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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10화목차

10장 예선의 사내

중원의 심장이라 불리는 낙양(洛陽)의 밤은, 그 화려한 등불의 수만큼이나 짙고 무거운 어둠을 품고 있었다. 천맹(天盟)의 본거지가 위치한 이곳은 명실상부한 무림의 정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나, 동시에 그들의 욕망과 암투가 거미줄처럼 뒤엉킨 거대한 늪이기도 했다. 오대세가와 칠대문파의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대가관(大客館)들의 풍경은 장관이었으나, 그 이면에서 산서성 변방의 삼류 문파, 청운문의 도복을 입은 세 남녀가 설 자리는 좁고 위태로웠다.

객관의 비좁은 방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달빛만이 방 안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한소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피부 밑으로는 마치 수천 마리의 불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혈관의 뒤틀림이 선명하게 비쳤다.

“으으윽……!”

소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이 정상적인 경맥을 무시하고, 역맥(逆脈)을 따라 거꾸로 치솟고 있었다. 억지로 길을 내는 고통은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지독했다. 그것은 회귀라는 기적의 대가이자, 사맥체(死脈體)라는 저주받은 육신을 강제로 가동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소운아, 무리하지 마라! 기혈이 뒤집히면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어!”

진무겸이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그는 소운의 어깨를 짚어 진기라도 불어넣으려 했으나, 소운은 떨리는 손을 들어 이를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대사형…… 경맥이 찢어지는 듯한 이 통증이…… 제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니까요.”

소운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핏발이 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그 너머의 안광은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 구석에서 불안한 눈초리로 상황을 지켜보던 백서린이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넸다. 그녀의 손끝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궁휘를 너무 자극했어, 소운아. 그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남궁가의 차남이야. 천맹 내부에서도 실권을 쥐고 있는 '그림자 회의'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고 해도, 대낮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어.”

서린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질책이 뒤섞여 있었다. 소운은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타오르는 목구멍을 가라앉히며 낮게 읊조렸다.

“그럼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저들이 우리를 살려두었을 것 같습니까?”

그의 시선이 서린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원래 역사에서…… 아니, 제가 보았던 그 비극 속에서 청운문은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고, 누가 우리 목을 쳤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적의 정체를 알고, 그들의 심장부가 어디인지 압니다. 우리가 먼저 칼을 뽑지 않으면, 저들의 칼날이 우리 목을 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짓밟힐 뿐입니다. 공포를 심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줘야 한다고요.”

서린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운이 스스로를 망가뜨려 가며 역맥을 수련하고, 미래의 지식을 꺼내어 흑풍채를 궤멸시킨 것은 모두 다가올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낮, 남궁휘의 위선을 꿰뚫어 보며 던진 일갈은 필연적으로 상대의 경계를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그것은 곧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 순간, 소운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서늘한 기운과 함께 시야 구석에 기괴한 붉은 글자들이 떠올랐다. 천명장부(天命帳簿)의 비정한 기록이었다.

【 인과의 파동이 감지됩니다. 남궁휘의 의심이 깊어지며 운명의 실타래가 거칠게 엉킵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53 / 100 】

【 청구: 내일 열리는 천맹 청년 비무대회 예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라. 남궁가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고 너의 존재를 각인시켜라. 】

숫자는 53.

철검협에서의 전투 이후 51이었던 부채가 남궁휘와의 대립을 거치며 다시 늘어났다. 한계치인 100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위안 삼기엔, 빚이 늘어날 때마다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박이 너무도 무거웠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환청처럼 빚을 독촉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내일 예선전 대진표가 나왔다.”

진무겸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며 품 안에서 천맹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참가 문파만 삼백이 넘는다. 그중 절반 이상이 명문대파의 방계이거나 이름 있는 중소 세가들이지. 우리 같은 삼류 문파가 예선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이미 눈엣가시가 된 모양이야. 대진표를 보니 첫 상대부터 만만치 않아. 하북 철검문(鐵劍門)의 수제자, 공손찬이다.”

