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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3화목차

3장 미래를 판 대가

“……무슨 소리입니까, 서린 아씨.”

소운은 경련하려는 입매를 억지로 붙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 정중앙을 서늘한 송곳이 꿰뚫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잔상은 지독하리만치 선명했다. 회귀 전, 청운문의 대들보가 무너지고 매캐한 불길이 하늘을 뒤덮던 그 비극의 밤. 혈월교(血月敎)의 잔혹한 도신에 가슴이 꿰뚫린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가던 백서린의 마지막 눈빛. 절망과 공포로 얼룩져 흐릿해지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서슬 퍼런 예지(銳智)를 머금은 채 소운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백서린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고 왔다. 이제 겨우 십오 세.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의 눈매에는 짙은 그늘과 날카로운 통찰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소운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부하듯 훑어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는 빗자루 하나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잡역부였어. 마당을 쓸다가도 넋을 놓고 하늘을 보기 일쑤였고, 제자들이 연무를 할 때면 부러움 반, 포기 반 섞인 눈으로 구경이나 하던 녀석이었지. 그런데 오늘 아침의 너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 아니, 껍데기만 같을 뿐 알맹이가 통째로 바뀐 느낌이야. 대사형의 초식을 미리 읽고 움직였지? 그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 될 일이 아니야. 마치 수십 번, 수백 번은 같은 초식에 부딪혀 본 사람처럼 노련했어.”

“아씨, 과찬이십니다. 제가 살고자 하는 집념이 좀 남달라서 그렇습니다. 잡역부로 지내면서도 어깨너머로 형님들의 검세를 눈여겨보았고, 죽기 살기로 머릿속에서 그려보았을 뿐입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우연히 보인 것이지요.”

“거짓말.”

백서린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그 안에 담긴 확신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사람의 눈빛은 결코 속일 수 없는 법이야. 너는 지금…… 무언가 거대한 것에 쫓기는 자의 눈을 하고 있어. 절벽 끝까지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동시에 그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억지로 틀어막으려고 온몸을 던지는 눈이야. 그건 단순히 대사형의 검을 피했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눈이 아니야.”

소운의 입이 무겁게 다물어졌다. 침묵이 흐를수록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기서 더한 부정은 도리어 확신을 줄 뿐이었다. 백서린은 청운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검재(劍才)를 타고난 천재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세한 기류의 변화와 사람의 기색을 읽어내는 그녀의 동물적인 감각은 이미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소운은 쥐고 있던 목검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변을 살피니, 연무장의 제자들은 여전히 진무겸의 패배라는 충격적인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패배의 당사자인 진무겸 또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소운을 괴물이라도 보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소운은 고개를 숙여 백서린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씨가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정말로 살아남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이 문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말입니다.”

“살아남아? 마치 우리가 조만간 누구에게 죽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

“내일 일도 모르는 게 강호의 생리 아닙니까. 평화로워 보이는 산서 외곽이라 해도, 당장 내일 사파의 무리가 몰려오거나 대문파의 알력 싸움에 휘말려 잿더미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백서린의 맑은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소운의 목소리에 실린 기이한 확신과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읽어낸 까닭이다.

“……너는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아는 게 아니라, 두려운 겁니다. 그 두려움이 저를 움직이게 할 뿐입니다.”

소운은 서린의 어깨 너머로 청운문의 낡고 빛바랜 정문을 바라보았다.

기획서의 기록대로라면, 이 평화롭고 고즈넉한 삼류 문파가 혈월교의 발길질 한 번에 잿더미로 변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5년. 하지만 이미 소운이 대사형의 운명을 비틀어버린 이상, 역사의 나비효과는 시작되었다. 천명장부의 개입으로 인해 그 파멸의 시계추는 훨씬 빠르게 돌아갈지도 몰랐다.

“서린 아씨. 만약…… 정말로 만약의 일입니다만.”

소운이 서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에는 수십 년을 풍찬노숙하며 다져진 노회함과 결연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문파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에 처한다면, 아씨는 저와 함께 도망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이곳에 남아 운명을 함께하시겠습니까?”

백서린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으나, 입술을 달싹일 뿐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장문인의 외동딸이자 문파의 자존심으로 자라온 그녀에게 문파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동자 자체가 이미 가장 명확한 대답이었다.

스윽.

소운은 더 이상 대답을 종용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서린의 의심을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단순한 잡역부 소운이 아닌, 무언가 대비해야 할 변수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안도할 겨를은 없었다.

【 미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비틀어 대사형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

【 부채 잔액: 22 / 100 】

지끈.

머릿속을 대못으로 박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단전에 응축되어 있던 거친 기운이 역류하며 경맥의 내벽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곽노에게 전수받은 금단의 수련법, 역맥(逆脈) 수련법으로 억지로 뚫어놓았던 혈도가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젠장…… 부채 상한선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반동이 오다니.’

소운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제자들의 거처에서 떨어진 낡은 창고로 향했다.

