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그림자회의의 단서
청운문으로 돌아온 날 밤부터 소운에게 시간의 흐름은 기이한 왜곡을 일으키고 있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자연의 섭리는 창호지 너머의 먼 이야기였고, 오직 등잔불 밑에서 피로에 젖은 눈동자를 굴리며 명부를 훑어내리는 손가락의 박동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낙양의 짙은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기록과의 사투는, 육체보다 정신을 먼저 갉아먹는 지독한 형벌과도 같았다.
낙양의 밀실에서 훔쳐낸 천맹의 기밀 명부는 수십 장의 낡고 누런 양피지 뭉치에 불과했으나, 그 속에 담긴 진실의 무게는 만 근의 태산보다 무거웠다. 그 종이 위에는 강호의 도덕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오대세가와 칠대문파의 고위 인물들이, 사파의 거대 연합인 흑련회와 결탁하여 주고받은 은밀한 서신, 그리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이 오간 장부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正)과 사(邪)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추악한 증거물이었다.
문제는 이 방대한 진실을 어떻게 세상의 빛 아래로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청운문은 산서 외곽의 척박한 땅에 간신히 뿌리 내린, 이름조차 희미한 삼류 문파에 불과했다. 이 명부를 들고 정파의 심장부인 낙양으로 달려가 고발한다 한들, 돌아올 것은 정의의 찬사가 아닌 멸문의 화(禍)뿐임이 자명했다. 거대 세력의 가벼운 입김 한 번이면 진실은 순식간에 날조된 모함으로 변질될 것이고, 청운문은 사파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 너무 많군. 가히 강호의 절반이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깊은 밤, 장문인실의 낡은 탁자 위에서 진무겸이 지친 듯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일렁이는 등잔불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그의 파리한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며칠 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장부 분석에 매달린 그의 눈가에는 검붉은 피로가 문신처럼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남궁세가의 이름만 세 명이다. 그중 하나는 가문의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대장로급이야. 게다가 화산파와 해남파의 중견 장로들도 여럿 끼어 있어. 이 미친 자들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이 장부를 내미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찢어 죽이려 들 게다. 진실은 힘이 없을 때 가장 위험한 법이지.”
“그들을 믿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대사형.”
소운이 타들어 가는 등불의 심지를 가늘게 줄이며 나직하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호수처럼 차분했으나, 탁자 위에 놓인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맥체를 억지로 뚫어낸 역맥 수련의 부작용이었다. 단전 주위의 경맥이 꽈배기처럼 뒤틀리며 송곳으로 명치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고통을 돌보기보다 생존의 길을 닦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리가 정의의 사도처럼 세상에 이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명부를 파편화해서, 그들 스스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 속에 불신이라는 독을 심는 겁니다.”
“불신을 심어 서로를 물어뜯게 만든다?”
백서린이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낙양의 혈전 이후 그녀의 눈빛은 몰라보게 날카롭고 투명해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밟고 돌아온 이래, 그녀의 검 끝에는 망설임이 사라졌고 성정 또한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더 이상 사형들의 뒤에 숨어 보호받던 철없는 문주의 딸이 아니었다.
“그림자회의는 견고한 신념으로 뭉친 동맹이 아닙니다. 각자의 탐욕과 이권, 그리고 서로의 약점으로 얽힌 거미줄 같은 조직일 뿐이죠. 한쪽의 치명적인 약점을 다른 쪽에 은밀히 흘리면, 그 거미줄은 스스로 엉켜 끊어지게 됩니다. 내부의 반역자를 색출하고 서로를 의심하느라 우리 같은 변방의 작은 문파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소운의 제안에 무겸과 서린은 동시에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벼랑 끝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잘못했다가는 굶주린 사자 무리 사이에 고기 한 점을 던져주고 사자들끼리 싸우기를 기대하다가, 도리어 사자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운에게는 두 사람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인과를 비트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었다.
그의 망막 구석에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청색 빛을 내뿜는 기이한 장부가 각인되어 있었다.
