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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9화목차

9장 천맹 청년 비무대회 소집

검은 로브의 인물이 신형을 감추며 사라진 자리에는, 매캐한 연기와 비릿한 피비린내만이 공허하게 감돌고 있었다. 한때 산서 외곽의 악명을 떨치던 흑풍채의 본거지는 이제 불타는 목재가 터지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뿐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소운아! 정신 차려, 소운아!”

서린이 비틀거리는 소운에게 황급히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산적 토벌의 승리감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짙은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방금 전, 소운이 검은 로브의 괴인을 마주하며 뿜어내던 기괴한 압박감, 그리고 허공을 노려보던 그 광기 어린 눈빛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평소의 소운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던, 마치 수만 번의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한 안광이었다.

진무겸 또한 거친 대도를 지팡이 삼아 땅에 짚은 채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청운문의 대사형으로서 유지하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그 자…… 대체 누구냐. 흑풍채의 숨겨진 고수냐, 아니면 잔당인가?”

“아닙니다. 그런 시시한 자들이 아니에요.”

소운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다리는 낙엽처럼 후들거렸으나, 그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역맥(逆脈)의 반작용이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지만, 지금 소운의 뇌리를 더 강하게 때리는 것은 눈앞의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장부의 수치였다.

【 현재 부채 잔액: 48 / 100 】

【 경고: 타인에게 전가된 인과가 불안정합니다. 】

‘빌어먹을…… 내가 바꾼 미래의 대가가 나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

소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장부가 경고하고 있었다. 그가 억지로 비틀어버린 역사의 파편들이,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운명에 박히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흑풍채는 산서 외곽에서 1년쯤 더 암약하다가, 세력이 커진 뒤 천맹의 대대적인 소탕령에 의해 조용히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소운은 그 흐름을 앞당겼다. 혼자만의 힘으로 수괴를 베고 근거지를 초토화했다. 그 행동은 단순한 정의구현이 아니라, 거대한 강호의 거대한 흐름을 강제로 꺾어버린 일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검은 로브의 인물, 인과의 집행자가 나타나 그 무게를 주변으로 흩뿌린 것이다.

‘혼자 짊어지려 했는데…… 빚은 늘 가장 약한 곳, 내 주변 사람들로 새어나간다.’

소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박힌 손톱 끝에서 핏물이 툭툭 떨어져 재가 된 흙바닥을 적셨다.

“한소운, 네가 자꾸 숨기는 게 있지.”

진무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사형의 눈빛은 매섭도록 진지했다. 그는 평소 소운을 아끼는 아우로 보았으나, 오늘만큼은 그를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너는 저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이 산적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검은 옷의 자가 널 보며 남긴 그 눈빛은 뭐지? 마치 네가 지고 있는 빚을 우리에게 강제로 나누어 준 것 같지 않았느냐.”

서린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소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느껴졌어. 방금 머릿속이 핑 돌면서…… 뭔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심장을 찌르고 지나갔어. 소운아, 너 우리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우리가 정말 동료라면, 아니 사남매 같은 사이라면 말해 줘.”

거짓말로 넘길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소운은 직감했다. 이미 두 사람은 소운과 함께 흑풍채를 털며 목숨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인과의 빚을 공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더 숨긴다면, 장부가 나누어 가진 인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 사람 모두 원인 모를 변고로 자멸할 터였다.

소운은 핏기 없는 얼굴로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회한과 결연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제 말을 끝까지 들으십시오.”

차가운 밤바람이 골짜기를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소운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 우리 청운문은 혈월교의 기습을 받아 멸문합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장문인 어른도, 두 분 사형과 사제들도…… 저 역시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그 지옥 같은 미래를 겪고 눈을 떠 보니, 15살의 이곳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골짜기에는 완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산적 막사의 잔불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릴 뿐이었다.

진무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려 했으나, 소운의 눈에 서린 핏발과 뼛속까지 시린 진정성을 마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이미 여러분의 몸속에 있습니다. 방금 그 자가 뿌린 빚, 그 불길한 기운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소운이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내가 미래를 바꿀 때마다 하늘은 내게 빚을 청구합니다. 대가 없는 기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감당하지 못한 빚은 필연적으로 내 주변으로 튑니다. 오늘 흑풍채를 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5년 뒤에 다 죽으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 겁니다.”

