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장부의 첫 청구
산서(山西)의 밤을 할퀴던 장우(長雨)가 멎었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새벽안개가 청운문(靑雲門)의 퇴락한 기와지붕 위로 유령처럼 희뿌옇게 내려앉았다. 낡은 목조 건물의 서까래에서는 미처 흐르지 못한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며 정적을 깼다.
새벽 공기는 폐부 깊숙이 시릴 만큼 서늘했으나, 젖은 흙냄새와 섞여 묘한 생동감을 풍겼다. 한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바닥을 천천히 펼쳐 보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칼자루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해 물집이 터지고 짓물렀던, 보잘것없는 잡역부의 손이었다. 굳은살조차 제대로 박이지 못했던 그 연약한 살결 위로 지금은 전혀 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피부 밑, 깊숙한 곳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가뭄에 메말라 거북등처럼 갈라졌던 논바닥에 차가운 지하수가 소리 없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막혔던 구멍이 뚫리고, 끊겼던 길이 이어지는 생소하고도 압도적인 감각.
투둑.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마당 귀퉁이의 물웅덩이에 닿았다. 그 작은 파열음이 마치 귓가에서 종을 울리는 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오감(五感)이 전례 없이 확장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경맥(經脈)이 열린 자, 무도(武道)의 문턱을 넘어선 자만이 누리는 세계인가.
사맥체(死脈體)라는 잔인한 저주 아래 스무 해를 살았다. 숨을 들이쉬는 행위조차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었던 육신이었다. 그것이 단 하룻밤 만에, 정체 모를 장부의 보상 하나로 천지개벽하듯 뒤바뀐 것이다.
“거기 멍청하게 서서 제 손바닥이나 핥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꼬마야.”
목재 창고 뒤편, 비에 젖어 거뭇해진 평상 위에서 걸걸하고 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제 소운이 제 목숨을 담보로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구해냈던 노인, 곽노였다.
겉모습은 그저 산속에서 도라지나 캐며 연명하는 초라한 약초꾼에 불과해 보였다. 땟자국이 절은 베옷을 대충 기워 입고, 숱이 적은 머리칼을 대충 묶어 올린 행색은 무림 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소운은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의 굽은 등 뒤에 어떤 전설이 숨겨져 있는지.
회귀 전, 강호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을 전전하며 주워 들었던 기인(奇人)들의 일화. 삼십 년 전 천맹(天盟)의 비밀 의원이자, 기이하다 못해 광기 어린 역맥(逆脈) 수련법으로 한때 정사(正邪) 양파를 경악하게 했던 은거 고수. 그가 바로 눈앞의 저 노인이었다.
곽노는 입에 낡은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큭큭 내뱉고 있었다. 어제 부러진 나무 기둥에 치여 생긴 다리의 멍이 시퍼렇게 죽어 있었지만, 연기 사이로 드러난 노인의 눈빛만큼은 새벽의 성채(星彩)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소운은 얼떨떨한 감각을 갈무리하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일어났소? 다리는 좀 어떻습니까.”
“뼈가 가루가 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지. 그보다 이놈아, 네 몸뚱이가 더 가관이다.”
곽노가 곰방대를 평상 모서리에 탁탁 털어내며 소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어제 나를 구하겠다고 그 무거운 나무 기둥을 밀어낼 때, 네 녀석 단전에서 일어난 파동 말이다. 그건 보통내기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아니, 그전에 너는 선천적으로 경맥이 죄다 비틀리고 막힌 사맥체가 아니었더냐? 청운문 같은 변방의 삼류 문파에서 잡역부 찌꺼기로 처박혀 썩어갈 몸이 아닐 텐데.”
소운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역시 곽노 같은 고수의 안목은 속일 수 없었다. 감각이 예민해진 만큼, 상대가 뿜어내는 은연중의 압박감도 더 크게 다가왔다.
“알아봐 주니 영광이군요.”
“영광은 개뿔. 너, 그 몸뚱이 네 힘으로 뚫은 거 아니지? 내공을 정순하게 전수받은 것도 아니고, 뭔가……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기이한 힘으로 강제로 혈도를 쑤셔 박은 느낌이야. 지금 당장은 멀쩡해 보이겠지. 하지만 잘못하다간 주화입마로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 죽기 딱 좋은 꼴이다.”
