어야 다가올 폭풍을 견딜 수 있을 테니까.”
무겸이 무릎을 탁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채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 소운의 뇌락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지익— 지이익—!
고막을 긁어대는 환청과 함께 눈앞의 장부가 미친 듯이 붉은빛을 토해내며 점멸했다. 그것은 경고를 넘어선, 명백한 재앙의 전조였다.
【 경고: 인과부채의 상한 임계점에 근접했습니다! 】
【 현재 부채: 47 / 100 】
【 주의: 화산파로 향한 밀서의 파장이 예상보다 거대합니다. 남궁세가의 감시망이 예상보다 빠르게 청운문을 포착했습니다. 】
“소운? 갑자기 왜 그러냐?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려서…….”
무겸이 소운의 이상 증세를 느끼고 급히 다가왔다. 하지만 소운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밤의 정적을 무참히 짓밟는 파열음이 청운문의 산문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청운문의 정문을 지탱하던 나무 울타리가 비산하는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수십 개의 시뻘건 횃불이 불쑥 솟아올랐다. 평화롭던 문파의 마당으로 밤의 사냥꾼들이 피 냄새를 풍기며 밀려들었다.
“누, 누구냐! 어느 놈이 감히 신성한 문파의 정문을 박살 내는 것이냐!”
순간 문파의 경내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잠을 설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칼을 빼 들고 뛰쳐나왔다. 장문인 백도현 역시 급히 장포를 휘날리며 마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평생 인자함만을 간직했던 그의 얼굴에 전율에 가까운 경악과 분노가 서렸다.
“이 야심한 밤에 우리 청운문을 습격하다니, 너희들은 도대체 어느 소속의 무인들이냐!”
어둠 속에서 비릿하고 잔혹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횃불의 넘실거리는 불빛을 받으며 나타난 이들은 검은 두건으로 안면을 가린 채, 오직 살기만을 내뿜는 살수들이었다. 그 선두에 선, 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청운문. 산서 바닥의 쥐새끼 같은 삼류 검문이 기어이 분수도 모르고 선을 넘었더군. 남궁세가 어른들의 일에 감히 혓바닥을 놀리고 조잡한 증거를 흘려? 오늘 밤, 이 산천에서 너희 문파의 흔적을 통째로 지워주마.”
그림자회의의 정예 자객들이었다. 소운이 보낸 밀서의 여파는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왔다. 화산파가 움직이기도 전, 남궁세가는 자신들을 향한 칼날의 기미를 예민하게 눈치채고 화근을 미리 도려내기 위해 가장 잔인한 칼을 청운문으로 보낸 것이다.
“대사형, 저놈들입니다! 지옥의 사자들이 왔습니다!”
소운이 이를 악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역맥 수련으로 단련된 서늘한 기운이 단전에서 요동치며 전신의 메마른 경맥을 타고 폭포처럼 흘렀다. 무겸의 눈에도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서린이를 지켜라! 내 앞을 막아서는 놈들은 그게 귀신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베어버릴 테니!”
무겸이 청운문의 정수인 진산검법(鎭山劍法)의 초식을 전개하며 자객들을 향해 용맹하게 몸을 날렸다. 대사형의 검광이 밤하늘을 갈라치며 첫 번째 자객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청운문의 제자들도 장문인의 지휘 아래 죽음의 공포를 떨쳐내며 검을 맞부딪쳤다.
하지만 자객들의 무공은 삼류 문파인 청운문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오대세가의 뒷수습과 더러운 암살을 전담해 온 정예 살수들. 그들의 칼날은 잔혹하리만치 정교했고,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불과 몇 합의 교전 만에 청운문의 제자 서너 명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흩뿌리고 쓰러졌다.
“제자들아, 물러서라! 내가 상대하마!”
백도현이 장문인의 위엄을 보이며 직접 전면에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청운검(靑雲劍)이 은은한 청색 광채를 내뿜으며 자객들의 우두머리를 압박했다. 과연 과거 천맹(天盟)의 비밀 임무에서 이름을 떨쳤던 고수다웠다. 백도현의 검세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자객들의 기세가 꺾이며 수십 명이 뒤로 밀려났다.
상황은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소운의 머릿속 장부가 또다시 붉은 피 같은 경고를 토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파지지직——!
소운의 시야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을 거대한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덮쳐왔다.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고, 전신의 구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압박감이 그를 덮쳤다.
【 긴급 청구 및 추심 발동! 】
【 미래의 과도한 개변으로 인해, 하늘이 청구한 빚의 일부가 즉시 집행됩니다. 】
【 현재 부채: 47 / 100 —> 강제 추심으로 인한 부채 변동 발생! 】
“크으윽……!”