“철검문…….”

서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북에서 검을 꽤나 쓴다는 문파잖아. 정식 무공의 초식이 탄탄하고, 특히 문주인 공손백의 아들이라면 그 체격과 힘이 장사급이라고 들었어. 사형, 소운이 지금 이 몸 상태로 그자와 정면 승부가 되겠어? 무리야.”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 내공은 이제 막 역맥을 뚫어 기초를 다진 수준입니다. 저들의 정통 무학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요. 게다가 사맥체의 부작용으로 장기전으로 갈 체력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소운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사선을 넘나든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광기와 이성이 뒤섞인 미소였다.

“저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철검문의 검법은 겉보기엔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이지만, 그 초식과 초식이 연결되는 틈새에 치명적인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요. 십 년 뒤, 낙양의 어느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그자가 술에 취해 통곡하며 불평하던 것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철검문 삼대검법의 비전 뒤에 숨겨진 그 허점을 말입니다. 그 약점은 단 한 번의 호흡, 단 한 번의 찰나에 드러납니다.”

진무겸과 서린은 침을 삼켰다. 소운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천 번의 대련이 시뮬레이션되고 있었다. 미래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꺼내온 지식은, 때로는 수십 년의 공력보다 더 날카롭고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낙양성 북동쪽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

천맹이 주관하는 청년 비무대회의 열기는 한여름의 태양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관중석에는 중원 각지에서 몰려든 무림인들과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제련석 무대 위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의 대련이 벌어져, 잘려 나간 옷자락과 흩뿌려진 선혈이 바람을 타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다음 대진! 산서 청운문, 한소운! 대(對) 하북 철검문, 공손찬! 양측은 무대 위로 올라와라!”

심판의 우렁찬 목소리가 투기장을 울렸다.

그 순간, 관중석 곳곳에서 비웃음 섞인 조롱이 터져 나왔다.

“청운문? 산서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는 잡문파 아니야?”

“하하, 철검문의 공손찬이라면 하북의 어린 호랑이라 불리는 녀석인데, 저 깡마른 녀석은 검을 뽑기도 전에 오줌부터 지리겠구먼.”

“어이, 꼬맹아! 집에 가서 어머니 젖이나 더 먹고 오너라!”

멸시와 조롱의 시선이 소운의 등 뒤로 무수히 박혔다. 진무겸은 주먹을 꽉 쥐며 부르르 떨었고, 서린은 차가운 눈으로 관중석을 노려보았으나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엔 청운문의 이름값은 너무도 가벼웠다.

“소운아, 기죽지 마라. 저들은 네가 짊어진 운명의 무게를 평생 가도 모를 놈들이다.”

진무겸이 소운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했다. 소운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찬 평범한 철검을 가볍게 쥐었다.

‘기죽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사형.’

소운의 심장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맥체의 찌릿한 통증이 단전에서 손끝으로 퍼져 나갔지만, 역맥 수련으로 억지로 길을 낸 기운이 미세한 혈맥을 관통하며 온몸에 폭발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것은 수명을 깎아 먹는 불꽃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고수의 기운보다 선명했다.

소운이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반대편 무대 위에는 키가 칠척이 넘고, 상반신이 바위덩어리처럼 단단하게 근육질로 다져진 사내, 공손찬이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메고 서 있었다. 그는 소운의 가느다란 체구를 훑어보더니 노골적으로 침을 내뱉으며 비웃었다.

“네놈이 청운문의 잡역부 출신이라던 그 한소운이냐? 듣자 하니 운 좋게 철검협의 밀정들을 잡았다던데, 그건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내 검은 그 가짜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괜히 내 검에 목이 날아가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기 전에,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기어 내려가는 게 어떠냐?”

공손찬의 오만한 선포에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는 이미 승리라도 한 듯 거만한 자세로 대검을 바닥에 쾅 내리찍었다.

