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산적 토벌과 전가된 빚
새벽의 한기가 산서(山西)의 험준한 산세를 하얗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대지를 짓누르는 안개는 마치 굶주린 맹수의 숨결처럼 청운문의 기와지붕 위를 낮게 기어 다녔다. 만물이 숨을 죽인 시간이었으나, 청운문의 작은 연무장만큼은 서슬 퍼런 투기와 거친 호흡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챙—! 챙강!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찢어발겼다. 진무겸의 육중한 검세가 백서린의 검날을 타고 미끄러지며 불꽃을 튀겼다. 이어지는 벼락같은 고함.
“자세가 낮아진다, 서린아! 발끝에 무게가 실리지 않으니 검끝이 흔들리는 게 보이지 않느냐! 실전에서 방심은 곧 죽음이다!”
“윽……! 대사형, 공격이 너무 무식할 정도로 매섭잖아요!”
백서린이 이를 악물며 진무겸의 검세를 가까스로 받아쳐 냈다. 하지만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거대한 내력의 여파까지는 상쇄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녀린 신형이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이마에는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이 맺혔고, 검을 쥔 손목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치열한 대련에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 한소운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단절된 듯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호흡, 흡(吸)과 호(呼).
보통의 무인들이 단전에 기를 모아 전신으로 흘려보내는 정경맥(正經脈)의 운기법을 따르는 것과 달리, 소운의 기운은 기괴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단전에서 역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수직으로 치솟아 올라 뇌궁(腦宮)을 거친 뒤, 사지로 흩어지는 방식. 그것은 일그러진 경맥을 억지로 비틀어 통로로 만드는 ‘역맥 수련법(逆脈 修鍊法)’이었다.
파지지직—!
피부 표면을 따라 붉은 실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도드라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강제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골수까지 파고드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올 법도 했지만, 소운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 43이라는 부채의 무게를 견뎌내려면, 이 정도 고통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름없어.’
지난밤 흑풍장에서 얻은 정보는 소운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남궁휘와 흑련회가 비무대회라는 화려한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인 참극. 천맹의 후기지수들을 몰살하고 강호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그들의 음모를 막기 위해, 청운문은 더 이상 변방의 이름 없는 삼류 문파로 남아서는 안 됐다.
힘이 필요했다. 남의 발길질에 묵묵히 죽어가는 잡역부가 아니라, 판 자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이.
이윽고 소운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입술 사이로 탁한 검은 숨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후우——.
그가 내뱉은 숨결에 닿은 공기가 미세한 열기를 머금으며 일렁였다. 소운의 눈동자 속에는 이전의 소심한 잡역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서슬이 한 자락 스쳐 지나갔다.
“소운아, 괜찮은 거니?”
대련을 멈춘 백서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우려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경외감이 섞여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전에 기조차 쌓지 못하던 문파의 잡역부였다. 그러나 지금 소운의 주위에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피부를 에이는 듯한 서늘한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괜찮아. 몸 상태는 오히려 평소보다 가볍군.”
소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검집을 고쳐 잡았다. 그 동작 하나에도 군더더기 없는 기민함이 묻어났다.
그 순간, 연무장 입구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백도현이었다. 평소 인자하던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굳어 있었고, 손에 쥐어진 낡은 종이 한 장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운아, 무겸아, 서린아. 당장 수련을 멈추거라.”
스승의 엄숙하고도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진무겸이 검을 거두며 한걸음에 다가갔다.
“사부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흑풍산의 흑풍채(黑風寨) 놈들이 마침내 선을 넘었다. 사흘 전부터 산서 외곽을 오가는 상단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더니, 어제는 우리 문파와 오랫동안 거래해온 약초상까지 털어버렸다더구나. 이대로 방치한다면 우리 문파의 명맥은커녕, 인근 백성들의 삶터까지 잿더미가 될 것이야.”