소운이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처절하게 주저앉았다. 역맥 수련의 고질적인 부작용과 천명장부의 강제 추심이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빚을 제때 갚지 못하거나,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미래를 뒤틀었을 때 찾아오는 하늘의 형벌. 그 끔찍한 고통이 소운의 전신을 짓밟고 경맥을 사방으로 비틀어 놓았다.
푸확!
소운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마당의 흙바닥이 그의 피로 붉게 젖어 들었다. 그것을 본 백서린이 경악하며 자객의 칼날을 쳐내고 달려왔다.
“소운아! 대체 왜 그래? 정신 차려봐, 소운아!”
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소운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공동 장부의 가혹한 법칙이 발동했다. 소운이 홀로 감당해야 할 추심의 고통이, 공중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인과의 끈을 타고 주변의 동료들에게 전이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부가 차갑고 비정한 음성으로 머릿속에 속삭였다.
【 공동 장부의 과부하: 소운이 감당해야 할 추심의 고통이 공유된 동료에게 전가됩니다. 】
“아……?”
서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다. 소운에게 뻗었던 그녀의 손이 갈대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서린의 단전 부근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역류하며 그녀의 가녀린 경맥을 억지로 비틀고 휘저었다.
컥…….
서린 역시 입가로 진한 피를 흘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흐려졌다.
“서린아……! 안 돼…… 멈춰……!”
소운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서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슴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내가 살기 위해, 이 문파를 구하기 위해 미래를 바꿨는데, 그 대가가 고스란히 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혼자 짊어지려 했으나 빚을 나누었다. 하지만 빚을 나누는 순간, 자신의 고통은 동료들의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천명장부가 가진 잔인한 본질이었다. 힘을 얻고 운명을 비트는 만큼, 주변의 인연들이 가진 운명은 파괴되고 잠식된다.
마당 한복판에서 자객들과 혈투를 벌이던 진무겸이 서린과 소운의 이상 징후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서린아! 소운아! 무슨 일이냐!”
무겸이 경악하며 그들에게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자객의 우두머리는 그 틈을 놓칠 만큼 어수룩한 자가 아니었다. 놈의 예리한 검광이 무겸의 무방비한 등 뒤를 정확히 노리고 쏘아졌다.
푹——!
“크아악……!”
무겸의 등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자객의 검은 무겸의 어깨뼈를 관통하고 근육을 헤집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문파를 지키다 가장 먼저 비참하게 죽어갔던 대사형의 운명이, 바뀐 미래 속에서도 잔인한 빚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 그의 육체를 찌른 것이다.
“대사형——!”
서린의 절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청운문의 제자들은 자객들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하나둘 쓰러져 갔다. 장문인 백도현은 홀로 수십 명의 자객을 상대하느라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채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시야는 점점 흐릿해지고 의식은 멀어져 갔다. 머릿속의 장부는 냉혹하게 새로운 숫자를 깜빡이며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 부채 82 / 100 】
【 경고: 부채 상한선에 근접했습니다. 추가적인 인과 개변이나 전투 패배 시, 주변 인물의 운명이 영구적으로 소멸합니다. 】
82. 단숨에 35라는 수치가 폭등했다. 자객들의 습격을 유도한 대가, 그리고 미래를 비틀어 화산파라는 거대 세력을 움직인 대가가 청운문의 피로 청구되고 있었다.
‘내가…… 틀렸던 건가……?’
소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내렸다. 바꾸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지옥이 그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혼자서 다 짊어지려 했지만 힘은 턱없이 부족했고, 나누려 했으나 소중한 이들이 대신 피를 흘렸다. 절망의 연기가 소운의 목을 조여오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때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대사형 진무겸이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깨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지만, 무겸은 비틀거리면서도 소운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원망 대신, 오직 형제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신뢰가 서려 있었다.
“소운아…….”
“대사형……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경맥이 파손되었습니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무겸의 입가에 씁쓸하면서도 단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언제 운명 따위에 겁먹고 도망치자고 약속했었나. 빚을 갚겠다고 했잖아. 네놈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지 마라. 하늘이 빚을 청구한다면…… 우리가 이 검으로 갚아주면 될 일 아니냐!”
무겸의 사자후 같은 외침에 서린 역시 눈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녀의 검광이 차갑고도 서슬 퍼렇게 빛났다. 고통에 무릎 꿇었던 그녀의 신형에 다시금 꼿꼿한 의지가 깃들었다.