현재 청운문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파산 직전의 참담한 수준이었다. 문도 마흔 명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고, 장문인 백도현의 머리카락은 하루가 다르게 세어가고 있었다.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청운문 멸문의 도화선은 외부의 침공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산서의 대부호이자 비밀리에 사파 조직인 흑련회(黑蓮會)와 결탁한 ‘철검표국’에 진 막대한 부채가 문파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빚부터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어.’

창고 구석,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가마니 위에 주저앉은 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회귀 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강호의 정보상들에게서 목숨값으로 얻어냈던 비기(秘記) 중 하나였다. 산서성 북쪽 끝, 흑룡강 자락에 방치된 이름 없는 폐광. 본래 삼류 문파 하나가 채굴권을 가지고 매달렸으나, 은(銀)이 고갈되었다고 판단되어 버려진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폐광의 가장 깊숙한 막다른 벽 너머에, 아직 손대지 않은 거대한 순은(純銀) 맥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곳을 선점하면 청운문의 모든 빚을 갚고도 문파를 재건할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금기가 있었다.

그 은광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년 뒤다. 천명장부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부(富)를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현재로 끌어오는 행위는 명백한 ‘인과의 도둑질’이었다.

치익-

허공에 타오르는 듯한 황금빛 글자가 명멸하며 나타났다.

【 경고: 3년 뒤에 발현될 은맥 정보를 이용해 부당한 부를 취하려 시도 중입니다. 】

【 천명장부는 세상의 인과율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에 엄격한 이자를 부과합니다. 】

【 은광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여 자산을 취득할 시, 인과 부채 +25가 즉시 추가됩니다. 】

“……미치겠군. 도둑질이라니. 이건 문파를 살리기 위한 정당한 방편이다.”

소운은 이를 악물었다.

현재 부채 22인 상태에서 25가 더해지면 총 47이 된다. 상한선인 100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다. 만약 이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 추가적인 부채가 발생한다면, 언제 장부의 ‘추심(推尋)’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철검표국이 청운문의 목줄을 죄어오는 속도는 소운의 예상보다 훨씬 빠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빚을 져서라도 살아야지. 죽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소운은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진 야심한 시각. 소운은 그림자처럼 청운문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산서성 북부, 흑룡강의 차가운 물줄기가 굽이치는 험준한 산맥.

살을 에어내는 듯한 밤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황량한 오지였다.

소운은 품속에 곡괭이 대신 묵직한 쇠망치와 정을 품은 채 가파른 암벽을 기어올랐다. 태생적으로 사맥체(死脈體)였던 몸을 역맥 수련으로 강제로 개조한 터라, 무리한 움직임이 이어질 때마다 다리 안쪽의 경맥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내뿜었다.

“크으윽…….”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이 눈을 가렸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진동했다.

하지만 소운은 멈추지 않았다. 회귀 전 20년 세월 동안 길바닥에서 개처럼 구르며, 자존심과 목숨을 구걸하며 살았던 그 비참한 기억들이 소운의 등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 지옥 같은 삶으로 돌아가느니, 여기서 경맥이 터져 죽는 편이 나았다.

얼마나 헤맸을까.

달빛조차 닿지 않는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짐승의 아가리처럼 흉물스럽게 입을 벌린 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속 정보상이 말했던, 버려진 은광의 입구였다.

소운은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동굴 내부로 발을 들였다.

축축한 흙내음과 무언가 썩어가는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미리 준비한 횃불을 밝히고 한참을 기어 들어갔다. 과거의 광부들이 파헤치다 포기한 거친 바위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다. 이 벽 너머에…….’

소운은 벽면에 조심스럽게 손을 짚었다.

기억을 더듬어 정을 대고, 온 힘을 다해 쇠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둔탁한 타격음이 동굴 내부를 울리며 메아리쳤다.

수십 번의 타격 끝에 단단해 보이던 바위 껍데기가 비명을 지르며 쩍 갈라졌다. 그 틈새로 횃불의 미약한 불빛을 받아 기이하게 번뜩이는 존재가 있었다. 인위적인 빛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은은한 광택을 내뿜는 회백색의 금속 맥.

순은(純銀)이었다. 그것도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최상급 원석이 거대한 맥을 이루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소운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정도의 매장량이라면 철검표국에 진 모든 빚을 일시에 상환하고도 남을 액수였다. 문파의 재정을 완전히 정상화하고, 제자들의 해진 도복과 무딘 병장기들을 모두 교체할 수 있는 막대한 자산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 미래의 중대한 자산을 선점하여 문파의 경제적 파멸을 저지했습니다. 】

【 인과 부채 +25 획득. 】

【 현재 부채 잔액: 47 / 100 】

【 경고: 감당할 수 없는 인과의 무게가 사용자의 단전을 압박합니다. 잠시 후 '가벼운 추심'이 집행됩니다. 】

“뭐……? 가벼운…… 추심이라고?”

소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아직 부채 상한선의 절반도 채우지 않았는데 벌써 추심이 시작된다는 말인가. 경고의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인과율의 심판이 소운을 덮쳤다.

콰구구구궁-!

