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미래를 판 대가
청운문(靑雲門)의 대청마루는 이미 문파의 위엄을 잃은 지 오래였다. 서까래 곳곳에 낀 거미줄과 칠이 벗겨진 기둥은 쇠락한 문파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낡은 마루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잔인하게 삼류 문파의 마지막 자존심을 도려내고 있었다.
“백 장문인, 자꾸 이러시면 우리로서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청운문 같은 구멍가게에 언제까지 상단의 귀한 자산을 묶어둘 줄 아셨습니까? 돈이란 건 말입니다, 고여 있으면 썩는 법이고 흘러야 살이 붙는 법이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철검표국(鐵劍鏢局)의 부표두, 마칠성(馬七星)이었다. 산만한 체구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칼자국은 그가 거쳐온 험한 세월을 증명하듯 번들거렸다. 그는 거칠게 차를 들이켜더니, 찻잔을 마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챙그랑!
사기그릇이 비명을 지르며 박살 났다. 맑게 울리는 파편 소리가 정막한 마당에 가득 찼다. 마당에 도열한 청운문의 제자들은 그 소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는 주먹을 너무 꽉 쥔 나머지 손등의 정맥이 터질 듯 솟아올랐고, 누군가는 차마 앞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마칠성을 향해 검을 뽑지 못했다. 철검표국은 산서성 일대에서 무력과 재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거대 집단이었다. 반면, 지금의 청운문은 스승의 병수발과 기근으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무력의 격차는 이미 의지나 기개만으로 넘을 수 없는 절벽이 되어 있었다.
대청마루 안쪽, 장문인 백도현은 흙빛이 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때 산서성에서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고결한 무인으로 칭송받던 그였으나, 문파의 존폐가 걸린 빚 독촉 앞에서는 그저 초라한 노인일 뿐이었다. 백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빈 찻잔을 매만지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마 부표두, 기한을 조금만 더 주실 수는 없겠소? 분명 본래의 계약서에는 다음 달 그믐날까지로 명시되어 있었지 않소. 한 달…… 아니, 보름만이라도 시간을 주신다면 어떻게든 방도를……”
“계약? 하! 백 장문인,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군.”
마칠성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대청을 짓눌렀다. 그의 등 뒤에 선 두 명의 표사들이 낄낄거리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툭툭 쳤다. 노골적인 멸시였다.
“흑련회(黑蓮會)와의 교역로가 넓어지면서 우리 철검표국도 당장 회전시킬 자금이 급해졌단 말입니다. 애초에 갚을 능력이 안 되면 문파 간판을 내리는 게 순리 아니겠소? 언제까지 구차하게 구걸로 연명하실 작정입니까. 자, 해는 이미 중천을 지났고 우리에게 남은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해질녘까지 은화 삼백 냥을 내놓지 못한다면, 당장 이 청운문 땅문서를 넘기셔야 할 겁니다.”
마칠성이 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못 가져오면 이 터는 오늘부로 우리 표국의 말뚝을 박는 마구간이 될 것이니 그리 아쇼.”
그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려던 그때였다.
“누가 마구간이 된다는 겁니까?”
나직하지만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목소리가 마당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일순간 모든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쏠렸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남루한 잡역부의 복색, 채 닦지 못한 핏자국이 뺨에 말라붙은 소년. 청운문에서 가장 천한 대우를 받으며 허드렛일을 도맡던 한소운이었다.
마칠성의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무림맹의 공문이라도 오가는 엄숙한 자리에 어디 하찮은 잡역부 놈이 기어 나와서 주둥이를 놀려?”
옆에 서 있던 진무겸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운아, 물러서라!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어서 부엌으로 돌아가!”
진무겸의 목소리에는 동생 같은 소운이 화를 입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소운은 대사형의 만류를 가벼운 눈짓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걸음걸이는 기이할 정도로 곧고 단단했다. 조금 전까지 심한 내상으로 비틀거리던 소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세였다.
소운의 시선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마칠성의 허리춤에 차인 표패와 오른손 엄지에 끼워진 번쩍이는 옥가락지를 응시했다.
‘철검표국 부표두 마칠성. 회귀 전, 그는 청운문을 강탈한 뒤 서린이와 제자들을 흑련회 사창가로 팔아넘긴 흑련회의 충견 중 하나였지.’
