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비무대회 예선과 그림자의 밀실
낙양의 밤은 중원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화려하고 잔인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금가루를 대지 위에 흩뿌려 놓은 듯, 천맹의 총본산이 위치한 내성 주변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기세 좋게 타올랐다. 각지에서 몰려든 군웅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명문세가의 비단 마차들이 돌길을 울리는 소리가 한데 섞여 거대한 소음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끝, 삼류 문파인 청운문의 제자들이 머무는 낡은 객관의 방 안은 얼음장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독고염, 그 아이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
정적을 깨고 진무겸이 낮게 읊조렸다. 그는 불안한 듯 팔짱을 낀 채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응시했다. 그것은 흑풍채의 우두머리 왕도현에게서 빼앗은, 검은 쇳조각에 기묘한 연꽃 문양이 새겨진 밀패였다. 등잔불의 일렁임에 따라 밀패 위의 연꽃은 마치 살아 꿈동이치는 뱀처럼 섬뜩한 기운을 뿜어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입니다. 장사치들에게 신용이란 곧 다음 장사를 위한 밑천이지요. 게다가 그 아이 역시 흑련회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혼자 감당하기 벅찬 판이라는 걸 알면, 우리 같은 말들을 이용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했겠지요.”
소운의 대답은 차분했으나, 그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역맥 수련의 후유증이 시시때때로 전신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억지로 확장시킨 경맥의 벽마다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단전 깊은 곳에서는 불길과 얼음물이 번갈아 치솟는 듯한 환각이 느껴졌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보이지 않게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백서린이 자신의 애검인 청풍검의 검신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잠입하는 길을 알아내는 건 둘째 치고, 연회장에 발을 들인 뒤가 문제야. 오대세가와 칠대문파의 고수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곳이잖아. 그들의 감시망을 뚫고 배신자의 명부를 훔친다니. 만약 장문인급 고수들에게 꼬리라도 밟히는 날엔, 우리는 해명할 기회도 없이 사파의 밀정으로 몰려 목이 달아날 거야. 청운문의 이름은 영원히 무림의 수치로 남겠지.”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가 해야 합니다. 대놓고 도둑질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요.”
소운이 타오르는 등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림자회의의 하수인들은 이미 천맹의 혈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치밀하고 영악해서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기록을 웬만해서는 남기지 않지요. 하지만 권력이 움직이고 이권이 오가는 곳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남궁휘 같은 자들이 사파와 밀약을 맺고, 서로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서명한 장부가 바로 오늘 밤의 연회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그곳에 치부를 보관해 두었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소운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몸 안의 기운이 꼬이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통증은 그가 미래를 비틀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동시에 그가 짊어진 인과의 무게였다.
바스락―.
그때, 창호지 문 너머에서 가을바람보다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신형이 일제히 굳어졌다. 진무겸의 손이 본능적으로 검병을 움켜쥐는 순간, 문 밖에서 익살스러우면서도 날이 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문 좀 열어보게나. 장사치 눈에는 돈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먼저 들어오는 법이라네. 이 밤중에 살기를 그렇게 뿌려대면 손님이 무서워서 가겠나?”
독고염이었다. 서린이 서둘러 문을 열자, 밤바람을 등에 업은 독고염이 미끄러지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야행복 차림이었음에도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는 묵직한 양피지 두루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정보상 노릇도 참 고달프군. 너희가 무슨 불장난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이건 정말이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독고염은 제 집 안방인 양 탁자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위에는 낙양 내성 북동쪽,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한 ‘청죽헌’의 상세한 구조도가 그려져 있었다. 건물의 배치부터 보초의 이동 경로, 심지어 담벼락의 높이까지 세밀하게 기록된 지도였다.
“오늘 밤 천맹의 실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일 장소야. 정문은 오대세가에서 차출된 정예 무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지. 삼류 문파의 풋내기들은 근처에 얼씬거리기도 전에 발길질을 당할 거다. 하지만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도 쥐구멍은 있는 법이지.”
독고염의 손가락이 청죽헌 후미진 곳의 지저분한 배수로를 짚었다.
“이곳, 하수를 통해 주방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어. 흑련회 잔당들이 눈을 피해 술이나 고기를 밀반입할 때 쓰는 길이지. 너희가 가진 그 밀패를 보여주면, 거기 지키고 있는 놈들은 윗선에서 보낸 심부름꾼인 줄 알고 눈을 감아줄 거다.”
“위험 요소는 없는 건가?”
진무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독고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위험하지 않다면 그게 어디 잠입이겠어? 명심해. 거길 지나 안쪽 별채로 향할 수 있는 시간은 딱 십 분뿐이야. 밤 두 시, 보초들이 교대하며 정신이 팔리는 그 찰나의 시간. 그 안에 명부를 찾아 나오지 못하면 너희는 천맹의 수천 명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고슴도치 신세가 될 거다. 어때, 그래도 갈 텐가?”