동굴 전체가 거대한 거인의 발길질을 당한 듯 기이하게 진동했다.

단순한 지각 변동이 아니었다. 마치 하늘이 이 금지된 장소에 발을 들인 불청객을 응징하려는 듯, 천장에서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피해……!”

소운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구르기도 전, 집채만 한 바위가 굉음과 함께 동굴의 유일한 퇴로를 완전히 봉쇄해버렸다.

연이어 터져 나온 폭음과 함께 동굴 내부가 자지러질 듯 흔들렸고, 자욱한 흙먼지가 시야를 가려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입안에서 뜨거운 선혈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바위에 깔린 고통이 아니었다. 역맥 수련으로 간신히 이어붙였던 왼쪽 팔과 어깨의 경맥들이 추심의 충격으로 인해 툭, 툭 끊어지는 감각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크아아악……!”

소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핏물을 토해냈다.

전신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전에서 요동치던 내력은 온데간데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극심한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것이 바로 천명장부의 추심이었다.

미래를 훔쳐온 대가는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하늘의 섭리는 단 한 푼의 빚도 그냥 넘기지 않았으며, 자비 없는 이자를 붙여 정확히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고통을 되돌려주었다.

소운은 차가운 동굴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서 흐릿하게 명멸하는 황금빛 글자가 마치 사악한 고리대금업자의 웃음처럼 깜빡였다.

【 부채 잔액: 47 / 100 】

【 첫 번째 추심 행위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정기 청구까지 남은 시간: 48시간. 】

【 주의: 다음 추심은 사용자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마지막 문장이 소운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빚이 청운문의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대사형 진무겸인가, 아니면 백서린인가. 아니면 장문인인가.

“……나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려고 돌아온 것인데…….”

소운은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이를 악물었다.

입가에는 자조 섞인 쓴웃음이 번졌다. 강호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빚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막혀버린 퇴로를 향해, 소운은 실눈을 뜨며 처절하게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틀 뒤, 청운문 후원의 낡은 창고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초췌하다 못해 유령 같은 몰골의 소운이 벽을 짚으며 기어 나왔다. 입가에는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고, 걸음걸이는 갓 태어난 짐승처럼 위태로웠다. 동굴의 무너진 잔해를 맨손으로 파헤쳐 탈출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고, 추심이 남기고 간 내상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독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군…….’

소운은 마당 구석의 우물가로 다가가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퍼서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서늘함 속에서 소운은 자신의 단전을 살폈다. 억지로 열어두었던 경맥들이 반동으로 인해 다시 폐쇄되려 하고 있었으나,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지독한 고통을 견뎌낸 덕분인지, 몸 안의 기운은 이전보다 한층 더 묵직하고 예리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그때, 연무장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대사형 진무겸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장문인의 처소에서 급히 달려온 듯한 어린 제자 하나가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너, 이 자식……! 이틀 동안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진무겸이 소운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다가, 그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어디서 사파 놈들이라도 만나서 몰매라도 맞은 거냐?”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사형.”

소운이 쉰 목소리로 대답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개인적인 사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문파가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다!”

진무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오만함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깊은 절망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철검표국 놈들이야! 그 개망나니 같은 놈들이 오늘 아침 일찍 문파로 사람을 보냈어. 원래 다음 달까지 갚기로 했던 채무 유예를 무시하고, 당장 오늘 해 질 녘까지 원금과 이자를 모두 상환하지 않으면 청운문의 정문 현판과 땅문서를 압류하겠다고 통보했다니까!”

철검표국.

산서성 전역의 물류를 장악한 거대 조직이자, 어둠 속에서는 흑련회와 손잡고 힘없는 문파들을 사냥하는 포식자들. 원래 역사대로라면 그들이 본격적으로 압박을 시작하는 것은 석 달 뒤여야 했다. 소운이 은광을 선점하며 미래를 바꾼 결과, 그들의 침탈 시기가 대폭 앞당겨진 것이다.

‘인과의 파동이 이토록 빠르단 말인가…….’

소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이 앞당겨졌다면, 갚을 자금 또한 이미 소운의 손안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형.”

소운이 핏기 없는 입술을 끌어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장문인 어른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대청마루에 계셔. 철검표국에서 보낸 사자들이 지금도 거실에서 고함을 지르며 장문인 어른을 모욕하고 있단 말이다! 이 판국에 너는 웃음이 나와?”

“웃는 게 아닙니다. 살길을 찾았기에 안도하는 것이지요.”

소운은 멍하니 서 있는 진무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청마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품속에는 흑룡강 폐광에서 목숨을 걸고 캐낸, 가장 순도가 높고 묵직한 순은 원석 덩어리가 들어차 있었다.

【 부채 잔액: 47 / 100 】

【 위기를 넘기기 위한 필사의 대가가 치러졌으나, 인과의 파문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

망막을 가로지르는 황금빛 문구를 서늘하게 무시하며, 소운은 청운문의 명운이 걸린 대청마루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기어코 찾아온 파멸의 서막을, 그는 이제 자신의 방식대로 뒤집어엎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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