소운의 심장 근처에서 차가운 증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복수가 우선이 아니었다.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흑룡강 폐광의 심처, 어둠 속에서 목숨을 걸고 채굴한 순은 원석 덩어리였다.
툭.
소운이 마칠성의 발치 앞에 그것을 던졌다. 흙바닥과 부딪히며 둔탁하고 무거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이게 뭐냐?”
마칠성이 인상을 쓰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거무튀튀한 돌덩이처럼 보였으나, 정오의 햇살을 받은 단면에서 찬란한 은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마칠성의 눈이 경련하듯 커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원석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묵직한 무게감과 차가운 질감에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 이건? 순은 원석? 이 크기가 전부 순은이라고?”
“눈은 달렸나 보군.”
소운이 팔짱을 낀 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청운문이 빚을 못 갚을 거라고 착각한 모양인데, 계산은 똑바로 합시다. 우리가 진 빚은 원금과 이자를 모두 합쳐 은화 삼백 냥. 그리고 이 원석 하나면 그 가치의 오백 냥은 족히 넘지. 거스름돈은 됐으니, 남은 차액은 영수증으로 끊어오고 당장 이 문파의 땅문서를 가져와 내 눈앞에서 태워버려.”
마칠성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 쇠락한 문파가 비참하게 몰락하여 거리에 나앉는 것을 즐기려 왔지, 이런 생생한 순은 원석을 대놓고 집어던지는 광경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 너 같은 천한 놈이 이런 보물을 어디서 구했지? 이거 설마 어디 상단이라도 털어서 훔쳐 온 거 아니야?”
마칠성이 목소리를 높이며 살기를 뿜어냈다. 위협을 가해 원석의 출처를 캐내고 소운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려는 수작이었다. 주변의 표사들도 칼자루를 반쯤 뽑아 들며 소운을 포위했다.
그러나 소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가 마칠성의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
“훔치긴 뭘 훔쳐. 산서성 북쪽 깊은 골짜기, 아무도 모르는 폐광에서 내 손으로 직접 캐낸 거야. 도둑질한 게 켕긴다면 관아에 가든가. 단, 그 원석을 들고 관아에 가는 순간, 흑련회와의 뒷거래로 세금을 탈루하고 장부를 조작해온 철검표국의 비리가 천맹(天盟)의 감찰단 귀에 들어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마칠성의 전신이 굳어버렸다. 흑련회와의 결탁은 철검표국이 목숨처럼 숨겨야 할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삼류 문파의 이름 없는 잡역부 입에서 그 비밀이 흘러나오는 순간, 마칠성의 머릿속에는 거대한 공포가 소용돌이쳤다.
“이, 이 자식이…… 어디서 감히……!”
“돈을 받았으면 꺼져. 눈치 없게 계속 알랑거리겠다면, 오늘 밤 내로 철검표국의 비밀 장부 복사본이 감찰단 숙소에 도착하게 해줄 테니까.”
소운의 목소리에 실린 서늘한 위압감에 마칠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손에 쥔 순은 원석을 으스러지게 쥐며 소운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치고 싶었으나, 소운의 눈빛은 이미 모든 패를 읽고 있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좋다! 오늘 일은 내 똑똑히 기억해 두마. 철검표국이 이대로 물러설 줄 알지 마라!”
마칠성은 이를 갈며 부하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철수한다! 당장 꺼져!”
표사들은 씩씩거리며 마당을 빠져나갔다. 마칠성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소운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주며 비웃음을 보냈다.
쾅!
청운문의 낡은 정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잠시 동안, 마당에는 기이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당을 가득 채우던 무거운 압박감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와아아……!”
제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살았다! 청운문이 지켜졌어!”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껴안았고, 누군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차가운 길바닥으로 쫓겨날 뻔한 멸문의 위기가,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소년의 손에 의해 뒤집힌 것이다.
대청마루에 서 있던 백도현 장문인 역시 온몸에 힘이 빠진 듯 휘청거렸다. 진무겸이 급히 그의 팔을 부축했다. 백도현은 떨리는 눈으로 마당 한가운데 선 소운을 바라보았다.
“소운아…… 네가, 대체 그 귀한 물건을 어디서……”
“장문인 어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소운이 싱긋 웃으며 마루로 올라섰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차가운 시스템의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공덕 +10 획득 】
【 문파의 멸문 위기를 막아냈습니다. 인과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립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57 / 100 】
‘뭐라고? 부채가 왜 또 올랐어?’