소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검집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공손찬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발의 각도, 어깨의 근육 경직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호흡이 단전에서 어떻게 갈무리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철검문 철벽검법(鐵壁劍法). 육중한 위력으로 상대를 압살하는 하북의 정석. 하지만 우직함 뒤에 숨겨진 오만함이야말로 가장 큰 빈틈이지.’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투기장을 날카롭게 갈랐다.

“죽어라, 이 벌레 같은 놈아!”

공손찬이 포효하며 거대한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력이 대검의 날에 머물며 서슬 퍼런 검기를 형성했다.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수직으로 낙하하자, 바람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무대의 제련석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정면에서 맞받아친다면 검은 부러지고 육신은 떡이 될 만한 가공할 일격이었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서린이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소운의 신형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스으윽—!

소운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공손찬의 일격이 가장 강력해지는 지점을 향해 몸을 가로로 미끄러뜨렸다. 검끝이 소운의 옷자락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공간을 으깨버릴 듯한 압도적인 파괴력이었으나, 소운은 그 거대한 궤적이 만들어낸 찰나의 공백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지금이다.’

공손찬의 대검이 바닥을 치기 직전, 힘이 하체로 쏠리며 상체의 방어가 비는 단 0.1각의 순간. 소운은 역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오른팔에 집중시켰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검집째로 공손찬의 팔꿈치 안쪽, 기혈이 교차하는 맥점(脈點)을 정확히 타격했다.

탁!

가느다란 소리였으나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크, 크윽……?!”

공손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자신이 자랑하던 철벽검법의 초식이 완성되어 폭발하기 직전, 그 흐름의 매듭이 완벽하게 끊겨버린 것이다. 갈 곳을 잃은 거대한 내력이 주인의 단전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소운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물 흐르듯 발을 굴러 공손찬의 품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검집의 끝으로 상대의 명치 아래, 수궐음심포경의 혈도를 가볍게, 하지만 묵직하게 밀어붙였다.

쿵-!

집채만 한 장사였던 공손찬이 마치 실 끊긴 인형처럼 뒤로 고꾸라졌다. 그는 무대 바닥을 서너 바퀴나 구른 뒤에야 멈춰 섰다. 입가에서는 거품 섞인 선혈이 흘러나왔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맸다.

순식간에 투기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단 한 수.

제대로 된 초식 한 번 부딪치지 않고, 상대의 가장 강력한 공격을 가장 허무하게 무너뜨린 완벽한 제압이었다.

“승자, 청운문 한소운!”

심판의 목소리조차 당황으로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방금……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철검문의 공손찬이 한 수 만에? 저게 말이 돼? 저 녀석, 무슨 사술을 쓴 거 아니야?”

“아니, 사술이 아니야. 초식의 흐름을 읽고 정확히 급소를 찔렀어. 저건 삼류 문파의 잡역부가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데……”

경악과 의구심이 섞인 시선들이 무대 위 소운에게 쏟아졌다.

관중석 상단, 화려한 차양 아래 앉아 있던 남궁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부채를 살랑이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곁을 지키던 호위무사가 몸을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공자, 저 녀석…… 예사롭지 않습니다. 공손찬의 철벽검법을 저토록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다니요. 미리 약점을 알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궁휘는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접으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흥, 벌레 같은 것이 제법 잔머리를 굴리는군. 어디서 철검문의 파훼법이라도 훔쳐본 모양이지? 하지만 예선 따위에서 반짝해봐야, 본선에서는 그저 밟히는 먼지일 뿐이다. 눈에 띄게 두어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처참하게 짓밟아 줄 테니.”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소운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승리의 기쁨보다는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역맥의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진무겸과 서린이 단숨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소운아! 너 정말…… 대단했다! 그 덩치를 한 방에 보내버릴 줄이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얼굴색이 너무 안 좋아, 소운아.”

서린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함께 소운을 향한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예전의 소운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위였다.

소운은 비릿하게 올라오는 각혈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작도 아닙니다, 사형.”