소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풍채. 원래의 역사 속에서도 그들은 청운문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산적 무리였다. 당시의 청운문은 그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백도현이 습격을 막아내다 중상을 입으며 문파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흑풍채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후를 캐낼 여유가 없어. 당장의 불부터 꺼야 한다.’
백도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천맹의 연합 방침에 따라 산서 내의 치안은 우리가 책임지기로 되어 있다. 비록 우리 문파가 쇠락하여 힘이 부치나, 대의를 저버리고 숨어 있는 것은 무인의 도리가 아니다. 내가 직접 가려무나만, 현재 내 상태가……”
“사부님, 제가 가겠습니다.”
진무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에는 정의감과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제가 청운문의 대사형입니다. 산적 놈들 따위, 제 검으로 직접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사부님은 문파를 지켜주십시오.”
“무겸아, 네 기개는 가상하다만 홀로 가기엔 위험이 크다. 흑풍채의 두목 ‘산귀(山鬼)’ 왕도현은 이미 소성(小成) 후반에 이른 고수다. 그의 도법은 잔인하고 변칙적이라 녹록지 않을 게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소운이 차분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조로 나섰다. 백도현과 진무겸, 그리고 서린의 시선이 소운에게 쏠렸다.
“소운아, 넌 아직 정식 제자도 아닌 잡역부의 몸이다. 실전은 수련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사부님, 저도 지난 며칠간 사형과 사제 곁에서 무공을 익혔습니다. 게다가…… 놈들의 은닉처가 정확히 어디인지, 어떤 함정을 주로 파놓는지 저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운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자신감을 넘어선, 확신에 찬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미래의 기억을 공유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백도현은 한참 동안 소운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예전의 흐릿하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의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래…… 언제부턴가 너는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더구나. 좋다. 무겸이와 서린이, 그리고 소운이 너까지 셋이서 다녀오너라. 단, 무리하지 말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즉시 퇴각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흑풍산은 이름 그대로 음산한 바람이 끊이지 않는 험준한 산세였다. 기괴하게 뒤틀린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 그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친 함성과 매캐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적들의 아지트인 흑풍채 본영이었다.
“정말 이곳에 은밀한 통로가 있는 거냐, 소운아?”
진무겸이 품에서 검을 반쯤 빼 들며 낮게 속삭였다. 세 사람은 수풀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망루 위에서 감시하는 산적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정문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놈들은 저 망루 위에 연사궁을 배치해두었고, 입구 좌우의 낙엽 밑에는 독니가 박힌 함정이 파여 있습니다. 저쪽, 왼쪽 벼랑 끝에 솟은 바위틈을 보십시오. 그곳으로 우회하면 감시의 사각지대를 뚫고 내부로 잠입할 수 있습니다.”
소운이 가리킨 곳은 경사가 70도에 육박하는 가파른 절벽이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지형이었지만, 역맥 수련으로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길도 아니었다.
백서린이 단호하게 검을 고쳐 잡았다.
“소운이의 판단을 믿자.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야.”
사박, 사박.
기민한 신법으로 절벽을 타고 오른 세 사람은 소리 없이 흑풍채의 목책 안으로 스며들었다.
채 내부의 마당 한가운데에서는 역겨운 술 냄새와 함께 산적 십여 명이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중앙에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늙은 상인과 마을 주민들이 보였다.
“크하하하! 이 늙은이들아, 가진 게 고작 이게 전부냐? 더 내놓을 게 없을 리가 없는데!”
두목으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 ‘산귀’ 왕도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날로 상인의 턱밑을 치켜올리며 낄낄거렸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진 것을 모두 바쳤습니다. 더는 쥐어짜도 나올 게 없습니다……”
“시끄러워! 당장 산서 영주에게 바칠 상납금을 채워야 하는데 이따위 푼돈으로 누굴 달래라는 거야! 오늘 밤, 이 마을 놈들을 본보기로 모조리 태워버려라!”
왕도현의 눈에 잔혹한 살기가 번뜩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무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파렴치한 짐승 같은 놈들……! 서린아, 소운아, 지금이다!”