소운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흑룡강 폐광에서 은을 캤을 때 47이었던 부채가 57로 껑충 뛰어올라 있었다. 빚을 갚아 위기를 넘겼는데 오히려 하늘의 빚은 늘어난 셈이었다.
【 경고: 철검표국과의 갈등을 강제로 앞당겨 해결하고, 강호의 예정된 세력 판도를 인위적으로 비틀었습니다. 미래 지식을 통한 '부당한 이득'에 대한 대가가 가중되었습니다. 】
‘빌어먹을. 빚을 갚았는데 미래를 너무 크게 건드렸다고 이자를 더 매기네? 이거 완전 고리대금업자잖아.’
소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미래를 바꾸면 바꿀수록 그는 강해지겠지만, 동시에 천명이 내리는 이자의 압박도 비례해서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혼자서 모든 것을 바꾸려다가는 부채가 100을 채우기도 전에 추심의 고통으로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운아.”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소운의 상념을 끊었다.
뒤를 돌아보자, 백서린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청운문의 소문주이자 대제자인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깊은 의구심, 경계, 그리고 그 너머에 숨겨진 형용할 수 없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백서린은 소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매화향이 났지만, 기세만큼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소운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넌 누구지?”
백서린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산서성 북쪽 골짜기에 은광이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철검표국이 오늘 어떤 명분으로 들이닥칠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어. 이건 단순히 잡역부의 눈썰미로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대답해, 한소운. 너는 우리가 알던 그 소운이가 맞나?”
주변의 제자들과 진무겸까지 그 대화에 숨을 죽였다. 방금 전까지는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소운의 행동은 상식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평범한 잡역부가 무림 거대 세력의 비리를 꿰뚫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은광의 위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진무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운아, 너 비무 때 보여준 그 보법과 눈빛은 대체 어디서 익힌 거냐? 장문인께서도 가르치신 적이 없는 무공이었어. 너, 정말 누구냐?”
소운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여기서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서린과 무겸의 눈은 이미 확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귀 전, 20년의 세월 동안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고 지옥을 구르다 비참하게 죽었던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한 채 혼자 감당하려다 결국 소중한 이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장부의 규칙이 뇌리를 스쳤다. 소운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 그리고 서린아.”
소운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진지한 태도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소운은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먼 하늘을 응시하며 낮게 속삭였다.
“내가 하는 말,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잘 들어줘.”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진실을 내뱉었다.
“내가 이 문파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이유는 하나야. 5년 뒤, 이 청운문은 혈월교(血月敎)의 손에 하룻밤 사이 잿더미가 될 거다. 나는…… 그 지옥을 이미 한 번 겪어봤거든.”
마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제자들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지만, 백서린과 진무겸은 소운의 눈빛에 담긴 깊은 슬픔과 서늘한 공포를 읽고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연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수만 번의 죽음을 목도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메마른 안광이었다.
“너……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소리야. 믿기지 않겠지. 나도 처음엔 내 정신이 나간 줄 알았으니까.”
소운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영혼에는 천명장부의 무거운 사슬이 감겨 있었다.
【 현재 부채 잔액: 57 / 100 】
【 공동의 인과를 나누기 위한 조건이 형성되었습니다. 】
“하지만 혼자서는 못 갚아. 철검표국 따위는 서막에 불과해. 앞으로 닥칠 일들에 비하면 이건 장난 수준이지.”
소운이 고개를 들어 서린과 무겸을 차례로 응시했다.
“살고 싶다면, 그리고 이 문파를 정말로 지키고 싶다면…… 이제부터 내 말대로 움직여야 할 거다.”
차가운 바람이 청운문의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잡역부 소년의 입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고백은, 청운문을 완전히 새로운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장문인 백도현은 주름진 손으로 마루를 짚은 채 소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제자가 광증에 걸린 것인지, 아니면 거대한 충격으로 헛것을 보는 것인지 가늠하려는 혼란이 가득했다.
“소운아……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 거냐? 5년 뒤에 멸문이라니, 그런 불길한 소리는……”
“불길하다고 외면하면 진짜 현실이 됩니다.”
소운이 장문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스승에게 품어서는 안 될 서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철검표국이 원래 언제 움직여야 했습니까? 다음 달 그믐입니다. 하지만 오늘 들이닥쳤죠. 왜 그랬겠습니까? 제가 은광을 캐내고 빚을 갚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세상의 흐름이 뒤틀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가 알던 궤도를 벗어났어요.”
