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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12화목차

12장 그림자의 숨통

파앗―!

꺼진 촛불의 잔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 밀실의 어둠을 찢고 들어온 것은 형형하게 번뜩이는 은빛 섬광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예기(銳氣)를 넘어선 고밀도의 살의였다. 오대세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남궁세가, 그 가문의 정화(精華)라 불리는 ‘오기귀원검법(五氣歸元劍法)’이 비좁은 밀실 안에서 폭발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섯 갈래의 날카로운 기운은 제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분쇄했다. 소운의 목덜미와 심장, 그리고 퇴로를 차단하려는 듯 양 팔다리를 향해 동서남북에서 쇄도해 들어오는 검세는 가히 절망적이었다.

‘빠르다!’

회귀 전의 기억 속에서 남궁휘는 젊은 세대 중 단연 돋보이는 고수였다. 하지만 직접 생사를 다투며 마주한 그의 검세는 기억보다 훨씬 치명적이었고, 그 궤적은 더욱 집요했다. 만약 소운이 사맥체를 뚫고 역맥 수련을 통해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챙―! 챙랑!

찰나의 순간, 소운의 옆을 지키던 진무겸의 대도가 번뜩였다.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대도가 남궁휘의 검세를 가로막았다. 단단한 철판을 정면으로 내리치는 듯한 충격음이 밀실의 좁은 공간을 진동시켰고, 벽면의 목재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크윽……!”

진무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남궁휘가 쏟아낸 내력의 깊이는 진무겸보다 최소 한 수 이상 위였다. 오대세가의 막대한 자양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자란 천재 귀공자의 실력은 결코 허황된 명성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진무겸의 내장은 뒤틀리고 경맥은 요동쳤다.

하지만 진무겸이 자신의 기혈을 깎아 먹으며 벌어준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승부처였다.

“대사형, 비켜!”

소운이 주저 없이 진무겸의 어깨를 밀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소운의 손에는 방금 전 서안 위에서 낚아챈 붉은 표지의 명부가 들려 있었다. 천맹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청죽헌에서 기밀을 탈취한 행위. 이것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었다. 중원 무림의 권력 지도를 뿌리째 뒤흔들고, 가려진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거대한 폭탄을 손에 쥔 것과 다름없었다.

두둥―!

그 순간, 소운의 머릿속에서 천명장부가 붉은빛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망막을 어지럽히는 선연한 핏빛 글자들이 떠올랐다.

【 부채 46 / 100 】

【 경고: 천맹의 심장부에서 기밀 명부를 탈취하여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비틀었습니다. 인과 변동의 파장이 증폭됩니다. 】

【 부채 +18 → 현재 부채 64 / 100 】

“크아아악……!”

목구멍까지 치솟는 뜨거운 혈기(血氣)를 소운은 어금니를 악물며 억지로 삼켰다. 부채 수치가 60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온몸의 경맥을 수만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끔찍한 추심(推尋)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맥체를 억지로 열어젖힌 단전이 찢어질 듯 아려왔고, 뇌장까지 울리는 통증에 눈앞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등 뒤에 있는 서린과 무겸까지 모두 남궁휘의 검 아래 목숨을 잃을 것이 자명했다.

“네놈……! 그 명부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감히 그것에 손을 대고도 살아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서슬 퍼런 살기를 띤 남궁휘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명부가 탈취당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이 공들여 준비한 은밀한 음모가 이름조차 없는 삼류 문파의 잡역부 따위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이성 잃은 야수처럼 만들었다.

남궁휘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단순한 견제가 아닌, 상대를 반드시 도륙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필살의 일격이었다. 밀실의 벽면이 갈라지고, 부서진 목재 파편들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난타검(亂打劍)이 전개되었다.

“서린아, 지금이다!”

소운의 외침과 동시에, 백서린의 청강검이 청아한 광채를 발하며 튀어나왔다. 그것은 소운이 미리 일러준 남궁휘 검법의 유일한 허점, 즉 검세가 전환되는 찰나에 발생하는 미세한 기운의 단절을 노린 일격이었다.

챙기기긱!

서린의 검끝이 남궁휘의 검신을 정확히 비껴쳤다. 그녀의 재능은 본래 혈월교에 끌려가 '혈월검희'로 타락하여 중원을 공포에 떨게 할 만큼 비상한 것이었다. 소운의 예리한 지시와 역맥 수련의 기초가 더해지자, 삼류 문파의 검법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날카로운 궤적이 그려졌다.

남궁휘의 검세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명문의 검에 균열이 생긴 바로 그 순간을 소운은 놓치지 않았다.

“여긴 너희 같은 위선자들이 놀이터로 쓸 곳이 아니다.”

소운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석회 가루를 남궁휘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명문의 고수라면 상상도 못 할, 지극히 야비하고도 실전적인 하수(下手)의 수법이었다.

“비겁한 놈이……!”