【 부채 42 / 100 】
【 청구: 그림자회의의 내부 균열을 유도하고, 배신자의 명부를 적절한 세력에게 익명으로 전달하십시오. (남은 시간: 175일) 】
장부는 쉴 새 없이 소운의 영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회귀의 대가로 얻은 이 저주받은 장부는 그에게 미래를 엿볼 기회를 주는 대신, 끊임없이 인과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소운은 붓을 들어 양피지 명부의 핵심 내용들을 정갈하게 필사하기 시작했다. 원본은 결코 세상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원본이 세상을 파멸시킬 거대한 폭탄이라면, 그가 지금 만드는 필사본들은 그 폭탄을 가장 효과적인 장소에서 터뜨릴 정밀한 기폭장치였다.
“독고염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서린이 묻자, 소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붓을 놓았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흑풍장 부근에 심어둔 우리 쪽 연락책을 통해 곧 답이 올 겁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계산이 빠르고 영악한 여자입니다. 남궁세가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져 흑련회의 정보망까지 위협하기 시작하면, 정보 상인인 그녀의 가문으로서는 남궁가의 다리를 분지르는 일에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독고염은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으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치익―.
마치 고막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소운의 뇌리를 때렸다. 시야 속 장부의 숫자가 붉은빛을 띠며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운은 심장이 얼음물에 잠기는 듯한 오한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 인과율의 급격한 변동이 감지됩니다. 】
【 남궁세가의 추적대가 산서성 경계에 진입했습니다. 】
【 부채 +5 증가 【부채 47 / 100】 】
“제길, 예상보다 너무 빠르군.”
소운이 낮게 욕설을 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돌발 행동에 무겸과 서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소운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놈들이 왔습니다. 낙양에서 도망쳐 나온 지 고작 사흘 만에 산서성 경계를 넘었습니다.”
“추적대라니? 우리 정체를 벌써 들킨 거냐? 아니,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산서성 구석진 이곳까지…….”
무겸이 반사적으로 벽에 기대어둔 자신의 검병을 꽉 쥐며 물었다. 소운은 창밖의 짙은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체를 완벽히 들킨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훔쳐간 명부에서 흘러나오는 인과의 파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림자회의에는 특수한 ‘기적(氣跡)’을 쫓는 암살 집단이 존재하니까요. 그들은 사냥개처럼 공기 중에 남은 미세한 내력의 흔적을 냄새 맡듯 쫓아옵니다. 물리적인 자취가 아니라 기운의 잔향을 추적하는 자들이죠.”
소운의 회귀 전 기억 속에서, 그들은 ‘영안조(影眼組)’라 불리는 괴물들이었다. 대상의 얼굴이나 이름을 몰라도, 그가 만졌던 물건이나 머물렀던 장소에 남긴 기운만으로도 천 리 밖까지 추적해내는 자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남궁가가 이번 명부 탈취 사건을 가문의 존망이 걸린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대사형, 서린아.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소운이 방금 필사하던 양피지를 품속 깊이 갈무리하며 결연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청운문 안으로 그들을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놈들이 문파의 경내로 들어오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제자들까지 모두 몰살당할 겁니다. 우리가 나가서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평지나 대로에서는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게 불가능할 텐데.”
“청운문 뒤편의 흑풍산(黑風山) 깊은 골짜기로 갑니다. 거기는 지형이 험하고 밤안개가 짙어 기척을 숨기기에 용이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곳의 지형을 속속들이 잘 압니다. 거기라면 소수의 인원으로도 대성 고수의 발을 묶고 역습을 노릴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지체하지 않았다. 장문인실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와 어둠을 틈타 산문을 나섰다. 청운문의 낡고 낮은 담장을 넘을 때, 숙직을 서던 어린 제자 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소사형? 이 밤중에 대사형이랑 서린 사저랑 어디 가시는 겁니까? 밤공기가 찬데….”
“잠시 바람 좀 쐬러 산책 나가는 길이다. 너는 어서 가서 잠이나 더 자거라. 내일 아침 연무장에 늦으면 대사형께 단단히 혼날 줄 알아라.”
무겸이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제자의 머리를 다독였다. 어린 제자가 하품을 하며 처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세 사람은 밤안개 속으로 흔적도 없이 몸을 숨겼다.
