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최상층 도달과 마신(魔神)의 태동
티타늄 타워 120층.
철컥, 카랑—!
두꺼운 티타늄 합금 격벽이 종이짝처럼 찢겨 나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독한 냉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의 냉각 가스. 그 속에서 칠흑 같은 어둠을 두른 채 걸어 나오는 형체가 있었다.
강진혁.
그의 목과 손목을 감싸고 있던 은빛 회로 선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인공지능(AI)의 보조 HUD가 시야에서 완전히 소멸한 자리를 메운 것은, 오직 날것 그대로의 감각과 만물의 ‘맥(脈)’을 꿰뚫어 보는 직관이었다.
“…….”
심장 박동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횡격막 아래 단전(丹田)에 자리 잡은 기혈의 소용돌이가 거대한 발전기처럼 중저음의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
경지의 극도에 도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였다. 주변의 중력이 미세하게 왜곡되며, 진혁의 발걸음이 닿는 바닥마다 미세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기계의 연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마기(魔氣)만으로 공간의 물리 법칙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슈우우우——.
120층의 거대한 홀 내부로 진입하자, 사방을 압도하는 냉혹한 기운이 피부를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들. 그 위로는 신서울 전체의 전력망과 슬럼가 구석구석의 생체 반응 데이터가 복잡한 붉은색 파형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홀의 정중앙. 천장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돔 형태의 배양 수조에서 푸른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 수조의 한가운데, 수많은 관이 온몸에 꽂힌 채 눈을 감고 있는 중년 신사가 있었다.
은발을 정갈하게 넘긴 이목구비. 차갑고 완벽주의적인 눈빛의 소유자. 티타늄 그룹의 절대자, 진무극(陳武極)이었다.
“드디어 도달했군요, 피험체 07호.”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 홀 전체의 공기를 직접 진동시키며 진무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조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의 홍채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금빛 동공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계가 부여한 족쇄를 끊어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 최상층까지 기어 올라왔다. 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한 성장세야. 과연, 내가 직접 설계하고 1,000년 전 천마의 유골 데이터로 빚어낸 최고의 걸작답군.”
진무극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오만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배양액 속에서 미세한 흑자색의 번개가 튀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나노머신의 출력이 아니었다. 고대 마교의 유적에서 발굴된, 정제되지 않은 원시 마기(魔氣)의 파동이었다.
진혁은 말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흑안이 진무극을 향했다. 눈동자 속에는 분노나 경외 같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절대적인 무감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조주라.”
낮고 묵직한 진혁의 음성이 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너희가 만든 건 기계 장치와 데이터 쪼가리뿐이다. 내가 걸어온 길은 그 시스템이 계산해 낸 적이 없어.”
“하하하……! 자네는 아직도 모르는군요.”
진무극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잉, 쿠구구구구—!
배양 수조의 유리가 산화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무극이 발을 디디며 수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타일이 짓눌려 가루가 되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인간의 출력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그 프로토콜은 자네를 구속하기 위한 목줄이 아니었어. 녀석의 진짜 용도는, 인간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대 마공의 역류를 버텨내고, 마침내 ‘완벽한 그릇’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가속화하는 촉매였지.”
진무극이 가슴 부위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거기에는 붉은빛으로 고동치는 거대한 코어가 박혀 있었다. 일반적인 4세대, 5세대의 출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차원 자체를 뒤틀어버릴 듯한 에너지 응축체.
“프라임 천마 코어. 1,000년 전 그날, 마교의 최후와 함께 산화했던 진짜 천마의 심장부에서 추출한 파편이지. 진혁아, 알고 있나? 그 늙은 괴물 역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자멸했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진무극의 눈빛에 광기가 서렸다.
“나는 자네라는 완벽한 육체에 이 코어를 이식할 것이다. 시스템의 오차율을 0%로 수렴시킨, 신의 영역에 닿은 불멸의 육체! 그 몸에 내 정신을 얹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신천마(新天魔)’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구구구궁—!
진무극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홀 전체의 중력이 수십 배로 치솟으며 진혁의 어깨를 짓눌렀다. 사방의 모니터 화면들이 일제히 깨져 나가며 스파크가 튀었다.
보통의 초인이라면 그 압박감만으로도 혈관이 터져 사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진혁의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착각이 심하군.”
진혁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기였고,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파괴의 힘이었다.
“네가 말하는 그 ‘그릇’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쉬익—!
진혁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의. 잔상조차 남지 않는 초음속의 이동 속도에 공간 자체가 비틀렸다.
“허!”
진무극의 금빛 동공이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시각 연산이 따라오기도 전에, 그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쾅아아아아——!
진무극이 급히 양팔을 교차하며 마기로 방벽을 형성했다. 그 순간, 그의 정면으로 쇄도한 진혁의 주먹이 진무극의 방어벽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지평선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두 사람의 마기가 부딪친 지점에서 거대한 구형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120층 연구 구역의 강화 유리 벽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우주 공간으로 빨려 나갔다.
바깥의 암흑 같은 우주와 신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윽……!”
진무극이 이를 악물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단단한 외골격 장갑 위로 진혁의 마기가 거머리처럼 파고들어 내부의 회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어떻게……? 내 코어 출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밀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HUD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이 정도의 출력을 낸다고?!”
진무극이 경악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시스템의 연산 없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만으로 마공의 출력을 이토록 완벽하게 통제하다니. 그것은 생물학적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영역이었다.
