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불이 이름을 부른다
1. 깨어난 본명이 밤을 사냥한다
치이익―.
공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세계의 껍질이 벗겨지는 소리였다.
본명관(本銘館)의 거대한 기둥들이 균열을 일으키며 암흑의 파편을 토해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청월장의 잔해 위로 흩뿌려진 붉은 달빛은 이미 형체를 잃었다. 남은 것은 오직 불꽃, 그리고 그 불꽃 속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연기의 군상들뿐이었다.
무현(武顯)의 발밑에서 돌무더기가 바스라졌다.
그는 삿갓을 주워 올리지 않았다. 이미 화상 흉터가 얽힌 그의 얼굴은 밤바람 속에서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은 채 가라앉아 있었다. 흑천월식검(黑天月蝕劍)의 검신이 붉은 광채 대신 깊고 시린 흑빛의 중력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스으으…… 쾅!
무현이 검을 비스듬히 세우자마자, 그의 발치에서부터 사방으로 거대한 지면이 함몰되었다. 단순한 내공의 여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이라는 계약의 무게가 현실의 지형을 짓누르는 감각이었다.
"사형."
무현의 입술이 낮게 갈라졌다.
그 음성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본명관의 심연 속으로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숨어 있는 쥐새끼처럼 굴지 마라. 십 년 전의 빚을 받으러 왔다."
콰아아앙!
본명관의 거대한 정문이 안쪽에서부터 박살 나며 폭발했다. 튀어나온 것은 잿더미와 얽힌 수천 가닥의 검은 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살기였다. 흑월문주(黑月門主) 혁련오(赫連梧)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 반쪽을 가득 채운 화상 흉터가 불빛에 번뜩이며 기괴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혁련오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사제. 네놈이 아직도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구나. 무현? 그 이름이 네 진짜 이름이라 생각하느냐? 그건 장주의 불쌍한 유령이 너에게 던져준 싸구려 위패에 불과하다."
"위패든, 빚이든 상관없다."
무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너희가 그날 밤 내게 지운 것이 무엇이든, 오늘 이 자리에서 전부 태워버릴 테니까."
2. '네 이름은 장원의 불에서 나왔다'
지면이 울었다.
혁련오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본명관 내부에서 거대한 쇠사슬이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부혈쇄(冥府血鎖). 외눈 문지기가 쓰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굵고 핏빛으로 절여진 쇄도가 허공을 가르며 무현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챙강! 챙가강!
무현은 피하지 않았다. 흑천월식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찌그러지며 쇄도의 궤적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검신에 어린 칠흑의 초승달 참격이 허공을 갈라놓았다.
"착각하지 마라, 사제."
혁련오가 바닥을 박차며 무현의 코앞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비명처럼 일그러졌다. 혁련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월의 기운이 무현의 어깨를 스쳤다. 화상 흉터 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무현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네가 기억하는 그 십 년 전의 밤…… 청월장을 태운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아느냐?"
무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십 년 전. 온통 붉은 화염 속에서 자신을 밀어내던 양부 서문 월청(西門月淸)의 손길, 그리고 그 불길 너머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던 붉은 가면의 그림자.
"그 불은 네가 지핀 게 아니다."
혁련오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무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버리고 도망쳤던 그 이름, 그 서러운 핏줄의 근원이 스스로 지핀 불이야. 네 생모가 남긴 계약의 불길이 장원을 삼켰고, 그 불 속에서 네 '이름'이 구워져 나왔지. 네 본명은 남이 지어준 게 아니야. 불이 직접 새겨준 것이다."
콰아아광!
혁련오가 내지른 검압에 무현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깊게 파냈다. 무현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가슴속 깊은 곳,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불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환영처럼 밀려왔다.
‘도망쳐…… 무현아…….’
스승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울림이 머릿속을 후벼 팠다.
3. 문주가 불길로 무현의 가명을 재로 태운다
"크윽……!"
무현이 한릎을 꿇었다. 흑천월식검이 바닥을 지탱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충격이었다. 계약의 힘을 쓸수록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감각, 자신의 존재 자체가 허공으로 증발하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혁련오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흑월의 기운으로 응축된 거대한 화염구 형태의 인장(印章)이 들려 있었다.
"이름이란 건 말이다, 사제. 누군가 기억해 주지 않으면 결국 먼지가 될 뿐이야. 네가 '무현'이라는 이름으로 백 년을 살아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넌 태어날 때부터 흑월에 바쳐진 계약의 도구에 불과했어."
혁련오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 가짜 이름, 내가 오늘 이 불길 속에서 완전히 재로 만들어주마."
화염 인장이 무현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려는 그 순간.
퍼억!
측면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금빛 섬광이 혁련오의 궤적을 강제로 꺾어버렸다.
"오라버니에게 손대지 마!"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
본명관의 잔해 사이로 월소연(月小然)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두 손에 들린 명인(名刃)―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칼이 허공을 가르며 혁련오의 어깨를 스쳤다.
비록 내공은 미숙하고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소연의 눈빛에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 눈동자는 붉은 달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새벽의 푸른 여명을 닮아 있었다.
4. 소연의 옥패가 불 속에서 빛난다
"소연아……!"
무현이 고개를 들었다.
소연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십 년 전 청월장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낡은 옥패였다. 쌍문양(雙文樣)이 새겨진 그 옥패는 본명관의 짙은 암흑과 검은 연기 속에서도 유독 청백색의 투명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치이익―!
