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유효타와 퇴각
쿠구구구궁—!
지하 500층 메인 서버실의 거대한 철문이 통째로 찌그러지며 안쪽으로 함몰되었다.
1만 5,000 MW의 출력을 자랑하던 4세대 전투 로봇 ‘아마게돈’의 잔해가 비참한 철스크랩으로 변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중심에 선 강진혁의 목덜미와 손목을 따라 흐르던 은빛 회로 선이 붉고 검은 마기(魔氣)와 뒤섞이며 격렬하게 요동쳤다.
슈우우우-!
단전 코어 출력 9,600 MW.
시스템의 보조 HUD가 영구 파기된 상태였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던 인공지능 ‘설화’의 아바타는 이미 검은 노이즈 속으로 산화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것은 불리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족쇄가 풀린 맹수처럼, 강진혁의 모든 감각과 움직임은 오직 그의 육체와 의지, 그리고 뼛속까지 각인된 무공의 궤적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스템 접근 거부.」
「경고. 메인 프로세스 응답 없음.」
「사용자 자율 제어 모드 100% 달성.」
의식의 구석에서 마지막으로 짓이겨진 시스템의 경고음이 꺼졌다.
강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흑안은 더 이상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삼켜진 듯, 그저 냉혹하고 절대적인 무위(武威)의 광기만이 서려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진세린이 있었다.
“……크학!”
전신 수트의 가슴 부위가 완전히 박살 난 진세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생체 코어가 탑재된 의복은 강진혁이 날린 검강의 여파로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비명을 지르며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프라이드로 가득 차 있던 냉미녀의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 진무극이 만든 ‘완벽한 그릇’.
그녀는 그저 실험용 인형에 불과할 줄 알았던 강진혁이 자신은 물론, 티타늄 그룹의 최정예 전력마저 눈 깜짝할 사이에 짓밟아버리는 것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진세린이 부르짖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강진혁의 몸을 타고 흐르는 흑마기가 거대한 괴물의 형상처럼 일렁였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속에 이식된 3세대 군용 생체 코어가 강진혁의 마기와 공명하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위의 포식자가 상위의 포식자 앞에 선 것처럼, 회로가 스스로 마비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강진혁은 말없이 걸어갔다.
그의 부츠가 철판 바닥을 짓밟을 때마다 미세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스으윽.
손에 쥔 [천마검(프로토타입)]의 검신 위로 짙은 흑색의 검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고대 마공의 파괴력과 현대 초고주파 공진 기술이 완전히 융합된 그 검은, 보기만 해도 주변의 공간마저 찢어발길 것 같은 압도적인 압박감을 뿜어냈다.
“후회해라, 진세린.”
강진혁의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속에는 뼈를 깎는 듯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네 아비가 만든 그 오만한 실험실에서, 너희가 밟고 올라선 수많은 이들의 피와 목숨을.”
“……”
진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와 굴욕이 밀려왔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전의 코어가 강진혁의 기세에 눌려 굳어버린 탓이다.
이대로라면 저 검에 목이 베이거나, 아니면 흡원천공의 제물이 되어 단전의 에너지를 통째로 빨아 먹힐 터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메인 서버실의 천장이 거칠게 뜯겨 나가며 수십 명의 특수전 후사대가 그야말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장님을 구원하라!”
“사격 개시! 모든 화력을 집중해!”
진세린의 친위대인 특수전 후사대였다.
그들은 전신에 중장갑 파괴용 나노 수트를 두르고, 양손에 든 고출력 플라즈마 개틀링건을 강진혁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비키기기긱—!
수백 발의 고주파 탄환과 플라즈마 광선이 강진혁의 사방을 벌집으로 만들 기세로 쏟아졌다.
하지만 강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휘리릭!
그의 몸이 믿을 수 없는 잔상을 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한.
빛의 궤적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초고속 기동 속에서, 날아오는 탄환들은 그의 잔상을 꿰뚫을 뿐이었다.
“어디로 갔지?!”
“잔상이다! 위야! 위를 봐!”
후사대 대원들이 황급히 총구를 위로 치켜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콰아아아궁!
강진혁이 공중에서 그대로 회전하며 지면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천마일검(天魔一劍) · 개(開)].
단 한 번의 참격.
그러나 그것은 9,600 MW의 폭발적인 출력과 순수한 마기가 압축된 일격이었다.
눈부신 검은빛의 충격파가 바닥을 강타하자마자, 메인 서버실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특수전 후사대의 중장갑 수트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대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먼지와 스파크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아수라장.
강진혁은 가벼운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착지했다.