진무겸은 무겁게 침을 삼키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증거는? 네 말이 사실이라는, 더 확실한 증거는 없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증명해 줄 겁니다. 그리고 당장 내일, 우리 청운문으로 날아올 통지서가 그 첫 번째 증거가 될 겁니다.”

소운의 단호한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렸다. 산서 외곽의 이름 없는 삼류 문파인 청운문에, 대문파들의 연합이자 무림의 중심인 ‘천맹’으로부터 공식 서신이 날아올 리 만무했다. 그것은 평범한 서민이 황제의 칙령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소운은 알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5년 전 이맘때, 천맹 주관으로 열리는 거대한 행사가 선포되었음을. 그리고 그 행사는 정도 무림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 고수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사파와 결탁한 배신자 집단이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한꺼번에 도륙하기 위해 파놓은 거대한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이틀 뒤, 청운문.

평화롭던 문파의 정문 앞에 말 한 마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천맹의 인장이 찍힌 선명하고 붉은 밀봉 서신이 장문인 백도현의 손에 들려졌다.

서신을 확인한 백도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이럴 리가…… 우리 같은 삼류 문파에 천맹 본산에서 직접 자리를 마련하다니. 이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이냐?”

대청마루에 모인 청운문의 고위 인물들과 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문인의 뒤에 서 있던 진무겸과 백서린은 서로의 눈을 맞추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운의 예언이 단 이틀 만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무리 끄트머리에 서 있던 소운의 눈빛은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서신의 내용은 명확하고도 위압적이었다.

‘천맹 청년 비무대회 소집.’

중원 전역의 젊은 고수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장이라 선전하고 있었으나, 어째서 산서 구석진 곳의 청운문까지 지목되었는가. 장문인 백도현은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전조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다.

그때, 군중 속에서 잡역부 복장을 한 소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장문인 어른, 가야 합니다.”

“소운아? 네가 어찌 이 자리에…… 아니, 방금 뭐라고 했느냐?”

“가서 피할 수 없는 판을 뒤집어야 합니다. 아니, 저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그 밑바닥을 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청운문이 살 수 있습니다.”

소운의 목소리에는 일개 잡역부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단호함과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백도현은 소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자 진무겸과 딸 서린의 결연한 눈빛을 차례로 마주했다. 두 사람 역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대사형 진무겸은 칼을 고쳐 메며 장문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 제가 서린이와 함께 참가하겠습니다. 소운이의 말이 맞습니다. 이것이 기회든 위기든, 피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청운문의 이름을 걸고 당당히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백도현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명심해라. 살아 돌아오는 것이 최우선이다. 문파의 명예보다 너희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 순간, 소운의 시야에 금빛 글자들이 명멸했다.

【 천맹 청년 비무대회 참가 확정. 역사의 흐름이 크게 비틀립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53 / 100 】

【 청구: 낙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사파의 밀정을 저지하고 그들의 계획을 파훼하라. 】

허공의 알림을 보며 소운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기꺼이. 빚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를 바꿀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갚아주면 그만이다. 그 대가가 피와 눈물일지라도.

사흘 뒤, 낙양으로 향하는 장정의 길목.

산서성을 벗어나 중원의 심장부로 향하는 대로는 봄바람치고는 제법 서늘하고 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청운문을 대표해 비무대회로 향하는 이들은 진무겸, 백서린, 그리고 짐꾼을 자처한 한소운 세 사람뿐이었다. 변변한 말 한 마리 없이 두 발로 걷는 고된 길이었지만, 세 사람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도 단단했다.

“소운아, 낙양까지는 걸어서 보름이 넘게 걸린다. 정말 그곳에 사파의 밀정이 숨어 있다는 게 확실해?”