진무겸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 말이 진짜라면…… 증거를 대봐. 네가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
소운이 피식 웃었다.
“대사형. 오른쪽 어깨 안쪽에 삼 년 전 사파 놈들과 붙었을 때 생긴 칼자국이 있죠? 뼈가 잘못 붙어서 비가 오는 날이면 팔을 제대로 못 들 겁니다. 그리고 서린아, 너는 작년에 백서검법(白瑞劍法)의 칠식 초식을 무리하게 수련하다가 단전에 기의 역류를 겪었어. 지금도 매달 초하루만 되면 가슴이 찢어질 듯 답답할걸?”
백서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건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내 눈에는 다 보이니까.”
소운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너희의 고통도, 이 문파의 썩어 빠진 재정도, 그리고 5년 뒤에 흑련회와 혈월교가 어떤 잔인한 방법으로 이 마당을 피로 물들일지도 전부 다. 내 말을 믿지 않겠다면 좋습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짐 싸서 하산하십시오. 그게 여기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소운의 태도는 단호하고 냉정했다. 구걸하듯 설득할 마음은 없었다. 20년의 지옥을 겪으며 배운 진리는, 남을 설득할 시간에 자신의 발목을 잡을 족쇄를 하나라도 더 풀어내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뿐이었다.
진무겸이 짐승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미치겠군…… 진짜 미칠 노릇이야.”
그는 소운의 말이 거짓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방금 보여준 기이한 통찰력과 순은 원석, 그리고 철검표국을 압박하던 그 기개는 도저히 잡역부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 백서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걷히고, 청운문 제일의 재능이라 불리는 이성적인 빛이 돌아왔다.
“좋아.”
서린이 낮게 말했다.
“네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사실인 건, 철검표국은 이미 우리를 적대하고 있고 문파는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거야. 만약 네가 정말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지?”
소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역시 백서린이었다. 훗날 혈월교의 '혈월검희'가 되어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녀였지만, 그 강인한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첫째. 문파의 모든 수련 방식을 바꾼다. 지금처럼 춤추듯 검을 휘두르는 짓은 끝이야. 실전에서 단 한 번의 자상으로 상대를 죽이는 법부터 배워야 해. 특히 대사형, 당신의 그 정석적인 검법은 당장 버려야 합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진무겸이 발끈했지만, 소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둘째. 흑련회와 남궁가(南宮家)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합니다. 철검표국 뒤에서 이 판을 짜고 있는 진짜 괴물이 누구인지 찾아내야 하니까요.”
소운이 두 사람 앞에 손을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천명장부의 잔액이 그의 뇌리를 선명하게 스쳤다.
【 공동의 인과를 나누기 위한 조건이 형성되었습니다. 】
【 현재 부채 잔액: 57 / 100 】
【 경고: 혼자 짊어지던 빚이 타인에게 전가되기 시작합니다. 인과의 무게를 분산하시겠습니까? 】
‘분산한다면…… 나 혼자 터져 죽지는 않겠지.’
소운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이 지옥 같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희망이었다.
“혼자서는 이 빚을 못 갚습니다. 하지만 함께라면…… 이 하늘의 장부 따위, 갈기갈기 찢어발겨 줄 수 있어.”
진무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으나, 이내 묵직한 한숨과 함께 소운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투박한 손을 얹었다.
“……돌아버리겠군. 내가 미쳤지, 잡역부 놈의 장단에 놀아나다니.”
백서린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위로 손을 포갰다. 차갑고도 단단한 그녀의 손길이 소운의 손등을 감싸 안았다.
청운문의 낡은 마당 위, 세 사람의 손이 겹쳐진 순간.
하늘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운명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 공동 장부가 활성화됩니다. 】
【 참여자: 한소운, 진무겸, 백서린. 】
【 부채가 분산됩니다. 현재 개인 부채: 35 / 100 】
순간, 소운의 육신을 짓누르던 극심한 내상의 통증이 단숨에 씻겨 내려갔다. 폐부 깊숙이 고여 있던 피비린내 나는 기운도 사라지고, 대신 맑은 영기(靈氣)가 그 자리를 채웠다.
소운은 고개를 들어 시퍼렇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서성을 삼키려는 어둠은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쳐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 시작합시다.”
소운의 입가에 날카로운 검광 같은 미소가 서렸다.
“빚을 갚을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