과부하로 인해 단전 부근이 뻐근해오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초월천마경의 경지에 접어든 그의 육체는 그 정도의 반작용쯤은 거뜬히 버텨내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부하들의 엄호를 받으며 후퇴용 비상 엘리베이터로 끌려가는 진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진세린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강진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나 공포뿐만 아니라, 아버지 진무극의 거대한 음모를 마주한 자의 깊은 회의감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강진혁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삐- 삐- 삐-!
파괴된 메인 서버실 구석에서 티타늄 그룹 본사의 비상 자폭 시스템과 함께, 수백 명에 달하는 블랙 가드 증원 부대의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져갈 건 챙겼다.”
강진혁의 손에 들린 작은 데이터 드라이브가 깜빡였다.
거기에는 티타늄 그룹이 신서울 하층가 전체를 대상으로 벌이려는 거대한 생체 코어 공진 실험의 기밀 데이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하 500층의 바닥이 폭발음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강진혁은 더 이상 체류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한 곳은 서버실 구석에 마련된 낡은 비상 환기구였다. 윤아영이 사전에 해킹해 둔 하수관 탈출로와 연결된 길이었다.
샤아아악-!
마기를 두른 검으로 환기구의 철창을 단번에 베어낸 진혁은 어두운 심연 같은 하수관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시 후.
타앙-! 쾅-!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 총사령관 백무현이 이끄는 정예 부대가 서버실에 난입했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잔해와 흩날리는 재뿐이었다.
“……놓쳤나.”
백무현의 사이보그 안구가 붉은빛을 깜빡이며 공간을 스캔했다.
하지만 이미 강진혁의 기운은 신서울의 거대한 지하 미로 속으로 완전히 숨어든 뒤였다.
신서울 하층 슬럼가, 빛이 닿지 않는 깊은 지하의 한 아지트.
지이잉— 팟!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홀로그램 모니터 주위로 윤아영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짜 간다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진혁 오빠!”
윤아영은 화면에 떠오른 실시간 생체 신호와 탈출 궤적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등 뒤, 어두운 구석에는 천우진이 묵묵히 정비용 공구를 닦으며 진혁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슈우우우…… 툭.
방 안의 공기 압력이 변하며 환기구 통로를 통해 강진혁이 착지했다.
“……돌아왔다.”
강진혁은 입술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을 대충 닦아내며 손에 쥐고 있던 데이터 드라이브를 탁자에 던졌다.
지직-.
드라이브가 연결되자마자, 윤아영의 모니터에 거대한 암호화 파일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게 그 크로노스 바이오 지하 500층에서 털어온 데이터야? 보자…… 와, 미쳤네. 이것들 봐라?”
윤아영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3D 지도와 시뮬레이션 영상은 슬럼가 하층민들의 거주 지역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그 아래로 붉은색 경고 문구가 점멸했다.
[프로젝트: 헤븐리 파운데이션 (Heavenly Foundation)]
[목적: 신서울 하층 구도심 전체를 거대한 생체 코어 공진 증폭기로 전환.]
[대상: 하층민 320만 명의 생체 코어 에너지 착취 및 마기 동기화 테스트.]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천우진이 들고 있던 렌치를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 미친 새끼들. 하층민 전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겠다는 거야? 그 수백만 명의 에너지를 모아서 진무극 그 영감탱이의 불멸을 완성하겠다는 속셈이군.”
단순한 개인의 복수를 넘어, 신서울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모니터의 붉은 좌표들을 응시했다.
그의 단전에서 여전히 묵직하게 소용돌이치는 9,600 MW의 마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선 경지, [초월천마경].
그 힘을 시험할 진짜 무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대로 두면 신서울 전체가 거대한 무덤이 된다.”
강진혁이 낮게 입을 열었다.
“단순히 티타늄 그룹 본사를 부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 계획의 뿌리 자체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윤아영이 침을 삼키며 강진혁을 바라보았다.
“이 대규모 공진 실험을 저지하려면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해. 하층 도시 전체를 규합할 세력이 필요해. 예를 들면……”
“알고 있다.”
강진혁의 흑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반(反)기업 저항군 ‘니르바나’.”
“그들의 총수, 송수연과의 접선을 시작한다.”
티타늄 그룹의 거대한 음모를 부수기 위한 새로운 판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디스토피아의 밤하늘 아래, 진정한 ‘천마’의 칼끝이 이제 신서울의 민중을 향한 거대한 악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다.
스으으윽-.
데이터 드라이브의 홀로그램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깜빡였다.
[프로젝트: 헤븐리 파운데이션 (Heavenly Foundation)]
[진행 단계: 제3차 필드 테스트 준비 완료.]
[예상 소요 시간: D-7.]
