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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16화목차

16장 고백

산서(山西)의 지평선을 깨우는 동트기 전의 새벽은 유독 시리고도 잔혹했다. 핏빛 여명이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으나, 청운문의 낡은 마당에 내려앉은 어둠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간밤의 격전이 남긴 흔적은 처참하다 못해 비극적이었다. 단단한 돌부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서져 나갔고,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던 담벼락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사방으로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새벽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진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이자,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이 감내해야 할 비릿한 훈장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흙먼지와 핏물로 뒤범벅이 된 한소운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찢으며 흘러나왔다. 남궁가 자객 우두머리의 검을 맨손으로 받아내야 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찢기고 문드러진 손바닥은 이미 감각을 잃었으며, 짓이겨진 살점 사이로 하얀 뼈마디가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더 지독한 것은 몸 안의 고통이었다. 금기된 역맥(逆脈)을 억지로 가동한 반작용으로 인해 단전은 마치 펄펄 끓는 용암을 집어삼킨 듯 뜨겁게 타올랐다. 전신의 경맥을 수천 개의 바늘로 쑤시고 후비는 듯한 통증이 뇌리를 난도질했다.

그 극렬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운의 눈동자만큼은 만년한빙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흐릿하게 명멸하던 의식의 심연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명장부(天命帳簿)가 조용히 떠올랐다.

【 현재 부채: 65 / 100 】

한때 82라는 파멸적인 수치까지 치솟았던 부채였다. 진무겸, 백서린과의 공동 장부 동기화, 그리고 인과를 뒤트는 자객 우두머리를 처단함으로써 얻어낸 거대한 보상이 합쳐져 간신히 65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65라는 숫자는 여전히 시한폭탄과 같았다. 언제든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소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인연을 집어삼킬 재앙이 될 수 있는 수치였다.

“……소운아.”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진무겸이 다가왔다. 대사형으로서 언제나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던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피로와 깊은 충격이 서려 있었다. 간밤의 싸움은 무겸의 무골(武骨)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단순히 목숨을 건 혈투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상대한 자들이 삼류 문파인 청운문 따위는 평생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천하를 호령하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가의 정예 암살자들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짓눌렀다.

무겸은 소운의 옆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소운을 응시했다.

“남궁가가 왜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문파를 노리는 거지? 그리고 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괴물 같은 검법을 익힌 거냐? 너는 분명 사맥체(死脈體)라 내공을 쌓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았느냐.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이 정녕 현실이란 말이냐?”

대답 대신 서린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소운의 상처 난 손을 제 무릎 위에 올리고 약초를 짓이겨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맑았다. 서린 역시 간밤의 전투 속에서 기이한 경험을 했다. 공동 장부의 힘이 발현되던 순간, 꽉 막혀 있던 단전이 뒤틀리며 폭발적인 기운이 전신을 관통하던 그 감각. 그것은 강호의 어떤 비권(秘卷)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현상이었다.

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숨기려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 저주받은 장부의 굴레를 혼자 짊어지고 가려 했다. 장부가 안겨준 빚은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선택으로 인한 것이기에, 소중한 이들을 이 지독한 인과의 공범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5년 뒤의 멸문의 밤, 그리고 그 이후 20년 동안 이어진 아귀도(餓鬼道) 같은 삶을 겪어본 소운은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 이 거대한 강호의 풍랑과, 하늘이 내린 인과의 부채는 한 사람의 가냘픈 어깨로 버틸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대사형. 그리고 서린아.”

소운이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듯한 짙은 회한이 묻어났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제정신으로 믿기 힘들 거야. 어쩌면 미친놈의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단 한 자의 거짓도 없는, 내가 겪어온 사실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운에게 못 박혔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소운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참혹한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냈다.

“5년 뒤다. 정확히 5년 뒤의 오늘 밤.”

소운의 목소리가 지하의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혈월교(血月敎)의 선봉대가 광풍처럼 산서를 휩쓸 거다. 천맹(天盟) 내부의 배신자가 안에서 문을 열어젖히겠지. 우리 청운문은 그날 밤,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완벽하게 멸문당할 거다.”

“……뭐라고?”

무겸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약초를 바르던 서린의 손길도 멎었다.

“장문인이신 아버지는 제자들을 지키려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가실 거고, 사제들은 차가운 마당에 시체가 되어 뒹굴겠지. 그리고 서린아, 너는…… 혈월교로 끌려가게 될 거다. 네 의지는 완전히 거세당한 채, 피에 취한 살인병기인 ‘혈월검희(血月劍姬)’가 되겠지. 정신이 망가진 채 평생을 살육의 도구로 쓰이다가 결국 비참하게 버려질 거야.”