옥패의 빛이 본명관의 검은 연기와 부딪치며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저건……?!"
혁련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 옥패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장주 서문 월청이 숨을 거두기 직전, 남매에게 남긴 마지막 봉인이자 계약의 허점을 찌를 수 있는 열쇠였다. 옥패의 빛이 닿는 곳마다, 흑월문주가 세워둔 본명관의 장막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일어나요."
소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악력만큼은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했다.
"저 자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마. 내 기억 속에서…… 우리를 지키려던 손길은 그 불길 속에도 분명히 있었어. 오라버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듯이, 나도 오라버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소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머릿속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지던 기억의 조각들이 소연의 목소리를 붙잡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네 진짜 이름은…….’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잔상 속에서, 누군가 따스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무현의 심장이 다시금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5. 흑천월식검이 불길을 가른다
"방해꾼들이 많단 말이지."
혁련오의 얼굴에 잔인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거대한 검을 치켜들었다. 흑월의 금기 무공, 흑천월식검의 극의(極意)가 그의 전신을 검은 오라로 휘감았다.
"너희 둘 다, 그 옥패와 함께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라!"
쾅―!
혁련오가 내리친 검격은 더 이상 검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밤하늘을 통째로 끌어내려 대지를 짓누르는 거대한 중력장이었다. 사방의 돌무더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먼지로 바스라졌다.
하지만 무현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삿갓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지만, 화상 흉터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단단했다. 무현이 왼손으로는 소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는 흑천월식검의 검신을 쓸어내렸다.
스으윽…….
검신에 묻어난 핏물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소연의 옥패에서 흘러나온 청백색 광채가 무현의 검끝으로 스며들며, 칠흑의 초승달 참격에 하얀 달빛의 결이 덧씌워졌다.
흑백의 합일.
완전한 월식의 형상이 검끝에서 요동쳤다.
"내 이름은……."
무현의 입술이 열렸다. 그 목소리는 본명관의 무너지는 기둥 소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네가 지우려 한들 지워지지 않는다."
쿠구구구구궁―!
무현이 검을 위로 치켜올렸다.
흑천월식검이 뿜어낸 검강이 혁련오의 거대한 참격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6. '불이 부르는 이름이 진짜 네 것이다'
콰아아앙!
정점의 충돌은 본명관의 지붕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밤하늘을 거대한 핏빛으로 물들였다. 혁련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흑월 기운이 무현의 검끝에서 뿜어지는 낯선 빛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찢겨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리가……! 그 검은 내게 속한 금기다! 네가 어떻게 그 월식의 심핵을 다룬단 말이야?!"
"네가 배운 것은 계약의 '힘'뿐이지만……."
무현이 혁련오의 코앞까지 순간적으로 파고들었다.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흑백의 검광이 혁련오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내가 받은 것은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이다."
퍼어어엉!
무현의 검이 혁련오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단순한 육신의 부상이 아니었다. 그 일격은 혁련오가 십 년 동안 짊어져 온 흑월의 계약 장부 그 자체를 겨누고 있었다.
크아악!
혁련오가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부서진 본명관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뜨겁게 타오르던 화염의 심장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불길 속에서 완전히 형태를 드러낸 그것은 칼날도, 옥패도 아니었다.
그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그러나 결코 타 죽지 않는 한 자의 '이름'이었다.
불길을 뚫고 날아온 그 이름이 밤하늘을 가르며 무현과 소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탁.
무현의 손바닥 위에 그 빛나는 이름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밤하늘에 떠 있던 검은 달의 중심에서 기이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동안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무현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금빛 글자는 일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섬광을 뿜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십 년 전 청월장의 화염 속에서, 스승 서문 월청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핏물로 눌러썼던 '진짜 이름'의 잔해였다.
치이익―!
살을 태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현의 손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무현은 손을 움켜쥐지 않았다. 그 통증은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기억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게……."
무현의 등 뒤에서 소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빛을 바라보았다. 옥패의 청백색 광채와 손바닥 위의 금빛 이름이 서로를 알아본 듯 공중에서 가늘게 공명했다.
그 순간이었다.
바닥을 구르던 혁련오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가슴팍에서는 검은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보다 더 깊은 절망과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크큭…… 크하하하!"
혁련오가 피를 토하며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져갔구나…… 마침내 그 장원의 주인이 남긴 마지막 빚더미를 네 손으로 쥐었어! 사제, 너는 모른다. 그 이름이 네 손에 들어오는 순간, 흑월의 진짜 계약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무현은 고개를 돌려 혁련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린 화상 흉터가 차가운 달빛 아래서 더욱 도드라졌다.
"완성된 게 아니다."
무현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금빛 글자가 그의 손바닥 피부 속으로 스며들며 뜨거운 낙인처럼 박혀 들었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안개가 걷히고, 십 년 전 그날 밤의 참혹한 풍경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비명, 붉은 화염, 그리고 횃불을 든 소한의 떨리던 눈동자. 그 모든 기억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었다.
"끊어지는 거지."
무현이 흑천월식검을 다시 바닥에 겨눴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백의 중력장이 본명관의 남은 잔해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더 이상 누구의 이름도 빼앗기지 않는다. 내 것도, 소연이의 것도."
쾅!
무현이 지면을 박찼다.
그의 몸이 한 줄기 흑백의 섬광이 되어 도망치려는 혁련오를 향해 쏘아져 갔다. 불길이 밤하늘을 태우는 그 한가운데서, 검은 달의 계약을 부수기 위한 진짜 검무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