산서성의 밤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뼛속까지 시렸다. 흑풍산의 험준한 산세를 오를수록 소운의 단전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극에 달했다. 역맥 수련으로 억지로 비틀어놓은 경맥이 외부의 살기를 감지하자, 마치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며 주인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쇠비린내 섞인 기침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소운은 그것을 억지로 삼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 중턱,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울창한 원시림이 만나는 협곡에 다다랐을 때 소운이 갑자기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멈추십시오. 여기까지입니다.”
무겸과 서린이 즉시 검을 뽑아 들며 등과 등을 맞댄 채 주변을 경계했다. 사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밤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서늘한 서걱임과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짐승의 구슬픈 울음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소운의 눈에는 보였다. 나무 그늘 사이, 그림자처럼 얽혀 있는 미세한 내력의 파장이 공기를 비틀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숨어 있는 쥐새끼가 누구인지 압니다. 어설픈 은신술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정체를 드러내시지.”
소운의 나지막하면서도 서늘한 음성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잠시 동안의 무거운 침묵 끝에, 기분 나쁜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키킥… 과연. 천맹의 기밀 명부를 훔쳐 달아난 도둑놈들답군. 감각이 보통이 아니야. 이런 변방의 삼류 문파 찌꺼기들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질렀나 했더니만, 제법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었나 보군.”
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낙엽처럼 가볍고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그의 손에는 독니를 드러낸 뱀처럼 회색빛 철조(鐵爪)가 번뜩이고 있었다. 남자가 뿜어내는 기운은 소성(小成)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 이미 대성(大成)의 문턱을 밟고 있는 일류 고수의 위압감이었다.
“남궁세가의 사냥개인가, 아니면 그림자회의의 암살자인가?”
소운이 검을 뽑아 들며 물었다. 그의 검신에서 희미한 청광이 피어올랐다. 역맥 수련의 여파로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암살자의 심장을 꿰뚫을 듯 서늘하고 단호했다.
암살자가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비웃었다.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오늘 밤 여기서 이름 없는 시체가 되어 썩어갈 테니까. 순순히 명부를 내놓아라. 그럼 사지라도 온전하게 붙여서 묻어주마. 그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다.”
“명부는 없다. 네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미 불태워 재로 만들었지. 네놈들이 쫓아온 건 그 허망한 잔향일 뿐이다.”
소운의 태연한 거짓말에 암살자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거짓말을 하는 눈빛은 아니군. 하지만 상관없다. 너희들의 목을 베어 가져가면, 그 뇌수 속에 남은 기억과 인과적 흔적은 내 도구로 충분히 읽어낼 수 있으니. 죽여서라도 가져가겠다!”
슈우우―!
암살자의 신형이 단숨에 1장의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손에 든 철조가 공기를 찢으며 소운의 목을 향해 날카롭고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소사형, 피해!”
무겸이 일갈하며 검을 휘둘러 암살자의 철조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챙―!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겸의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두 발짝 뒤로 밀려났다. 대성 고수의 압도적인 내공은 삼류 문파의 제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사나운 파도와 같았다.
“무겸 사형!”
서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운검법의 정수를 담아 검을 찔러 넣었다. 화려하면서도 빈틈없는 검광이 암살자의 전신을 그물처럼 촘촘히 에워쌌다. 하지만 암살자는 비웃듯 몸을 기이하게 비틀며 철조로 서린의 검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이건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춤사위일 뿐이다! 죽어라!”
암살자가 왼손으로 서린의 어깨를 향해 치명적인 독장을 날리려는 찰나, 소운의 몸이 포탄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정석적인 청운문의 무공을 고집하지 않았다. 회귀 전 20년 동안 뒷골목의 시궁창에서, 그리고 이름 없는 용병으로 전장을 전전하며 익힌, 가장 비열하면서도 가장 실전적인 살수(殺手)의 찌르기였다.
검끝이 암살자의 옆구리를 향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 자식이―!”
암살자가 급히 장력을 거두며 몸을 뒤로 뺐지만, 소운의 검은 이미 그의 옆구리 옷자락을 찢고 깊은 상처를 남긴 뒤였다. 검붉은 피가 밤안개 속으로 흩뿌려졌고, 암살자의 안면 근육이 고통과 경악으로 뒤틀렸다.
암살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열을 정비했다.
“네놈의 검은… 정통 무공이 아니야. 어디서 배운 야바위냐? 근본 없는 쥐새끼 같으니.”
