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교차하는 업보
창백한 은빛 가면을 쓴 사내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찰나의 손짓 하나에 토굴 내부의 공간이 비틀리는 듯한 기괴한 환각이 일어났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는 단숨에 영하의 한기 속으로 침잠했고, 사방의 벽면에서는 형체 없는 기도가 파도처럼 밀려와 소운의 전신을 짓눌렀다. 그것은 단순히 내공의 깊이로 찍어 누르는 압박이 아니었다. 타인의 존재 가치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고 뭉개버리는, 사악하고도 거대한 인과(因果)의 무게였다.
‘……기파(氣波)의 근원이 다르다.’
한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질겁하며 깨물었다.
사맥체(死脈體)라는 태생적 결함을 억지로 찢어 벌리며 단전 깊숙이 우겨넣었던 내력이 거칠게 역류하고 있었다. 온몸의 경맥이 마치 젖은 수건처럼 비틀리며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골수까지 파고들었다.
천명장부의 부채가 100이라는 임계점에 도달하며 발생한 추심(推尋)의 여파는, 이미 소운 혼자의 몸뚱이로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까마득히 넘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공동 장부로 묶여 있던 동료들에게까지 이 가혹한 채무의 찌꺼기가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크윽……, 으아아아!”
진무겸이 바닥에 한쪽 손을 짚은 채 단말마와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청운문의 대사형으로서, 어떤 위기 앞에서도 든든한 바위처럼 버텨주던 그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지렁이처럼 돋아나 꿈틀대고 있었다. 전신의 미세 경맥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며, 푸른 도포 자락이 순식간에 검붉은 선혈로 물들어갔다.
“소운아……, 정신…… 차려야 한다…….”
백서린은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었으나, 그녀의 하얀 손끝은 낙엽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평생을 정통 검법의 법도 안에서 반듯하고 고결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세계의 기저를 뒤흔드는 이 인과의 역류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서린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선혈은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필사적인 의지로 자아를 붙들고 있는지를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빛 가면을 쓴 자는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붉은 빛의 장부, ‘탈명록(奪命錄)’에서 기괴하고도 불길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토굴 안을 가득 채웠다.
“스스로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비틀고 만졌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천지간의 당연한 이치. 너희가 쌓아 올린 가당치 않은 공덕과 미천한 생명의 끈은 이제 우리의 주인이신 소교주님을 향한 제물이 될 것이다.”
가면 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저승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음산한 메아리에 가까웠다. 그가 천천히 탈명록의 첫 페이지를 펼치자, 소운의 뇌리 속에 박혀 있던 천명장부가 미친 듯한 경고음을 토해내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 경고: 탈명록(奪命錄)의 강제 침식 현상 발생! 】
【 소운과 동반자들의 인과 장부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흡수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
【 긴급 대응책: 보유 중인 공덕 잔여분을 전소하여 침식을 저지하고 인과의 흐름을 역전시키십시오. (현재 공덕: 14) 】
‘공덕……! 그래, 지금은 이것뿐이다!’
소운은 타오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지식을 쥐어짜며 눈을 부릅떴다.
회귀 전,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강호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밑바닥을 전전하며 터득한 처절한 생존 감각이 본능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저 가면 자가 휘두르는 장부는 무작정 무력으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다. 저것은 타인의 ‘선택’을 가로채고 ‘업보’를 강탈하여 자신의 힘으로 치환하는 도구다.
즉, 저들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결국 타인의 것을 약탈해 쌓아 올린 허상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웃기지…… 마라.”
소운이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채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남의 공덕을 도둑질해 쌓은 모조품 같은 힘이오, 강호의 인과를 제멋대로 유린하는 잡스러운 종이 쪼가리를 든 놈이 어디서 감히 천명의 법도를 논하느냐?”
“죽어가는 쥐새끼가 입만 살았구나. 일개 잡역부 따위가 천명의 무게를 감히 입에 올리다니.”
가면 자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오른손을 내질렀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검기(劍氣)가 뱀처럼 휘어지며 뻗어 나와 소운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공기를 찢고 날아드는 그 예기(銳氣)는 삼류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화경(化境)의 문턱에 발을 들인 고수만이 보일 수 있는 파괴력이었다.
이대로 직격당한다면 목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영혼조차 온전치 못할 터였다.
하지만 소운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있는 육체적 여력이 없었다. 이미 단전은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두 다리는 만 근의 쇳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소운아! 피해라!”
“사형―!”
무겸과 서린이 동시에 절규하며 검을 들어 가로막으려 몸을 날렸다.
그러나 추심의 고통에 잠식당한 그들의 신체는 마음만큼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바로 그 절망의 순간.
위잉―!
소운의 시야 구석에 떠 있던 천명장부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백색광을 뿜어냈다.