서린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렸다. 소운의 묘사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고, 그 눈에 서린 공포는 연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사형, 형은…… 문파를 지키겠다고 가장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겠지. 하지만 형의 가슴을 꿰뚫는 건 적의 칼날이 아니라, 우리가 믿었던 자들의 배신일 거다. 형은 난도질당한 채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문을 놓지 않을 거야.”

“소운아,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무겸이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이며 일어났지만, 소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소운의 눈동자는 광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20년 동안 지옥의 밑바닥을 기어 다니며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뼛속까지 각인된 참혹한 진실을 목도한 자의 눈이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옥 같은 눈으로 다 지켜봤어.”

소운이 제 가슴을 투박하게 툭툭 쳤다.

“시체 더미 속에서 구더기와 함께 살아남아, 20년 동안 강호의 밑바닥을 개처럼 떠돌았다. 매일 밤 문파가 불타는 환영을 보며 악을 쓰다 죽었지. 그리고 비참한 최후와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정확히 5년 전인 이 마당 장작더미 앞에 서 있었다.”

정막이 마당을 짓눌렀다.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만이 비현실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칼바람이 불어와 핏빛 여명을 흩뜨렸다. 무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려 했으나, 소운의 얼굴에 서린 지독한 슬픔이 그의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회귀(回歸)……라고?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왔단 말이냐?”

서린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모든 것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고 믿었지. 하지만 인과율의 법칙은 그렇게 자비롭지 않더군.”

소운은 머릿속에서 번들거리는 천명장부를 응시했다.

“미래를 바꿀 때마다, 하늘은 내게 가혹한 빚을 청구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너희를 살리기 위해 미래의 지식을 꺼내 쓸 때마다 이 장부에 부채가 쌓였어. 그 부채가 상한선을 넘으면 내 몸이 먼저 터져 나가거나, 주변의 운명이 뒤틀려 끔찍한 재앙이 닥치지.”

소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하려 했다. 이 저주받은 빚은 나 혼자 짊어지고, 나 혼자 움직이면 끝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오산이었어. 남궁가가 움직이고, 흑련회가 마수를 뻗치고, 혈월교의 그림자가 예정보다 앞당겨지는 이 판국에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어. 그래서 너희와 빚을 나누기로 했다. 공동 장부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무겸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제정신이라면 코웃음을 칠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하지만 최근 몇 달간 소운이 보여준 기적 같은 행보들—흑풍채의 은거지를 귀신같이 찾아내고, 남회의 밀실을 털어내며 보여준 수법까지—그 모든 미스터리가 이 황당한 이야기라는 퍼즐 조각으로 완벽하게 맞춰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살리려고 이 모든 미친 짓을 감당해왔다는 거냐?”

무겸의 물음에 소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리기도 했고, 동시에 지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지.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한배를 탔다. 공동 장부로 인해 우리의 내맥과 부채가 하나로 묶였어. 내가 죽으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하고, 너희가 다치면 나 역시 버틸 수 없다. 그리고 이 부채는…… 우리가 남궁가와 흑련회, 그리고 저 혈월교를 박살 내지 않는 한 결코 줄어들지 않을 거다.”

서린은 말없이 소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피투성이가 된 손을 다시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이 소운의 차가운 심장을 적셨다. 공포와 혼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묘한 결연함과 신뢰가 차올랐다.

“바보 같은 사람.”

서린이 낮게 읊조렸다.

“그걸 왜 혼자 지고 있었어. 20년 동안 그런 지옥을 겪었다면서, 왜 또다시 혼자서 그 무게를 견디려고 했냐고. 우리가 그렇게 못미더웠어?”

“…….”

소운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찬 검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의 입가에는 평소의 가벼운 오만함이 아닌, 진짜 무인의 단단하고도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대단하신 미래의 회귀자 동생님. 네 말대로라면 우리 청운문은 5년 뒤에 아주 개죽음을 당한다는 거군?”

“그렇다. 변하지 않는다면.”

“그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무겸이 픽 웃으며 소운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비록 삼류 문파의 대사형이라지만, 내 형제 같은 사제들이 칼에 찔려 죽는 꼴을 보고 눈을 감을 만큼 마음이 넓지는 못하다. 남궁가든 혈월교든, 우리 목을 노린다면 그놈들 대가리부터 깨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느냐.”

서린 역시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갚자. 그것이 빚이든, 가혹한 운명이든.”

그 순간, 소운의 의식 속에서 천명장부가 폭풍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장부의 서책이 저절로 펼쳐지더니,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신비로운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 인과율의 거대한 변동 감지. 】

【 '혼자의 장부'에서 '공동의 장부'로 계약이 완전히 전환됩니다. 】

슈아아아——.

장부의 양옆을 가로막고 있던 불길한 붉은 선들이 안개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왼쪽의 공덕란과 오른쪽의 부채란이 세 사람의 기운과 동기화되며 새로운 문자가 황금빛으로 새겨졌다.