독고염의 서늘한 경고에 방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운은 두루마리 위의 지도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머릿속에 각인된 미래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냈다. 원래의 역사에서 이 연회는 천맹 내부의 권력 구조가 남궁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발점이었다. 그 과정에서 청운문 같은 변방의 문파들은 장기판의 졸처럼 이용당하다가 가차 없이 버려졌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들이 짜놓은 판을 내가 먼저 걷어차 주마.’
소운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 밤, 움직입니다.”
이른 새벽, 낙양성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비무 투기장.
아직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이었지만, 투기장 주변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천맹 청년 비무대회 예선전의 열기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단숨에 달궈버릴 만큼 뜨거웠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무림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지하는 문파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다음 대결! 산서 청운문, 한소운 대 하북 철검문, 공손찬!”
심판의 우렁찬 외침이 투기장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이름이 불리자마자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운문? 산서 구석에 박혀서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삼류 문파 말인가?”
“저 녀석 꼴 좀 봐. 검법은커녕 빗자루질이나 잘하게 생겼는데? 예선에 보낼 제자가 없어서 잡역부를 끌고 나온 모양이군.”
“철검문의 공손찬이라면 이미 소성 후반의 내공을 쌓은 수재인데, 저 불쌍한 놈은 오늘 제 발로 걸어 나가긴 글렀군.”
조롱과 멸시가 섞인 시선들이 소운의 가냘픈 체구에 쏟아졌다. 그러나 소운은 요동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귀빈석 상단에 앉아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궁휘. 금실로 수놓인 화려한 관복을 입고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눈빛은 마치 하찮은 벌레의 죽음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잔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진무겸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소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운아, 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상대인 공손찬은 철검문의 파산검법을 익혀 그 위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만약 형세가 불리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기권해라. 네 몸이 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걱정 마십시오, 대사형.”
소운은 가볍게 어깨를 풀며 허리춤의 철검을 뽑아 들었다. 챙그랑, 투명하고 차가운 쇳소리가 투기장의 바닥을 긁으며 퍼져나갔다.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는 5년 뒤에 마주할 그 지옥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보여줘야지요. 삼류 문파의 잡역부라고 불리는 자가 어떤 검을 쥐고 있는지 말입니다.”
소운이 느릿하지만 단단한 걸음걸이로 투기장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상대인 공손찬은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철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소운을 비웃었다.
“이름도 없는 잡것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네놈 같은 놈을 상대로 검을 뽑는 것 자체가 내 검에 대한 모독이다. 단 한 초다. 단 한 초 만에 네놈의 뼈를 가루로 만들어주마.”
공손찬의 몸에서 거친 내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투기장 바닥의 흙먼지가 그의 기세에 밀려 사방으로 비산했다. 확실히 삼류 문파의 수준을 뛰어넘은 실력자였다. 관중들은 이미 공손찬의 승리를 확신한 듯 환호성을 질렀다.
심판이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내리쳤다.
“시작!”
쿠웅―!
공손찬이 거대한 발을 내디디며 폭발적으로 쇄도했다. 그의 철검이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소운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파산검법의 절초, ‘태산압정(泰山壓頂)’. 단숨에 상대의 방어막을 으깨고 생명을 앗아가는 무식하면서도 파괴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안광이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맥 수련으로 억지로 비틀어 연 경맥들이 비명을 지르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보인다. 미래의 기억이 가르쳐준 너의 허점, 그리고 장부가 허락한 인과의 틈새가.’
공손찬의 검이 소운의 머리 위를 덮치기 직전, 소운의 신형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그것은 정석적인 보법이 아니었다. 관절이 어긋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몸을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어 찰나의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슈우욱―!
날카로운 검풍이 소운의 옷자락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공손찬의 눈이 경악으로 뒤덮였다.
‘말도 안 돼! 이 거리를 피했다고?’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귀신처럼 공손찬의 품 안으로 파고든 소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운의 철검에는 화려한 초식도, 거창한 내력의 흐름도 없었다. 오직 살수들의 움직임에서 따온, 상대의 생명줄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끊어내는 역맥검의 정수만이 담겨 있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정적을 깼다. 소운의 검등이 공손찬의 명치를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거구의 사내는 숨을 들이켜지도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뒤로 넘어갔다. 콰아앙! 먼지 구름이 일며 투기장이 거대한 침묵에 잠겼다.
비웃음을 흘리던 관중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철검문의 유망주가, 이름 없는 삼류 문파의 잡역부에게 단 한 번의 교전 끝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심판조차 당황하여 깃발을 드는 것을 잊었다가, 뒤늦게 더듬거리며 외쳤다.
“……승자, 청운문 한소운!”
환호 대신 미묘하고도 무거운 정적이 투기장을 메웠다. 진무겸과 서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격 어린 시선으로 소운을 바라보았고, 귀빈석의 남궁휘는 자신이 들고 있던 옥 술잔을 우지끈 소리가 나도록 부숴버렸다.