예리하다 못해 잔혹한 지적이었다. 소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곽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 노인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중입니다. 방법이 있겠지요.”
“흐음. 당돌한 녀석.”
곽노가 픽 웃으며 품속을 뒤적이더니, 누렇게 바래고 구석이 쥐 파먹은 듯한 종이쪼가리 몇 장을 던졌다. 바닥에 툭 떨어진 종이에는 기이한 혈도와 기의 흐름이 마치 광인의 낙서처럼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그게 뭡니까?”
“네놈이 어제 억지로 뚫어버린 그 불안정한 경맥을 유지하고, 그 좁아터진 단전에 내공을 억지로라도 우겨넣으려면 필요한 비술이다. 이름하여 ‘역맥 수련법’. 정통파 무학과는 근본부터 결이 다르지. 기를 순하게 순환시키는 게 아니라, 거꾸로 뒤집고 비틀어서 강제로 경맥을 확장하며 쑤셔 박는 방식이야. 잘못하면 피를 토하고 반신불수가 되겠지만…….”
곽노가 힐끗 소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이 가진 그 정체 모를 괴상한 기운을 다스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정파의 그 점잖은 수련법으로는 백 년을 닦아도 네 몸의 기운을 감당 못 할 테니까. 어때, 배울 테냐?”
그 순간이었다. 소운의 시야 우측 상단, 허공에 익숙한 황금빛 글자가 일렁이며 떠올랐다.
【 새로운 연계 청구가 발생합니다. 】
【 곽노의 제자가 되어 역맥 수련의 기초를 익히십시오. 】
【 보상: 2차 경맥 개통 및 역맥검(逆脈劍)의 초식 전수. 】
【 부채: +15 (총 부채 22 / 100) 】
스윽.
눈앞의 숫자가 7에서 22로 소리 없이 뛰어올랐다.
미래를 바꾸거나, 정해진 운명의 줄기를 비틀 때마다 어김없이 불어나는 빚. 이번에는 무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한번 미래의 자신을 담보로 잡힌 셈이었다.
‘젠장, 이자가 붙는 속도가 가관이군.’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회귀 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청운문이 혈월교(血月敎)의 습격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을 때, 소운은 검 한 번 제대로 쥐어 보지 못한 채 짐승처럼 도망치다 잡혔다. 그 후 20년을 개처럼 살다 비참하게 목이 잘려 나갔다. 그 지옥 같은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강해져야 한다. 부채가 100을 넘겨 파멸하기 전에, 이 거대한 빚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힘과 공덕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소운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거칠게 집어 들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배우지요. 영감님 밑에서 죽기 살기로 굴러보겠습니다.”
“호오, 겁도 없네. 그래, 오늘부터 당장 생지옥을 보게 될 거다. 각오해라.”
청운문의 아침은 본래 잡역부들의 거친 숨소리와 마당을 쓰는 쓸쓸한 빗자루 소리로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한소운! 너 정신 안 차릴래? 오늘 장작 패기 네 몫까지 다 나한테 떠넘기고 어디서 노닥거리다 오는 거야!”
마당 한복판, 커다란 도끼를 들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청운문의 대사형(大師兄), 진무겸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잘 닦인 검소한 도복, 이마에 맺힌 정직한 땀방울까지. 그는 누가 봐도 정석적인 무인의 표본이었다. 회귀 전의 역사에서 진무겸은 혈월교의 선봉대가 문파를 습격했을 때, 제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정문을 홀로 지키다 가장 먼저 싸늘한 주검이 되었던 사내였다.
소운은 곽노의 은신처가 있는 뒷산에서 내려오며 진무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의 감각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도끼를 들면 손발이 후들거리고 숨이 가빴지만, 지금은 단전에 미약하게나마 똬리를 틀고 있는 기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대사형, 오늘 장작은 제가 다 패겠습니다.”
“뭐? 네가 웬일이냐? 맨날 허리가 아프니 뼈가 쑤시니 하면서 도망치기 바빴던 녀석이.”
진무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혀를 차며 도끼를 던져주었다.
소운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도끼를 가볍게 낚아챘다. 손바닥에 닿는 묵직한 무게감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과거라면 그 무게에 휘청거렸을 도끼가, 지금은 마치 가벼운 나뭇가지처럼 느껴졌다.
탁! 파직!
소운이 대충 통나무를 세워두고 도끼를 내리꽂았다.