소운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회한이 끓어오르는 분노와 결의로 치환되었다. 하늘이 청구한다면, 피를 흘려야 한다면, 결코 회피하지 않하겠다. 혼자서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함께 부서지더라도 이 잔인한 운명의 굴레를 찢어발기리라.
소운은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두 손으로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역맥의 고통이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겼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래…… 갚아주마. 반드시.”
소운의 눈빛이 핏빛 광채로 물들었다. 머릿속의 장부가 마지막으로 크게 진동하며,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 부채 82 / 100 】
【 청구 완료 조건 갱신: 다가오는 자객들의 우두머리를 베고, 청운문의 방어선을 사수하라. (공동 장부의 힘이 동기화됩니다.) 】
서늘한 새벽 공기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청운문의 마당을 가득 채웠다. 쓰러진 제자들의 신음 소리와 횃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요란한 적막을 깨고 있었다. 진무겸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흙을 검붉게 적셨고, 백서린은 부르튼 입술을 깨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들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비록 상처 입었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은 의지였다.
소운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일어섰다. 단전에서 치솟는 통증은 여전히 전신의 경맥을 태우는 듯했으나, 더 이상 그 고통에 눈을 감지 않았다. 하늘은 빚을 청구했고, 그들은 그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사형, 서린아.”
소운의 낮고 쉰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박혔다.
“저놈들의 우두머리를 베어야 이 밤이 끝납니다.”
무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네놈이 길을 터라. 이 검이 부러지기 전까지 앞을 막는 자는 모조리 베어줄 테니.”
서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끝이 자객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정확히 겨누어졌고, 그 눈빛에는 과거 혈월검희로 타락할 뻔했던 비운의 흔적 대신 제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자객들의 우두머리는 청운문 제자들의 완강한 저항과 세 사람의 기묘한 기세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이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고작 삼류 문파의 잔당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죽고 싶어 환장했다면 기꺼이 그 소원을 들어주마!”
우두머리의 고함과 함께 남은 자객들이 일제히 검을 겨누고 쇄도해 왔다. 그 순간, 소운의 머릿속에서 장부가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공동 장부의 힘이 세 사람의 단전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역맥의 고통이 오히려 폭발적인 내력의 흐름으로 치환되며 소운의 사맥체를 강제로 뚫어냈다.
쾅——!
소운의 발밑에서 돌무더기가 산산조각 났다.
“간다!”
소운이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광은 정석적인 문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사맥체를 억지로 비틀어 익힌, 오직 살기 위해 익힌 실전의 검이었다. 잡역부로 살아오며 밑바닥에서 눈여겨본 모든 싸움의 잔재가 그 검끝에 실려 있었다. 첫 번째 자객의 검이 소운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지만, 소운은 몸을 비틀며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툭——.
목이 베인 자객이 쓰러지기도 전에, 무겸과 서린이 좌우에서 날아들어 남은 자객들의 대형을 완전히 박살 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연계 공격. 빚을 함께 짊어진 자들이기에 가능한 완벽한 호흡이었다.
자객 우두머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 자식들이……!”
우두머리가 직접 내력을 끌어올려 거대한 검강을 형성한 채 소운을 향해 내리찍었다. 상급 무인의 위압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하지만 소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우두머리의 검세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챙——!
귀를 찢는 비명 같은 금속음과 함께 소운의 두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경맥이 터지는 고통에 시야가 아득해졌지만, 소운은 이를 악물고 단전에 남은 모든 기를 끌어모았다.
“네놈들이 만든 빚이다. 우리가 반드시 갚아주마.”
소운의 검이 우두머리의 검을 밀어내며 그 가슴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두머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피를 토하며 주저앉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운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남은 자객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격하지 마라.”
소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바닥에 짚었다. 마당은 고요해졌고,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청운문의 제자들과 서로를 부축하는 세 사람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장부가 고요히 울렸다.
【 청구 완료: 자객 우두머리를 처단하고 청운문의 방어선을 사수했습니다. 】
【 공동 장부의 동기화로 인해 부채의 과부하가 일부 해소됩니다. 】
【 현재 부채: 65 / 100 】
【 공덕 10 】
82까지 치솟았던 부채가 공동 장부의 동기화와 전투 승리로 인해 소폭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붉은 경고등은 꺼지지 않았다. 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래를 바꾸는 대가는 가혹했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첩첩산중이었다. 남궁세가의 감시망은 더욱 조여올 것이고, 흑련회와 혈월교의 그림자는 이미 청운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소운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무겸이 다가와 소운의 어깨를 툭 쳤고, 서린이 조용히 손을 내밀어 소운의 부서진 손을 감싸 쥐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산서의 하늘 위로, 옅은 여명이 청운문의 낡은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강호의 거대한 폭풍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