소운은 차가운 시선으로 남궁휘를 잠시 응시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었다. 그 순간, 그의 시야 앞에 은빛 문구가 어지럽게 명멸했다.
【 부채 잔액 46 / 100 】
【 공덕 +4 획득 】
【 새로운 청구: 비무대회 승리로 인한 파장을 이용해, 오늘 밤 청죽헌의 비밀 연회에 잠입하여 ‘배신자 명부’를 확보하라. 실패 시 인과의 빚은 파멸로 돌아온다. (잔여 시간: 14시간) 】
부채의 수치는 조금 줄어들었으나, 장부가 요구하는 대가는 갈수록 가혹해지고 있었다. 소운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투기장을 내려왔다. 진짜 지옥은 해가 진 뒤에 시작될 것이었다.
밤의 낙양은 낮보다 더욱 기괴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청죽헌 주변은 오대세가와 칠대문파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무거운 내력이 공기 중에 엉겨 붙어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정문 앞에 도열한 무사들의 눈빛은 서늘했고, 담벼락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들이 쉴 새 없이 사방을 훑고 있었다.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야.”
어둠이 짙게 깔린 청죽헌 외곽 골목에서 독고염이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낮춘 채 앞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배수구 말이야. 흑련회 놈들이 금지된 물품을 들여올 때 쓰는 유일한 구멍이지. 보초들이 교대하는 십 분 동안 저 철창이 잠시 열릴 거다.”
진무겸이 코를 찌르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시커먼 물속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냄새도 문제지만, 안에서 매복이라도 있으면 끝장이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는 이 밀패가 있습니다.”
소운이 품 안에서 흑련회의 밀패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독약이 묻은 비수와 같았다. 잘 쓰면 문을 여는 열쇠가 되겠지만, 잘못하면 자신들의 목을 베는 칼날이 될 터였다.
서린이 소운의 소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그녀의 손등은 긴장으로 인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운아, 정말로 괜찮을까? 만약 명부가 그곳에 없거나, 우리가 들키기라도 하면……”
“명부는 반드시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키지 않을 겁니다.”
소운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확신에 차 있었다. 미래의 기억은 틀리지 않는다. 이 연회는 배신자들의 축제였고, 그 축제의 중심에는 반드시 그들의 결속을 증명할 기록이 존재한다.
멀리서 야경꾼의 북소리가 두 번 울렸다. 교대 시간이었다.
“지금이다!”
독고염의 신호와 함께 소운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그는 소리 없이 배수구의 오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갑고 끈적한 물이 전신을 감쌌고, 역겨운 악취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진무겸과 서린이 그 뒤를 따랐고, 독고염은 바깥에 남아 퇴로를 살피기로 했다.
어둡고 축축한 하수도를 지나, 주방의 은밀한 뒷문을 통해 청죽헌 내부로 잠입한 세 사람은 그림자처럼 벽에 밀착하여 움직였다. 명문세가의 별채답게 내부의 복도는 화려하면서도 엄숙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수들의 발소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압박이 되어 심장을 조여왔다.
‘조금만 더……’
소운은 머릿속에 그려진 구조도를 바탕으로 별채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역맥 수련으로 예민해진 감각은 공기의 미세한 흐름조차 포착해냈다. 마침내 그들은 굳게 닫힌 삼나무 문 앞에 닿았다. 문 너머에서 익숙하면서도 가증스러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천맹 내부의 인선은 정리가 끝났는가?”
“물론입니다. 칠대문파의 장로들 중 절반 이상이 이미 우리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5년 뒤, 그날이 오면 천맹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남궁휘의 목소리였다. 권력에 취한 그 오만한 음성을 듣는 순간, 소운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소운은 온몸의 내력을 손끝에 집중하여, 경첩 소리 하나 나지 않게 문을 밀어 열었다.
밀실 안, 은은한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서안 위에는 대륙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붉은 표지의 명부가 놓여 있었다. 소운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가 손을 뻗는 찰나, 머릿속에서 귀를 찢는 듯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 부채 잔액 46 / 100 】
【 경고: 천맹의 핵심 기밀을 탈취하는 행위는 인과의 흐름을 거대한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 행위입니다. 인과의 파장이 임계치에 도달합니다! 】
소운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명부를 낚아채 품 안에 갈무리했다.
파앗―!
명부를 집어 든 것과 동시에, 밀실을 밝히던 촛불들이 마치 누군가 입으로 불어 끈 듯 일제히 꺼지며 완전한 암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을 가르며, 목숨을 앗아갈 듯 날카로운 검풍이 소운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어떤 쥐새끼냐!”
남궁휘의 분노 서린 함성이 밀실을 뒤흔들었다. 박살 난 문 밖에서 쏟아지는 달빛 아래, 거대한 살기가 세 사람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판은 깨졌다. 빚은 이제 폭발적인 기세로 청구되기 시작했다. 청운문의 운명을 건 사투는, 이제야 비로소 막을 올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