단 일주일 뒤면 신서울 하층 구도심 전체가 거대한 생체 코어 공진 실험의 제물로 바쳐진다는 뜻이었다. 320만 명에 달하는 하층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진무극은 자신의 불멸과 영원한 무력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윤아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폭풍처럼 두드리며 데이터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오빠, 이거 봐. 그냥 실험이 아니야. 티타늄 그룹이 하층가 구도심 밑에 깔아둔 마기 증폭 회로가 무려 수만 개에 달해. 우리가 지난번에 털었던 천마회의 거점들도 다 이 프로젝트의 하부 네트워크였던 거야.”
“알고 있었다.”
강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진무극이 자신을 '천마의 그릇'으로 키워내며 수많은 실험체들을 버려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 한 명의 완전한 육체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육체를 매개로 신서울 전체의 에너지를 역류시켜 스스로 신(神)의 영역에 오르려는 것.
그것은 1,000년 전 마교가 꿈꾸었던 혈마병 양산 계획의 현대적, 거대 자본적 재현에 불과했다.
천우진이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진혁 네 말대로라면, 진무극 그 영감탱이는 네가 타워 100층에서 자신을 공격해 온 것조차 자신의 계획 안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거겠군. 네 몸 안의 ‘천마 프로토콜’을 폭주시켜 최종 제어권을 강탈하려고 했던 거니까.”
“그래.”
강진혁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단전에서 요동치는 9,600 MW의 마기가 뼈마디를 타고 흘렀다. 시스템의 보조 HUD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수련을 통해 단련된 순수한 무인의 감각과 의지였다.
“하지만 진무극은 하나를 놓쳤다.”
“뭘?”
“내가 그 시스템의 틀을 부수고 나왔다는 것.”
강진혁의 입가에 옅고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시스템의 족쇄가 채워져 있을 때는 진무극의 장기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그는 판 자체를 엎어버릴 수 있는 ‘천마(天魔)’였다.
“하지만 적은 티타늄 그룹 전체야. 사병 조직인 블랙 가드부터 시작해서, 상층부의 초인 전력들이 전면으로 나서면 우리 세 명의 힘만으로는 버거워. 특히 하층가 전체에 깔린 공진 회로를 동시에 무력화하려면 물리적인 병력과 정보전, 그리고 양쪽 모두에서 대규모 교란이 필요해.”
윤아영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저항군 ‘니르바나’가 필요한 거지. 그 여자라면……”
“송수연.”
강진혁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반(反)기업 저항군 ‘니르바나’의 총수.
오랫동안 티타늄 그룹의 폭정에 맞서 슬럼가의 사람들을 지켜온 여전사. 그녀는 군용 대형 도검을 능숙하게 다루며, 티타늄 그룹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목숨을 걸어온 인물이었다. 강진혁이 하층가에서 세력을 넓혀가는 동안, 니르바나 역시 티타늄의 음모를 감지하고 수면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강진혁이 천마검을 등 뒤에 고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르바나의 본거지는 슬럼가 심장부, 폐쇄된 구(舊) 지하철 환승역 3구역에 있다고 했다.”
“오빠, 거긴 티타늄 그룹의 감시 카메라가 닿지 않는 대신, 정체불명의 개조 괴수들이나 천마회의 잔당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야. 게다가 니르바나 경계심도 엄청 심하다고. 무작정 찾아갔다가는 총부터 맞을걸?”
윤아영이 걱정스러운 듯 툴툴거렸지만, 강진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맞을 짓을 하면 맞받아치면 그만이다.”
강진혁의 흑안에서 광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쿠구구구—!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마기의 파동이 방 안의 모니터 화면을 파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초월천마경(超越天魔經)의 경지에 이른 지금,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공간 압력이 달라져 있었다.
천우진이 픽 웃으며 자신의 의수 관절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가자고요, 보스. 늙은이 뼈마디가 굳기 전에 총알이나 몇 발 더 튀겨봐야지.”
“윤아영. 하층가 전역의 니르바나 통신 주파수를 스캔해. 송수연과의 접선 좌표를 확보한다.”
“알았어, 오빠! 맡겨만 달라고. 해킹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니까!”
윤아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현란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니터 위로 수많은 암호화된 주파수들이 얽히고설키며 해독의 불빛을 뿜어냈다.
디스토피아의 밤, 네온사인이 꺼진 슬럼가의 깊은 심장부.
티타늄 그룹의 거대한 음모에 맞설 두 세력의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진혁은 어둠을 등지며 차갑게 뇌였다.
‘진무극, 네가 준비한 그 거대한 무덤 속에 너 자신을 묻어주마.’
검은 마기를 품은 칼끝이 새로운 전쟁의 서막을 향해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