남궁휘가 황급히 검을 거두며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미세한 백색 가루가 그의 눈가에 흩뿌려진 뒤였다. 시야가 가려진 남궁휘가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며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으나, 소운과 동료들의 발은 이미 밀실의 출구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쫓아라!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마라! 당장 사로잡아라!”

밀실 밖 복도에서 남궁가의 사병들과 청죽헌을 수호하던 고수들의 고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정적이 감돌던 별채 전체가 일순간에 벌집을 건드린 듯 발칵 뒤집혔다.

“이쪽이야, 서둘러!”

별채의 어두운 회랑 모퉁이에서 독고염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그녀는 이미 퇴로로 예정된 하수도 철창을 미리 해체해 둔 상태였다.

세 사람은 독고염의 안내에 따라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어두운 지하 배수구 속으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남궁휘의 살기 어린 검풍이 그들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바닥을 박살 냈지만, 이미 그들의 잔상조차 잡기에는 한 발 늦은 뒤였다.

낙양성 외곽, 인적이 끊긴 버려진 토굴.

축축한 흙냄새와 이끼 낀 벽면의 냉기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세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진무겸은 옆구리에 입은 자상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백서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소운의 안색을 살폈다. 독고염은 손에 쥔 횃불을 토굴 벽에 고정하며 혀를 내둘렀다.

“너희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남궁가의 본산 한복판을 뒤집어엎고 이렇게 살아 돌아올 줄이야. 그래, 가장 중요한 물건은 확실히 챙긴 거겠지?”

소운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핏자국이 점점이 박힌 붉은 표지의 명부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에 있습니다.”

독고염이 조심스럽게 명부를 집어 들고 첫 장을 넘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경악으로 커지더니 이내 깊은 공포로 물들었다.

“이…… 이걸 정말 손에 넣었단 말이야? 칠대문파 장로들의 비밀 회동 명부와 사파 연합인 흑련회와의 자금 거래 내역…… 미쳤어. 이건 단순한 증거가 아니야. 이거 하나면 천맹 전체가 아니라 중원 무림 자체가 뿌리째 뒤집히고도 남을 폭탄이야.”

독고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정보 상인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음모와 기밀을 보아왔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폭발력을 가진 문서는 그녀의 생애 처음이었다.

진무겸이 이를 악물며 소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배신감 섞인 분노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소운아. 네가 말했던 5년 뒤의 멸문, 그리고 천맹 내부의 배신자들……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이었어. 이 명부에 적힌 이름들을 봐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던 문파의 장로들도 포함되어 있어.”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썩어 있었습니다.”

소운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역맥 수련의 여파로 인한 통증이 아직도 전신을 타고 흘렀고, 머릿속의 장부는 끊임없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 부채 64 / 100 】

【 경고: 상한선(100)을 향해 부채가 빠르게 누적되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추가적인 인과 개변을 일으킬 경우, 술자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 치명적인 추심의 파장이 전가될 수 있습니다. 】

64.

회귀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였다. 혼자서 미래의 흐름을 강제로 바꾸고, 천기(天機)에 가까운 증거를 탈취한 대가는 가혹했다. 단전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며 장부를 찢으려 들었고, 가슴속은 마치 인두로 지지는 듯한 작열감이 이어졌다.

“소운, 너 피가……!”

서린이 소운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혈흔을 발견하고는 경악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소운의 손목을 잡았다. 서린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소운의 맥동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불안정했다.

“소리 내지 마십시오.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버티긴 뭘 버틴다는 거야! 네 몸 꼴을 좀 봐. 온몸이 진땀으로 범벅이고 맥박은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아. 이게 네가 말한…… 그 장부라는 것 때문이야? 왜 혼자서 이런 괴로운 일을 감당하는 건데!”

서린의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운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홀로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외로움을 짊어지고 있는지.

소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짊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일 뿐입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쿠웅――!

토굴의 입구 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대지를 두드리는 듯한 둔탁하고도 위압적인 진동이 울려 퍼졌다.

독고염이 황급히 토굴 입구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바깥을 살폈다.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너머를 응시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이상해…… 이건 남궁가의 사병들이 아니야. 이 기운은…… 전혀 달라!”

토굴 밖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된 듯 얼어붙었다. 밤바람을 타고 스며든 것은 평범한 무인의 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물의 생명력을 억지로 쥐어짜 얼려버리는 듯한, 기괴하고도 음산한 피의 기운이었다.

서린과 진무겸도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검을 뽑아 들고 일어섰다. 토굴 입구의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척, 척 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스읍…… 하아……

마치 거대한 뱀이 혀를 굴리며 먹잇감을 찾는 듯한 기분 나쁜 호흡 소리와 함께, 어둠을 찢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핏빛 연꽃 문양.

혈월교(血月敎).

원래의 역사라면 5년 뒤에야 산서성을 피로 물들이며 정식으로 출현했어야 할 마교의 선봉대가,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 낙양의 외곽, 그들이 숨어 있는 토굴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소운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올랐다.

‘어째서지? 우리가 명부를 빼돌린 것과 혈월교가 움직이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기에…… 아니, 설마?’