【 보유 공덕 14를 즉시 전소합니다. 】
【 천명장부의 숨겨진 상위 권능: ‘인과 동조(因果同調)’를 일시적으로 개방합니다. 】
【 소운이 홀로 짊어졌던 부채의 무게를 주변의 동료들과 진정으로 나누는 ‘공동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
치이익―!
머릿속에서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소운 혼자의 몸으로 쏟아지던 끔찍한 고통의 압박이 마치 밀물이 빠져나가듯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고통의 양이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의 영혼이 하나의 인과율로 묶이며, 서로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견고한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었다.
진무겸의 흐릿하던 눈동자에 다시금 서늘한 생기가 돌아왔다.
백서린의 떨리던 검 끝에서는 차가운 청광(靑光)이 서리처럼 피어올랐다.
“……우린, 혼자가 아니었구나.”
무겸이 이를 악물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단전에서 청운문의 정통 내력이 폭포수처럼 다시 한번 끓어올랐다. 비록 부채의 무게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혼자서 짊어질 때의 절망감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빚이란 나누어 짊어질 때 비로소 '갚을 수 있는 것'으로 변하는 법이다.
“소사형, 저 자의 흐름이 끊겼어. 허점을 찔러!”
서린의 맑은 목소리가 토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의 파도 앞에서 떨기만 하던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비극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것을 제 손으로 깨부수기로 결심한 한 명의 검사로 각성해 있었다.
“보인다.”
소운의 입가에 옅지만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역맥 수련으로 넝마가 되었던 단전이 인과 동조의 힘으로 일시적인 안정을 찾자, 그의 눈에 가면 자의 움직임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명확하게 박혀 들어왔다. 아무리 화경의 문턱에 선 고수라 할지라도, '탈명록'이라는 타인의 인과를 빌려 쓰는 자에게는 반드시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남의 공덕을 제 몸에 억지로 우겨넣은 탓에, 거창한 초식을 시전할 때마다 왼쪽 어깨와 검의 명맥이 0.1각(刻) 동안 텅 비어버리는 맹점이 노출되었다.
“지금이다!”
소운이 대지를 박차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무겸과 서린이 좌우로 갈라져 전광석화처럼 쇄도했다.
쾅―!
토굴 전체가 거세게 진동하며 천장에서 흙더미가 비처럼 무너져 내렸다.
가면 자는 양 갈래로 몰려드는 애송이들을 비웃듯, 탈명록을 거칠게 휘두르며 암흑의 검기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가소로운 것들. 발버둥 쳐봐야 너희는 결국 빚에 짓눌려 자멸할 운명이다!”
하지만 그의 검기가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직전, 소운의 검이 정확히 그 0.1각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파공성이 고막을 찢었다.
소운의 검은 화려한 초식도, 거창한 내력의 폭발도 동반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회귀 전 20년 동안 수천 번의 실전을 거치며, 죽음의 문턱에서만 갈고 닦아온 가장 순수하고도 잔인한 '살법(殺法)'의 정수였다.
‘인과청구(因果請求)의 끝은―― 결코 너희 같은 도둑놈들의 손에 있지 않다.’
푸슉!
소운의 검끝이 가면 자의 왼쪽 어깨 혈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관통했다.
“크윽……?! 이, 이럴 수가!”
가면 자의 입에서 경악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타인의 힘을 빼앗아 강해진 자는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실질적인 통증과 피격을 망각하는 법이다. 소운은 바로 그 오만함이 만들어낸 허점을 정확히 후벼 판 것이다.
지체 없이 무겸의 중검이 가면 자의 허리를 무겁게 후려쳤고, 연이어 서린의 검세가 그의 가면 정중앙을 매섭게 가로질렀다.
챙강―!
날카로운 파편음과 함께 은빛 가면이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면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핏발이 곤두선 젊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혈월교의 수많은 정예 중에서도 손꼽히는 귀재이자, 탈명록의 하수인으로 암약하던 자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크하…… 하하하……!”
입가에서 검은 피를 울컥 쏟아내면서도, 남자는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웃어젖혔다.
“너희가 이겼다 생각하느냐? 아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위대하신 소교주님께서 직접 강호의 모든 인과를 거두어들이는 날, 이 청운문 따위는 하룻밤의 재로 화할 것이다. 장부를 쥔 자여, 네가 갚아야 할 빚은 이제 겨우 첫 이자가 매겨졌을 뿐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남자의 몸에서 진득한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형체가 거짓말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탈명록의 권능을 이용한 강제 회수 술법이었다.
쾅, 쿠구구궁―!
우두머리의 기운이 사라지자, 한계를 버티던 토굴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탈출해야 한다! 서둘러!”
무겸이 소리치며 양옆에 있던 소운과 서린의 팔을 낚아챘다.
세 사람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암석 파편들을 피해, 멀리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드는 입구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폐부가 터져 나갈 듯한 고통 끝에,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고도 눈부신 새벽의 햇살이 세 사람의 얼굴을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터엉!