쾅—!
진무겸이 먼저 나무 그늘을 박차고 나가며 기합을 내질렀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렬한 청운검기가 푸른 궤적을 그리며 가장 가까운 산적의 어깨를 깊게 관통했다.
“적이다! 청운문 놈들이 기습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산적들이 혼비백산하며 무기를 집어 들었다.
백서린 역시 유려한 신법으로 전장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현란한 청운검법(靑雲劍法)이 바람을 가르며 산적들의 목전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검끝이 산적들의 조잡한 도검을 가볍게 쳐내며 순식간에 두 명의 다리를 베어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크하하, 애송이 삼류 문파 녀석들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저놈들의 사지를 잘라 술안주로 삼아라!”
우락부락한 산적 무리가 진무겸과 서린을 향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진무겸이 최전선에서 육중한 검세로 길을 열고 있었으나, 전방위에서 날아오는 도(刀)와 창(槍)의 세례에 점차 호흡이 가빠졌다.
그때, 산적들의 대열 뒤편에서 서늘한 죽음의 바람이 불었다.
피식—!
“컥……?”
산적 한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에 붉은 선을 그리며 고꾸라졌다. 그 뒤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무심하게 털어내는 소운이 서 있었다.
그의 검식에는 화려함이 없었다. 초식이라 부를 만한 형식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적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20년 세월의 떠돌이 생활과 살육의 기억 속에서 걸러낸 가장 효율적이고 잔인한 살법(殺法)이었다.
‘저놈은 하반신이 부실해. 공격 시 왼쪽 경맥의 흐름이 반 박자 늦다.’
소운의 눈에는 상대의 약점들이 마치 투명한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역맥 수련으로 극대화된 감각은 적의 미세한 근육 떨림과 호흡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슈우우—!
소운이 찰나의 순간 산적의 칼날 아래로 몸을 굽히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력을 실은 손바닥으로 상대의 명치를 강타했다.
퍽!
“커학……!”
산적이 시커먼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 전투에서 청운문은 산적들의 수적 열세와 기습에 대패했어야 했다. 진무겸은 어깨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는 중상을 입고, 백서린은 눈물을 흘리며 도망쳐야 했던 비참한 결말.
하지만 지금, 그 예정된 비극은 소운의 검끝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소운아, 왼쪽에서 창병이 온다!”
서린이 외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산적의 검을 막아세웠고, 소운은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처럼 날아올라 창병의 손목을 정확히 베어냈다.
진무겸의 묵직한 돌파력, 서린의 유려한 수비, 그리고 소운의 정교한 암살과도 같은 일격. 세 사람의 완벽한 조화 앞에 흑풍채의 진형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 이 쥐새끼 같은 자식들이……!”
분노로 안면을 일그러뜨린 두목 왕도현이 거대한 대도(大刀)를 휘두르며 직접 전면에 나섰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살기가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건방진 애송이들! 내 직접 너희 가죽을 벗겨 망루에 걸어주마!”
쿠구구구—!
소성 후반의 내력이 실린 대도가 대지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진무겸을 향해 내리꽂혔다. 진무겸이 급히 검을 가로로 세워 막아섰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충격파에 무릎이 푹 꺾이며 입에서 선혈이 울컥 치솟았다.
“크윽……!”
“사형!”
서린이 경악하며 달려들었으나, 왕도현의 거친 발길질 한 번에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압도적인 완력의 차이였다. 삼류 문파의 한계가 다시 한번 그들의 목을 조여오는 절망적인 순간.
그러나 소운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은 북해의 얼음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어 있다. 저 거구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회전할 때마다 오른쪽 허리가 0.3각(刻)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운의 발이 땅을 박차고 나갔다.
역맥(逆脈)의 기운이 단전에서 화산처럼 폭발하며 전신의 경맥을 타고 검끝으로 응집되었다.
후우우웅—!
검신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을 내뿜었다. 왕도현이 비웃으며 대도를 휘둘렀다.