진무겸이 허리에 찬 대도의 고정 상태를 점검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확실합니다. 흑련회(黑蓮會)는 이번 비무대회를 앞두고 천맹 내부의 협조자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낙양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자 험준한 협곡인 ‘철검협’에서 우리를 포함해 대대적인 습격이 벌어질 겁니다. 그들은 각 문파의 실력을 미리 떠보고 싹을 자르려 할 테니까요.”

서린이 주변의 울창한 숲을 경계하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미리 움직여서 그들을 공격하면, 저들도 우리의 이동 경로를 눈치채지 않을까?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눈치채는 게 당연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우리를 맞이하러 오게 만드는 게 제 계획입니다. 적의 안방에서 싸우느니, 우리가 선택한 전장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게 낫습니다.”

소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역맥 수련으로 인해 단전의 기운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통맥의 벽을 억지로 밀어내며 얻은 힘은 비록 온전치 못했으나, 전투 감각만큼은 20년의 떠돌이 생활을 거친 백전노장의 그것이었다.

닷새 뒤, 세 사람은 악명 높은 협곡인 철검협(鐵劍峽) 입구에 다다랐다. 양옆으로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어 하늘조차 실가닥처럼 보이는 음산한 곳이었다.

서걱-!

풀숲에서 미세한 기척이 스쳤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바람 소리로 치부했을 작은 소음이었으나, 소운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나왔군.”

진무겸이 즉시 칼을 뽑아 들고 서린의 앞을 막아섰다. 절벽 위에서 검은 복면을 한 사자들이 소리 없이 낙하하며 세 사람을 포위했다. 그들의 품에서 번뜩이는 암기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청운문의 쥐새끼 세 놈이 맞느냐? 삼류 문파의 잔챙이들 주제에, 감히 기어오르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디뎠구나.”

사파의 살수들이 비릿한 비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소운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가볍게 던졌다. 그 안에는 흑풍채에서 얻은, 흑련회와의 내통 사실이 담긴 증거물들이 들어 있었다.

“쥐새끼인지, 아니면 너희의 목을 딸 사냥꾼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죽여라! 하나도 남기지 마라!”

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비명이 숲을 갈랐고 선혈이 튀어 올랐다. 진무겸의 대도가 파산추의 기세로 정면의 적을 압박했고, 백서린의 검은 낙화유수처럼 부드럽게 살수의 허를 찔렀다.

그 난전의 중심에서 한소운은 단 한 번의 낭비도 없는 신형을 선보였다. 그는 적들의 사각지대를 귀신같이 파고들며 날카로운 역맥검(逆脈劍)을 박아넣었다.

퍼벅-!

“크흑……!”

살수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혈도를 찔려 고꾸라졌다. 소운의 움직임은 무공이라기보다 살인에 특화된 정교한 기계에 가까웠다. 전투가 끝날 무렵, 소운의 눈앞에 다시 장부가 떠올랐다.

【 철검협 밀정 토벌 완료. 】

【 공덕 +8 획득. 】

【 현재 부채 잔액: 46 / 100 】

빚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소운은 결코 안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낙양 본성,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오대세가의 귀공자 남궁휘(南宮輝)와 사파의 진짜 괴물들이 남아 있었다.

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검을 바닥에 털어내며 낙양을 향해 눈을 빛냈다.

“가자. 진짜 판은 지금부터다.”

철검협의 바닥은 비릿한 핏물로 젖어 들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사파의 살수들을 베어낸 진무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끝을 떨궜다. 그의 옷자락은 이미 적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백서린 역시 가쁜 숨을 내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려 했으나, 생전 처음 겪는 실전의 무게에 손이 잘게 떨렸다.

“이게…… 우리가 바꾼 미래의 대가야?”

서린이 멍한 눈으로 쓰러진 살수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소운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대가가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지불한 첫 번째 통행세일 뿐입니다. 앞으로 낙양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적들이 우리를 맞이할 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소운의 말은 예언과도 같았다. 철검협을 빠져나와 낙양으로 향하는 대로에 접어들자, 강호의 기류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곳곳에서 거대 문파의 무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공기 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천맹 청년 비무대회라는 명목 아래, 중원 전체의 후기지수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흘의 강행군 끝에, 마침내 거대한 성곽의 윤곽이 지평선 위로 드러났다. 중원의 중심, 낙양(洛陽).