【 공동 장부 활성화 완료 】

- 참여자: 한소운, 진무겸, 백서린

- 현재 공덕: 15

- 현재 부채: 65 / 100 (균등 분산 적용)

- 새로운 규칙: 부채와 공덕은 이제 세 사람의 의지와 연계에 따라 함께 증감합니다. 혼자만의 희생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장부의 숫자가 변했다. 65라는 무거운 부채가 세 사람의 단전으로 균등하게 나누어 흘러 들어갔다. 소운의 어깨를 짓누르던 극심한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전신을 찢어발기던 역맥의 통증도 한결 잦아들었다. 혼자서 짊어졌을 때는 폭발 직전이었던 부채가, 세 사람이 나누어 쥐자 비로소 견디고 싸워나갈 만한 무게가 된 것이다.

【 경고: 빚을 나누었으나, 다가오는 위기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

【 다음 청구: 남궁가의 배후에 숨은 '그림자회의'의 핵심 인물을 찾아내 그들의 균열을 가속화하라. 남은 시간 168일. 】

장부의 글귀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소운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발버둥 치며 미래를 바꾸려던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은 이제 끝났다. 이제는 세 사람이 함께 강호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는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준비됐나?”

소운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었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언제든.”

무겸이 검병을 잡으며 눈을 빛냈고, 서린은 자신의 검을 뽑아 검신에 비친 핏빛 여명을 응시했다.

청운문의 낡은 마당 위로, 운명을 바꾸기 위한 세 사람의 발걸음이 첫발을 내디뎠다. 강호는 아직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작은 삼류 문파에서 시작된 이들의 빚 갚기가, 장차 중원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지각변동이 될 것임을.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당 한편에 쌓여 있던 잿더미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로 청운문의 정문이 삐걱이며 흔들렸다. 소운은 손을 꽉 쥐었다. 역맥의 반작용으로 찌릿하던 단전이 세 사람의 기운과 엉키며 안정을 찾아갔다. 공동 장부가 열린 이후 처음으로 느껴지는 기묘한 고요함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더 큰 폭풍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남궁가 놈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무겸이 검을 거두며 낮게 뇌까렸다. 간밤에 정예 자객들을 보냈음에도 청운문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음에는 삼류 문파를 상대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대세가의 진짜 저력이 움직일 터였다.

“맞아. 놈들은 우리가 화산파에 밀서를 흘려 그들의 내부를 흔들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거야. 다음 수는 훨씬 더 잔인하고 치밀하겠지.”

서린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과거 멸문의 밤에 보았던 공포 대신, 차가운 이성과 날카로운 결기가 서려 있었다. 소운은 머릿속 장부를 조용히 응시했다.

【 현재 부채: 65 / 100 (삼인 균등 분산) 】

【 남은 시간: 168일 】

다섯 달 남짓한 시간. 그 안에 남궁가의 배후인 ‘그림자회의’의 실체를 까발리고, 흑련회와 혈월교가 산서성을 향해 칼을 겨누기 전에 판 자체를 뒤엎어야 했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절망적인 싸움이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없다.”

소운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가만히 앉아서 놈들의 다음 수를 기다릴 수는 없어.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적의 심장부로.”

“어떻게 할 작정이지?”

“남궁휘 그자는 지금 낙양에서 비무대회를 주도하며 천맹의 실권을 잡으려 획책하고 있지. 그리고 그 뒤에는 천맹 내부를 좀먹는 그림자회의의 장로들이 버티고 있다. 우리가 화산파를 움직여 밀서를 흘린 건 시작에 불과해. 이제는 그들의 자금줄을 끊고, 내부의 신뢰를 완전히 박살 내야 한다.”

소운의 말에 무겸의 입가에 묘한 흥분이 서린 미소가 번졌다.

“삼류 문파의 잡역부였던 놈이 오대세가와 천맹의 판을 뒤흔들겠다는 거냐? 스케일 한번 화끈하군.”

“살려면 그 방법뿐이니까.”

소운이 피식 웃으며 허리에 낡은 철검을 찼다. 사맥체를 억지로 뚫어버린 역맥의 검은 아직 미완성이었으나, 실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은 이미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서린이 다가와 소운의 헝클어진 옷깃을 정성스럽게 바로잡아 주었다.

“위험할 거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엔 도망치지 않아. 절대로.”

서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며 소운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문의 장문인 백도현이 아직 깊은 잠에 들어 있는 본당 쪽을 향해, 세 사람은 말없이 깊은 목례를 건넸다. 문파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5년 뒤의 지옥을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해 그들은 이제 청운문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강호라는 거대한 생지옥으로 걸어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하늘 위로 붉은 해가 완전히 떠올라 중원의 대지를 찬란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장부의 숫자는 여전히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 빚을 갚아나가는 발걸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산문 밖으로 향했다. 강호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진짜 투쟁이, 비로소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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