그 순간, 소운의 시야 구석에서 천명장부가 요란한 진동과 함께 빛을 내뿜으며 새로운 글귀를 찍어냈다.

【 예선 승리 및 남궁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인과율의 균형이 미세하게 조정됩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46 / 100 】

【 청구: 본선 진출자 명단에 확실히 이름을 올려라. 그리고 내일 밤, 낙양 비밀 거점에서 열리는 '천맹 비밀 연회'에 잠입하여 내부 배신자들의 명부(名簿)를 탈취하라. 】

숫자가 46으로 줄어들었지만, 새롭게 내려온 청구의 내용은 소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천맹의 비밀 연회.

그곳은 대륙의 거물들과 흑련회, 혈월교의 하수인들이 모여 중원의 다음 파멸을 모의하는 암흑의 심장부였다. 오대세가의 가주급 인물들이 드나드는 그곳에 삼류 문파의 제자가 잠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소운은 멀리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남궁휘를 향해 조용히 시선을 던졌다.

판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고, 빚의 무게는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조여온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사랑하는 동문들의 시체와 불타는 청운문뿐이었다.

“가자.”

소운이 검을 고쳐 잡으며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진정한 사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객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진무겸은 굳은 표정으로 방문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운을 쏘아보았다.

“천맹의 비밀 연회라니! 소운아, 네가 방금 받은 그 청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거긴 중원의 명숙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야. 삼류 문파 제자가 쥐새끼처럼 숨어들었다가는, 정체를 들키는 즉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서린 역시 책상 위에 놓인 청구의 내용을 복기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겸 사형 말이 맞아. 예선전에서 조금 눈에 띄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건 아니야. 게다가 '배신자의 명부'라니…… 그게 실존하는지도 불분명한데, 목숨을 걸고 잠입하라는 건 너무 가혹해.”

소운은 낡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맥 수련과 비무의 여파로 단전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왔지만, 그의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차갑고 명징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장부는 우리에게 편안한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길을 알려주죠. 5년 뒤, 우리 문파를 불태울 그놈들의 손길을 미리 자르려면, 천맹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배신자들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 단서가 바로…… 저들이 내일 밤 숨기려는 그 명부에 있습니다.”

소운의 확고한 눈빛에 진무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 진짜 미치겠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있는 거냐? 초대장도 없을 테고, 경비는 철통같을 텐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운은 품속에서 흑풍채에서 얻었던 낡은 밀패(密牌)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거무죽죽한 쇳조각 위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흑련회와 그들에게 포섭된 천맹 하수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은밀한 증표였다.

“이걸 이용하면 꼬리를 밟힐 위험이 크지만, 역으로 저들의 경계망에 구멍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미 낙양의 정보 바닥을 꿰고 있는 협력자가 있지 않습니까.”

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독고염(獨孤炎) 말이야?”

“그렇습니다. 흑풍장에서 거래를 텄던 그 아이라면, 연회장의 정확한 위치와 경비 배치도, 그리고 가장 취약한 잠입 경로를 알고 있을 겁니다. 정보는 이미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소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장부가 요구하는 대가는 언제나 가혹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어낼 미래의 파편들은, 멸문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거스릴 유일한 뗏목이었다. 소운은 감은 눈앞에서 여전히 불길하게 명멸하는 붉은 숫자를 응시했다.

【 부채 46 / 100 】

아직 한계까지는 절반의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이번 연회 잠입을 성공시키고 명부를 손에 넣는다면, 인과의 파장은 낙양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커질 터였다. 부채가 폭증할 수도, 혹은 기적처럼 공덕으로 바뀔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승부처였다.

“준비합시다. 내일 밤, 우리는 낙양의 심장부를 도려내러 갈 겁니다.”

소운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낙양의 밤은 더욱 깊어갔고, 청운문의 세 남녀는 각자의 칼날을 갈며 다가올 피바람을 준비했다. 이제 그들에게 평범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빚을 갚기 위한, 혹은 빚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투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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