“야바위든 살법이든, 마지막에 서 있는 놈이 주인이지. 근본 따지는 건 저승에 가서나 하시지.”
소운은 입가에 배어 나온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리한 움직임에 단전이 터져 나갈 듯 아우성쳤지만, 지금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암살자는 상처 입은 옆구리를 움켜쥐며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흥, 잔머리를 굴려봐야 경지의 차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 네놈들은 오늘 여기서 진정한 대성 고수의 힘이 무엇인지 뼛속 깊이 새기며 죽게 될 것이다.”
암살자의 손에서 검은 진기가 불길처럼 피어올라 주변의 나뭇가지를 바스라뜨렸다. 대성 고수가 전력을 다해 발산하는 살기는 숲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강력했다.
바로 그때, 소운의 머릿속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 부채 47 / 100 】
【 청구의 위기가 고조됩니다. 】
【 경고: 현재의 전력으로는 이 상대를 제압할 확률이 5% 미만입니다. 공덕을 소모하여 '일시적 인과 역전'을 발동하겠습니까? 】
소운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망설일 여유조차 없었다.
‘발동해! 당장!’
치익―!
시야 구석에서 공덕 수치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급격히 깎여 나갔다.
【 공덕 12 중 5 소모. 】
【 일시적으로 상대의 다음 초식을 강제로 빗나가게 합니다. 인과의 실타래가 재구성됩니다. 】
순간, 암살자의 눈동자에 기이한 혼란이 스쳤다. 그가 전력을 담아 날린 최후의 필살기, ‘혈조절명참(血爪絕命斬)’이 소운의 심장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왔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공기의 흐름이 비틀리며 궤적이 어긋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암살자의 팔을 민 것처럼, 그의 손끝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소운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데 그쳤다.
“뭐지?! 내 공격이 왜… 이럴 리가 없다!”
자신의 초식이 허공을 갈랐다는 사실에 암살자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든 순간, 소운이 단전의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외쳤다.
“지금입니다! 합격(合擊)!”
소운과 무겸, 그리고 서린의 검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빛을 발했다. 세 사람의 내력이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청백색의 검광을 이루었고, 그것은 방어 기회를 놓친 암살자의 가슴을 정확히 관통했다.
푸드득―!
암살자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세 자루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삼류 문파의 애송이들이라고 무시했던 자들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도려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어째서… 이런 변방의… 애송이들이… 어떻게 인과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암살자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흑풍산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의 시체는 이내 기이한 현상을 보였다. 그림자회의의 암살자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몸속에 특수한 화골산(化骨散) 장치를 품고 있었고, 심장이 멈추자마자 시신은 독한 연기를 내며 서서히 녹아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정말 저승 문턱을 구경하고 왔군.”
무겸이 칼을 지팡이 삼아 바닥을 짚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서린 역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소운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깨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의 장부를 향해 있었다.
장부의 숫자가 차갑게 깜빡이며 갱신되고 있었다.
【 부채 47 / 100 】
【 공덕 +3 획득 (잔여 공덕: 10) 】
【 청구 진행 중: 그림자회의의 내부 균열을 위한 다음 단계가 개방됩니다. 적의 추적을 일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
“소사형, 괜찮으세요? 상처가 깊어요.”
서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가와 소운의 어깨를 부축했다. 소운은 고개를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 이제 겨우 첫 번째 고비를 넘겼을 뿐이야.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는 멀리 낙양 쪽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림자회의는 이번 암살 실패로 인해 청운문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보낸 최정예 암살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내부의 또 다른 파벌들에게 의혹과 불신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국을 지워야 합니다. 놈들은 짐승 같은 후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 피 냄새와 인과의 잔류 파장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서둘러야 해요.”
소운의 지시에 따라 세 사람은 철저히 흔적을 지웠다. 핏자국 위에 흙을 덮고, 주변의 기를 흩뜨려 놓은 뒤에야 산을 내려왔다.