조준도, 힘 조절도 대충인 듯 보였으나 도끼날은 정확히 나무의 결을 파고들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단단한 참나무 장작이 비명 같은 파열음을 내며 양옆으로 깔끔하게 갈라져 나갔다.
“어……?”
진무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주변에서 마당을 쓸던 다른 제자들도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소운을 바라보았다. 잡역부로 들어와 늘 구석에서 궂은일이나 하며 헐떡거리던 녀석이, 언제 저런 힘을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
소운은 무심하게 도끼를 다시 치켜들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역맥 수련의 즉각적인 효과였다. 정통 내공처럼 단단하고 정순하게 쌓이는 기운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근력을 이끌어내는 데는 이만한 방식이 없었다. 곽노가 알려준 대로 기의 운행을 거꾸로 뒤집자, 가슴 안쪽의 좁은 혈도가 열리며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사나게 퍼져나갔다.
“소운이 너…… 언제부터 그렇게 힘이 좋았지?”
진무겸이 성큼성큼 다가와 소운의 어깨를 툭 쳤다. 격려와 의구심이 섞인 억센 손아귀 힘이었다. 예전 같으면 바닥에 고꾸라졌을 압력이었으나, 소운은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형, 힘만 좋아진 게 아닙니다.”
“뭐? 이 자식이 아침부터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사형한테 대답하는 꼬라지가 아주 당돌해졌어?”
“궁금하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소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진무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 같으면 하극상이라며 나무랐겠지만, 오늘 소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 네놈이 오늘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좋다. 오늘 오후에 검술 훈련이 있으니, 그때 목검으로 나랑 붙어보자. 네가 그동안 쌓인 불만을 다 풀 수 있게 내 직접 상대해 주마.”
주변에서 제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문파의 잡역부가 대사형에게 비무를 신청하다니, 지루한 일상 속에 이만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진무겸은 알지 못했다. 소운이 그저 치기 어린 장난으로 제안한 것이 아님을.
회귀 전의 기억 속에서 진무겸은 재능은 뛰어났으나 지나치게 곧고 융통성이 없어 적의 비열한 함정에 너무나 쉽게 빠졌던 인물이다. 그를 다가올 멸문의 위기에서 살려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목숨을 구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굳어버린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실전의 무서움과 변칙적인 무위(武威)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스윽.
소운의 시야 구석에 다시 한번 장부의 황금빛 글자가 명멸했다.
【 대사형 진무겸과의 비무에서 승리할 시, 청운문의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집니다. 】
【 공덕 +3 획득 가능 】
【 부채 잔액: 22 / 100 】
‘승리하라고? 대사형을 상대로?’
소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비록 역맥 수련으로 경맥을 조금 뚫고 완력을 얻었다 하나, 진무겸은 청운문에서 검을 잡은 지 십 년이 넘은 정식 제자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승산은 희박했다.
하지만 승리하는 방법이 꼭 정정당당한 힘 싸움일 필요는 없었다.
소운에게는 이십 년의 세월 동안 강호의 밑바닥을 구르며 익힌 잔꾀가 있었고, 무엇보다 진무겸 같은 정파 무인들이 평생 알지 못할 ‘살의(殺意)’와 ‘의(意)’의 차이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오후의 연무장.
청운문의 낡은 흙마당 한가운데로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이 운집했다.
“어이, 진짜로 잡역부 한소운이 대사형이랑 비무를 한대!”
“미쳤지. 목검이라도 대사형의 검에 제대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릴 텐데.”
“요즘 쟤 좀 이상하긴 해. 새벽마다 뒷산에서 귀신이라도 만나는 건지.”
웅성거리는 무리 속에서, 유독 차가운 눈빛으로 둘을 지켜보는 한 소녀가 있었다.
청운문 장문인 백도현의 외동딸이자, 문파의 보배라 불리는 백서린(白瑞麟).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흑발에 날카로운 검사(劍士)의 자질을 품은 그녀는, 회귀 전 역사에서 문파가 멸망한 후 혈월교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했던 인물이다. 결국 흑색의 검을 휘두르며 아군을 도륙하던 ‘혈월검희(血月劍姬)’로 타락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소운의 기억 속에 가장 아픈 상처로 남은 이였다.
서린은 품에 목검을 안은 채 소운을 응시했다.