“벌레 같은 놈이 감히! 죽어라!”
대도가 소운의 머리를 두 쪽 낼 듯한 기세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
하지만 소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칼날이 만드는 죽음의 궤적 속으로 제 몸을 던졌다.
챙강-!
금속과 금속이 교차하는 찰나. 소운의 검끝이 왕도현의 대도 날에서 가장 약한 지점인 ‘촌경(寸勁)’을 정확히 타격했다. 내력과 내력이 부딪치며 눈이 멀 것 같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왕도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뭐냐? 이 어린놈의 내력이 어째서 이토록 단단한 것이냐!”
“당신의 끝이다.”
소운의 입에서 차가운 선고가 떨어졌다.
소운의 검이 대도의 틈새를 유령처럼 파고들어, 왕도현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관통했다. 그곳은 거구의 산적 두목이 유일하게 단련하지 못한, 피부가 가장 얇은 혈도였다.
푸슉—!
“끄아아아악——!”
왕도현의 처절한 비명이 흑풍산의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거구의 사내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가 쥐고 있던 대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수장을 잃은 산적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망쳐!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다!”
“살려줘! 장문인님, 살려주십시오!”
진무겸과 서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은 산적들의 피와 자신들의 상처로 엉망이었지만, 그들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서린이 멍한 눈으로 소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운아…… 네가 정말로…… 저 산귀를 잡은 거야?”
소운은 대답 대신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검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었다. 역맥 수련의 부작용으로 전신의 경맥이 다시금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울컥 치솟는 피를 간신히 삼켜내며 그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그에게만 보이는 눈 익은 금빛 글귀가 떠오르고 있었다.
【 흑풍채 토벌 완료. 운명의 강제 개변 발생. 】
【 공덕 +10 획득. 】
【 현재 부채 잔액: 43 / 100 】
소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상해. 산적을 토벌하고 미래의 비극을 막아냈는데, 왜 부채 수치가 줄어들지 않는 거지?’
인과를 바로잡고 과업을 완수하면 당연히 빚이 탕감되어야 했다. 하지만 장부의 숫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였다.
골짜기 저편, 불타는 막사 그늘 속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소운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쓰러진 시체들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채 밧줄을 풀고 도망치려던 부두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두목의 그림자 뒤에…… 칠흑 같은 로브를 걸친 의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스읍-.
검은 로브의 인물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휘익—!
형체도 없는 투명한 기도가 화살처럼 날아와, 도망치던 부두목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부두목은 단 한 마디의 비명도 남기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즉사했다.
“누구냐!”
소운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겨누었다.
검은 로브의 인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깊은 후드 아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창백한 입술가에 걸린 비릿한 조소만큼은 선명했다.
그는 소운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볍게 원을 그렸다. 마치 무언가를 옮기기라도 하듯이.
그 순간, 소운의 눈앞에 떠 있던 장부의 수치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경고: 주변의 인과가 강제로 전가되었습니다. 】
【 초과된 부채의 일부가 타인에게 전가됩니다. 】
“크으윽……!”
소운이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충격이 내리꽂혔다.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소운 혼자 감당해야 할 운명의 빚이, 그가 지켜낸 소중한 사람들――진무겸과 백서린의 운명 속으로 독니처럼 파고들고 있다는 경고였다. 내가 바꾼 미래의 대가가 타인에게 전가되는 끔찍한 인과의 굴레.
검은 로브의 인물은 소운에게 기괴한 손짓을 남긴 채,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이 잦아들고, 흑풍산에는 오직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와 세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소운은 이를 악물며 다시 떠오른 장부를 노려보았다.
【 현재 부채 잔액: 48 / 100 】
【 다음 청구까지 남은 시간: 24시간 】
빚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그리고 그 서늘한 화살촉은 이미 청운문 전체의 운명을 겨누고 있었다. 소운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승리의 기쁨은 없었다. 오직 더 거대한 어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