청운문으로 돌아오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어둠에 잠긴 산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장문인실의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평화로운 밤기운만이 문파를 감싸고 있었다. 잠든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형들이 방금 전 어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소운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곧바로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욱…!”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속에서 치솟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왔다. 소운은 소매로 거칠게 입을 닦아냈다. 시빨간 핏덩이가 하얀 소매를 적셨다. 공덕을 소모해 인과를 억지로 비튼 대가는 그의 육체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 부채 47 / 100 】
【 공덕 10 / 획득 공덕 3 】
【 경고: 잦은 인과 개변은 단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즉시 신체적 안정을 취하십시오. 】
장부의 냉정한 경고를 보며 소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맥체를 억지로 뚫어 만든 역맥은 양날의 검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5년 뒤의 혈월교가 찾아오기도 전에 내상으로 먼저 쓰러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청운문의 연무장에 장문인 백도현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운아, 네 어깨의 그 상처는 대체 무엇이냐? 어제까지는 멀쩡하더니만.”
백도현이 소운의 붕대 감긴 어깨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염려와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소운은 미리 준비해 둔 변명을 차분하게 꺼냈다.
“어젯밤 흑풍산 자락에서 길 잃은 멧돼지와 마주쳤습니다. 사형들과 함께 사냥을 시도하다가 그만 제 실력이 부족하여 날카로운 발톱에 긁혔을 뿐입니다. 큰 부상은 아닙니다.”
“이 녀석아! 무공 실력도 일천한 놈이 무슨 만용으로 사냥이냐. 큰일 날 뻔했구나. 앞으로는 절대 혼자 산에 들지 마라. 네가 잘못되면 이 사부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백도현은 허허 웃으며 소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그 따뜻하고 투박한 손길에 소운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회귀 전, 이 인자한 손길은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사라졌었다. 장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문파를 지키려다 비참하게 죽어갔다.
‘내가 반드시 지킨다. 이번 생에는 누구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대가가 내 목숨이라 해도.’
소운은 속으로 다짐하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백도현이 자리를 뜬 뒤, 소운은 무겸과 서린을 장문인실 뒤편의 작은 별채로 불렀다. 방문이 닫히고, 세 사람 사이에는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젯밤 그 암살자가 남긴 말을 기억하십니까? 놈들은 우리의 기억과 인과의 흔적을 쫓아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놈들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운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이미 다음 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림자회의 내부에 제어할 수 없는 분열을 일으킬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오대세가와 칠대문파가 모인 그곳은 정의가 아닌 권력의 암투장입니다. 남궁세가가 천맹의 실권을 독점하기 위해 흑련회와 손을 잡았다면, 그에 반발하고 시기하는 거대 문파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예컨대… 자존심 강한 화산파 같은 곳 말입니다.”
“화산파라고? 그 오만하고 콧대 높은 자들이 우리 같은 삼류 문파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지 않느냐.”
무겸의 회의적인 반응에 소운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직접 화산파를 찾아가 설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겐 독고염이라는 훌륭한 창구가 있으니까요. 그녀를 통해 낙양에서 빼낸 명부의 파편을 화산파의 강경파 장로에게 은밀히 흘리는 겁니다. 남궁가가 흑련회와 밀약을 맺고 화산파의 이권을 야금야금 가로채려 한다는 명백한 증거의 일부를 쥐여주면, 검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소운의 계획은 정교하고 치밀했다. 화산파가 남궁가의 뒤를 캐기 시작하면, 그림자회의는 내부의 의심과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것이 소운이 노리는 바였다.
세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결연하게 부딪쳤다. 시간은 결코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나, 더 이상 도망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운명을 비틀기 위해, 청운문은 이제 사자의 굴을 향해 첫 번째 말(馬)을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장부가 고요하게 빛을 발하며 새로운 알림을 띄웠다.
【 부채 47 / 100 】
【 청구 진행 중: 그림자회의의 내부 분열을 위한 첫 번째 밀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인과의 파장이 화산파를 향해 뻗어 나갑니다. (남은 시간: 172일) 】
달빛이 흑풍산의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내려와, 암살자가 쓰러졌던 자리를 비추었다. 흔적은 지워졌으나, 그곳에 감돌던 서늘한 죽음의 기운은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폭풍의 전조와도 같았다. 소운은 어깨를 감싸 쥐며 낙양 쪽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5년 뒤의 멸문을 막기 위한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청운문은 이제 가장 중요한 패 하나를 상대의 진영 깊숙이 박아 넣었다. 폭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