그녀 역시 최근 들어 소운이 무언가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운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하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깊은 연민과 슬픔이 뒤섞여 있어 차마 마주하기조차 버거운 것이었다.
‘저 자식, 대체 무얼 숨기고 있는 거지?’
서린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마당 정중앙에 진무겸이 묵직한 목검을 들고 섰다.
“소운아, 다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싹싹 빌어라. 그럼 장작 패기 일주일은 면제해 줄 테니까.”
진무겸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반면 소운은 가볍고 허름한 목검을 대충 손에 쥐었다. 정석적인 검법의 예(禮)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흐물거리고 나태해 보이는 자세였다.
“사형,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호오, 말은 아주 청산유수구나.”
채앵!
진무겸이 먼저 검을 뽑아 들 듯 휘둘렀다.
청운문의 기초 검법이자 정수인 ‘청운십삼검(靑雲十三劍)’.
바람을 가르는 검기가 매섭게 소운의 어깨를 향해 내리꽂혔다. 군더더기 없는 정석적인 검세였다. 구경하던 제자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대사형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하지만 소운의 눈에는 그 검의 궤적이 지나치게 느리고 투명하게 보였다.
경맥이 열리며 감각이 극대화된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에 의(意)가 담겨 있지 않아.’
진무겸은 단지 배운 동작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적이 어떻게 나올지, 검끝에 어떤 마음을 실어야 할지 모른 채, 오직 문파의 무예서에 적힌 대로만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 아름다운 춤에 가까웠다.
스읍.
소운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곽노에게 전수받은 역맥 수련의 기운이 단전에서 거꾸로 치솟아 올라 오른쪽 팔뚝의 경맥을 무자비하게 두드렸다. 혈관이 터져나갈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탁!
진무겸의 목검이 코앞까지 육박한 순간, 소운의 신형이 기이한 각도로 비틀렸다.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면서도, 디딤발만큼은 정확히 진무겸의 중심축을 향해 파고들었다.
“뭐……?!”
진무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예상치 못한 회피 기동, 아니 파고들기였다.
소운은 물러서는 대신 오히려 적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목검의 옆면으로 진무겸의 손목 혈도를 정확하게 쳐냈다.
딱!
“큭!”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진무겸의 손에서 목검이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바닥을 구르는 목검 소리가 정적에 잠긴 연무장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이어 소운의 목검 끝이 진무겸의 목덜미 바로 한 치 앞에 멈춰 섰다. 서늘한 나무의 감촉이 진무겸의 피부에 닿았다.
연무장은 순식간에 무덤처럼 조용해졌다.
제자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잃었다. 문파 내에서 검술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사형이, 한낱 잡역부의 목검 한 방에 무기를 놓치고 패배한 것이다.
진무겸은 자신의 빈 손바닥과 코앞의 목검을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진 건가?”
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검을 거두었다. 가슴 안쪽에서 역맥 수련의 부작용인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시야에 떠오른 황금빛 글자를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 비무 승리. 대사형의 허점을 찔러 강호의 실전 감각을 일깨웠습니다. 】
【 공덕 +3 획득 】
【 부채 잔액: 22 / 100 】
소운이 바닥을 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진무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형, 실전은 무예서에 나오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적은 사형이 배운 초식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진무겸은 멍하니 소운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허탈한 쓴웃음을 지으며 그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너…… 진짜 누구냐? 내가 알던 한소운이 맞긴 한 거냐?”
“그냥…… 좀 맞아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중입니다.”
소운이 피식 웃으며 등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마당 구석에서 제자들을 헤치고 걸어오는 한 소녀의 시선이 소운의 등 뒤에 박혔다. 백서린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소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서린의 눈빛은 비무의 승패에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예리하며, 소름 끼칠 정도의 의심이 서려 있었다.
“너, 어제 산속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힘이 세지고, 검을 쥐는 법이 달라지고…… 너, 마치 우리 청운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 안 그래?”
쿵.
소운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회귀 사실을 들킨 것인가? 아니, 아직 그럴 리는 없었다. 하지만 백서린의 직감은 소운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녀는 이미 소운이 숨기고 있는 ‘이질감’의 정체를 파고들고 있었다.
소운은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서린의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다시 시작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 소녀의 비극적인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겼다.
장부의 황금빛 숫자가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빚은 늘어났고, 시간은 촉박했다. 이제 막 시작된 장부의 청구는, 그를 더 큰 폭풍우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