수많은 무인과 상인들이 오가는 거대한 성문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명문세가와 대문파의 깃발이 오색찬란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오대세가의 문양을 새긴 화려한 마차와 칠대문파의 도포를 차려입은 고수들이 거리를 압도했다. 그 화려한 풍경 속에서 청운문의 세 사람, 특히 낡은 짐을 짊어진 소운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저기가 낙양성…….”

진무겸이 혀를 내둘렀다.

“듣던 대로 대단하군. 산서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던 우리로서는 눈이 돌아갈 지경이야. 저들의 기세가 우리 장문인 어른보다 강해 보이는구나.”

“주눅 들 필요 없습니다. 저 화려한 깃발 뒤에 숨은 자들 대부분이, 5년 뒤 혈월교의 칼날 아래 비명횡사할 가련한 영혼들이니까요.”

소운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운의 눈앞에 익숙한 금빛 장부가 떠올랐다.

【 낙양 입성 완료. 】

【 주의: 거대한 인과의 교차점에 진입했습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46 / 100 】

‘왔군.’

소운은 시선을 돌려 번화한 거리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백색 비단옷에 은사로 수놓아진 가문을 상징하는 학 문양.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가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 무리의 선두에 선 자가 바로 남궁휘였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인자하고 기품 있는 미소를 지닌 청년 공자. 하지만 소운은 알고 있었다. 그 온화한 미소 뒤에 천맹 내부의 정보를 사파에 팔아넘기고, 청운문을 비롯한 수많은 소문파를 소모품으로 버릴 냉혹한 계산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남궁휘의 시선이 문득 청운문의 무리에게 닿았다. 촌구석의 삼류 문파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그의 입가에 묘한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거, 산서에서 먼 길 오신 청운문의 분들 아니십니까.”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가 세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진무겸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칼자루에 손을 올리자, 남궁휘의 뒤에 서 있던 남궁가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살기를 뿜어냈다.

남궁휘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 호위들을 제지하고는, 친절한 태도로 다가왔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이번 비무대회에 삼류 문파 중 드물게 참가 자격을 얻으셨다고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우리 남궁가에 도움을 청하십시오. 명문가로서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니.”

말끝마다 오만함이 묻어나는 위선이었다. 서린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진무겸은 턱을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소운이 진무겸과 서린의 앞을 반쯤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과분한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남궁 공자님.”

소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눈빛은 남궁휘의 가면을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호의는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법입니다. 낙양의 바람이 생각보다 거칠어서 말입니다. 겉포장만 번지르르한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가는, 자칫 목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 공자님께서도 스스로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남궁휘의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일개 삼류 문파의 잡역부 따위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런 경고를 할 것이라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남궁휘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으나, 그는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요. 비무대회 본선에서 그 거창한 입담만큼의 실력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실망하게 해드리지는 않죠.”

남궁휘의 무리가 오만한 기세를 뿌리며 스쳐 지나간 뒤, 진무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운을 바라보았다.

“소운아, 너 정말 미쳤어? 상대는 오대세가의 차남이다! 대놓고 그렇게 척을 지면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척을 지게 될 운명입니다. 감추려 해도, 저들은 우리를 벌레처럼 밟아 죽일 놈들이니까요. 먼저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면 먹힐 뿐입니다.”

소운은 멀어지는 남궁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머릿속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요동치며 새로운 글귀를 찍어냈다.

【 남궁휘와의 조우. 인과의 파장이 커집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51 / 100 】

【 청구: 내일 열리는 비무대회 예선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남궁가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아라. 】

숫자가 또다시 늘어났다. 하지만 소운은 두렵지 않았다. 빚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를 비틀고 있다는 증거이자, 다가올 파국을 막아낼 힘을 스스로 쥐고 있다는 확신이었기 때문이다.

소운은 주먹을 꽉 쥐며 낙양성의 거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자. 판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 우리가 그 판을 흔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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