토굴을 간신히 빠져나온 세 사람이 낙양 외곽의 푸른 풀밭 위로 거칠게 나뒹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밤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선명한 붉은 여명이 대지를 축복하듯 물들이고 있었다.
소운은 차가운 흙바닥에 손을 짚은 채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온몸의 뼈마디가 잘게 부서진 것처럼 비명 같은 통증을 내질렀지만, 머릿속을 괴롭히던 기괴한 경고음과 추심의 압박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소운의 의식 속에서 천명장부가 조용히 떠올라 황금빛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 부채 상환 완료: 100 → 42 / 100 】
【 공덕 12 획득 (탈명록의 하수인을 퇴치한 성과) 】
【 차기 청구 임무: 흑련회와 남궁가의 음모를 완전히 분쇄하고, 청운문의 방어선을 난공불락으로 구축하십시오. (남은 시간: 180일) 】
소운은 장부에 표기된 수치를 확인하고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임계점을 넘어 파멸 직전까지 갔던 부채는, 동료들과 인과를 나누고 목숨을 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덕분에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혼자서 모든 고통과 책임을 짊어지려 했던 회귀 초기의 방식으로는 이미 한계에 부딪혔음을, 그리고 함께함으로써 더 큰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소운아.”
옆에 대자로 누워 있던 진무겸이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도포는 이미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깊어져 있었다.
“이거 원, 앞으로 너 혼자서 비밀을 품고 위험한 곳에 뛰어들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내 경맥이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기분이 어땠는지 짐작도 못 할 거다.”
백서린 역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소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술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한 결연함과 함께 소운을 향한 깊은 신뢰가 서려 있었다.
“맞아. 사형 말이 백번 옳아, 소운아. 너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지 마. 우리에겐 이제 '공동 장부'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생겼잖아?”
소운은 두 동료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 번갈아 바라보았다.
회귀 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은 낙양 비무대회 직후 하룻밤 사이에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어 소운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의 운명을 비틀고 소운의 곁에 당당한 전우로 서 있었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하늘에 진 빚이 피할 수 없는 업보라면, 함께 손을 맞잡고 갚아나가면 그뿐이다.
소운이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청광이 새벽녘의 여명과 어우러져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래. 갈 길이 멀다.”
낙양의 화려하고도 잔인했던 비무대회는 이것으로 막을 내렸고, 이제 진짜 강호의 풍랑이 시작될 터였다. 5년 뒤에 예정된 문파의 멸문을 막기 위한 거대한 반격의 서막이, 붉은 새벽빛 아래에서 드디어 열리고 있었다.
“자, 가자. 우리의 집으로.”
한소운의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음성과 함께 세 사람의 시선이 산서성을 향하는 북쪽 하늘로 향했다. 낙양의 거친 풍진을 뒤로한 채, 그들은 비장한 각오를 품고 청운문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은 결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혈월교의 본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천맹 내부의 그림자 세력이 암약하는 한, 5년이라는 시한폭탄의 시곗바늘은 이미 정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고요했으나, 대기를 감도는 공기 중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소운은 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에 떠오른 천명장부를 조용히 응시했다.
【 부채 42 / 100 】
【 공덕 12 획득 】
【 청구 임무: 청운문 방어선 구축 (잔여 180일) 】
부채의 수치는 줄어들었지만, 장부가 제시한 다음 과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단순한 문파의 채무를 갚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문파 자체를 거대한 사파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요새화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사맥체를 극복하기 위한 역맥 수련 역시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단전 부근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소운은 내력을 고르게 분산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던 비겁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진무겸과 백서린의 단단하고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를 느낄 때마다, 소운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비록 하늘은 그들에게 무거운 인과의 빚을 지우고 쉼 없이 가혹한 이자를 청구하겠지만, 더 이상 그 빚은 소운 한 사람의 어깨만을 짓누르는 고독한 형벌이 아니었다.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마침내 산서성의 험준하고 웅장한 산세가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안개에 싸인 청운문의 낡고 정겨운 산문(山門)이 옛 모습 그대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회귀 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비참한 통곡 소리만 가득했던 그 기억 속의 장소가, 지금은 평화롭게 아침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치익―.
문득, 소운의 시야 구석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미세한 진동과 함께 빛을 냈다.
【 인과율의 파장이 일시적 안정세에 진입했습니다. 】
【 산서 방어선의 첫 번째 준비 단계, ‘지맥 동조’가 개방됩니다. 】
“소사형, 정말 다 왔어. 우리 문파야.”
서린의 감격 어린 목소리에 소운은 상념을 털어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문의 낡은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는 세 사람의 눈빛에는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 진 빚은 날카로운 검으로 갚고, 다가오는 멸문의 운명은 서로의 손을 잡고 부수어버린다.
청운문을 지키고, 나아가 강호의 뒤틀린 인과를 바로잡기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