머릿속에서 천명장부가 붉은 경고등처럼 번쩍이며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갔다.

【 부채 64 / 100 】

【 경고: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너무 많이 앞당겼습니다. 당신이 바꾼 미래의 파장이 마교의 눈을 예상보다 일찍 뜨게 만들었습니다. 인과의 사슬이 엉켜 들고 있습니다. 】

【 긴급 청구: 사흘을 버텨라. 그렇지 않으면 낙양은 오늘 밤 피의 바다가 될 것이다. 】

장부의 글자가 시리도록 붉은 빛으로 깜빡였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 가운데 가장 앞선 이가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칼자국과 함께, 광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토굴 안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쥐새끼들처럼 구멍 속에 숨어봤자 소용없다. 천맹의 명부와…… 그 역천자(逆天者)의 목을 내놔라. 그러면 나머지 벌레들은 고통 없이 죽여주마.”

소운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역맥 수련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단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전신의 뼈가 삐걱거렸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빛났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갚아나갈 뿐이다.

“물러서지 마라.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소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토굴 안의 동료들에게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의 검이 동시에 달빛을 받아 차가운 은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도망칠 곳은 없다, 가련한 애송이들!”

혈월교 선봉대의 선두에 선 흉터 남자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토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손에 들린 기괴한 대환도(大環刀)가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칼날이 암반을 스칠 때마다 단단한 돌덩어리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보통의 삼류 무인이라면 그 압도적인 살기만으로도 심장이 멎었을 터였다.

“물러서지 마라!”

진무겸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선봉대의 앞길을 차단했다. 쾅― 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진무겸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지켰다.

그 틈을 놓칠 서린이 아니었다.

“비켜라, 마물아!”

백서린의 검이 청광을 품고 흉터 남자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삼류 문파의 검법이라 믿을 수 없는 매끄럽고 신속한 궤적이었다. 흉터 남자가 급히 도를 들어 막아냈으나, 서린의 검끝이 그의 로브를 스치며 선연한 핏방울을 튀겼다.

“이 계집이……!”

남자가 분노하여 도를 내리치려는 순간, 소운이 그들의 사이로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역맥으로 억지로 열어젖힌 단전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지만, 소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났다.

‘보인다.’

혈월교 선봉대의 초식은 화려하고 강맹하지만, 무리하게 기를 끌어올린 탓에 발목과 허리에 치명적인 사각이 존재했다. 회귀 전, 20년 동안 강호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수많은 마교 잔당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얻은 처절한 지식이었다.

팍―!

소운의 검이 남자의 발목 혈도를 정확히 찔렀다.

“크윽?!”

중심을 잃은 흉터 남자가 비틀거렸고,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진무겸과 서린의 검이 동시에 그의 가슴과 목을 향해 쇄도했다.

푸슉!

선봉대를 이끌던 우두머리의 목이 허공으로 높게 치솟았다. 단숨에 우두머리를 잃은 혈월교 무리들이 일제히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마교의 잔인함도 예상치 못한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소운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 대신 깊은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의 천명장부가 이제껏 본 적 없는 광포한 진동을 일으키며 울부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 부채 64 / 100 】

【 경고: 혈월교의 선봉대를 예정보다 조기에 도륙하는 행위는 감당할 수 없는 인과를 낳습니다. 상한선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

【 추심 발동: 64 → 100 초과. 감당할 수 없는 빚의 무게가 주변으로 전가됩니다. 】

“아……!”

소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단전이 완전히 박살 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덮쳤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크흑……! 몸이, 내 몸이……!”

옆에서 싸우던 진무겸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온몸의 경맥에서 핏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운아…… 아악!”

서린 역시 가슴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소운이 홀로 짊어져야 할 부채의 찌꺼기가 '공동 장부'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을 타고 동료들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가된 것이다.

“안 돼…… 제발, 안 돼!”

소운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모두가 자신 때문에 죽는다. 자신의 욕심이, 자신의 복수가 소중한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때, 토굴 입구의 어둠 속에서 차갑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 장부를 쥔 자답군. 하지만 그 빚은 네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은 혈월교의 평범한 신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백한 안색에 기괴한 은빛 가면을 쓴 자였다. 그의 손에는 소운의 것과 형태는 닮았으나, 기분 나쁜 검붉은 빛을 내뿜는 또 하나의 장부가 들려 있었다.

탈명록(奪命錄).

미래를 바꾸어 빚을 지는 소운의 장부와 달리, 타인의 공덕과 생명력을 강탈하여 힘을 기르는 사마령의 수하이자, 또 다른 금단(禁斷)의 힘을 지배하는 자였다.

가면을 쓴 자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하자, 토굴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소운과 동료들을 향해 거대한 압박이 폭풍처럼 내리눌렀다.

절체절명의 순간, 소운은 찢어지는 단전을 붙잡고 피 묻은 검을 다시 겨누었다.

“……끝까지 가보자.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빛과 어둠, 빚과 찬탈의 거대한 충돌이 시작되는 새벽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운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투기와 함께,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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