진혁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진무극을 응시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끝에서 칠흑의 검기가 화염처럼 타올랐다.
“시스템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걸 다루는 건 의지고, 그 의지를 무공으로 승화시키는 건 나 자신이다.”
진혁의 목소리가 홀 전체를 압도했다.
“네가 준 것은 차가운 데이터의 찌꺼기일 뿐. 내가 완성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부수고 새롭게 쓰는…….”
우구구구구궁—!
진혁의 단전에서 폭발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등 뒤로 거대한 흑발의 마신(魔神) 형상이 일그러지듯 떠올랐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그 정점에 다다른 진혁이 마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대기가 공명하며 비명을 질렀다.
“신천마신공 제17식.”
검끝이 진무극을 겨누었다.
“참단(斬斷).”
챙—!
우주를 가르는 듯한 일섬의 핏빛 궤적이 120층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진무극의 얼굴에 완벽한 경악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진짜 천마의 힘인가……!”
쿠구구구구궁—!
최상층의 마스터 돔 전체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진혁의 검기가 진무극의 프라임 천마 코어를 정중앙부터 두 쪽으로 갈라놓기 시작했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진무극의 가슴 중앙에 박혀 있던 ‘프라임 천마 코어’에서 찢어지는 비명 같은 전자음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진무극의 입에서 검은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자랑하던 5세대 프라임 코어의 외벽이 진혁의 ‘참단’에 의해 종잇장처럼 절단되어 있었다.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던 고농축 마기가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흩날리며 연구실의 모든 기기를 분자 단위로 녹여버렸다.
진혁은 그 폭풍 속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에 처박혀 경련하는 진무극을 내려다보았다.
“코어는 그저 에너지를 응축하는 덩어리에 불과하다. 네놈은 그 안에서 흐르는 ‘기(氣)’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기계적인 수치에 영혼을 저당 잡혔을 뿐이다.”
“말도…… 안 돼. 나는, 나는 천 년 전의 마기를 완벽하게 해석했다! 이 코어는 신의 영역에 닿은 결정체라고!”
진무극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등 뒤로 부서진 배양 수조 속에서 쏟아져 나온, 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들의 파편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체 조직과 배양된 실패작들의 코어를 강제로 융합하며 괴물 같은 형상으로 변이하고 있었다.
지지직, 지직!
변이된 진무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힘을 넘어, 주변의 공간 자체를 오염시키는 독(毒)과 같은 것이었다.
“진혁아! 네가 아무리 강해도, 이 공간 전체에 깔린 연성진은 내가 설계했다! 신서울 2,000만 명의 생체 코어 데이터가 지금 내 마기로 치환되고 있다! 너는 결국 내가 완성할 불멸의 제물일 뿐이다!”
진무극의 손바닥이 허공을 향해 펼쳐졌다. 그러자 연구실 벽면을 채우고 있던 모니터들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타워 전체의 전력망이 단전의 기운과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타워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박동하기 시작했다. 슬럼가 하층부에서부터 상층 마천루까지, 모든 시민의 생체 코어에 연결된 백도어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120층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압도적인 에너지의 흐름은 마치 강물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대홍수와 같았다.
“이것이 나의 힘이다! 이 거대한 데이터를 감당할 수 있겠나? 너의 단전은 곧 과부하로 터져 나갈 것이다!”
진무극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의 근육은 금속과 살점이 뒤섞인 기괴한 형태로 뒤틀렸고,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마치 검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진혁은 그 광경을 보며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조롱도, 분노도 아닌, 멸시였다.
“데이터?”
진혁이 발을 구르자, 바닥을 타고 흐르던 핏빛 마기가 거꾸로 치솟았다. 그것은 진무극이 끌어오던 데이터의 흐름을 역으로 침식(侵蝕)하고 있었다.
“네놈이 신서울을 단전 삼아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동안, 나 또한 네놈이 만들어둔 그 통로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나 보군.”
“뭐라고?”
“시스템의 백도어는 나 또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네놈이 내게 심어둔 ‘프로토콜’이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의 모든 연성진을 연결하는 ‘열쇠’였다는 것을 말이지.”
강진혁의 손가락이 허공에 궤적을 그리자, 120층을 가득 채웠던 붉은 파형들이 순식간에 진혁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역진(逆陣).”
[시스템 경고: 데이터 흐름 차단. 에너지 역류 발생.]
[경고: 마스터 코드 강제 상실.]
진무극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제어 모듈이 굉음을 내며 깨져 나갔다. 신서울 전체의 에너지가 진무극의 몸이 아닌, 진혁의 단전으로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들어왔다.
“으아아아아! 내, 내 에너지! 내 코어의 권한이……!”
“네가 내게 준 것은 힘이 아니라, 네가 쌓아 올린 죄악의 무게다. 이제 그 무게를 온전히 돌려주마.”
진혁이 마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검은 섬광이 진무극의 변이된 육체를 파고들었다.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진혁이 300화 동안 쌓아온 무도의 철학, 기계 공학의 논리, 그리고 스스로 개척한 ‘참된 마공’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진정한 경지다.”
진혁의 검이 진무극의 변이된 마기 중심부를 관통했다. 동시에 진혁의 의지가 타워 전체의 네트워크를 뒤덮었다.
[에너지 과부하. 마스터 돔 붕괴 시작.]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타워의 외벽이 뜯겨 나갔다. 수천 미터 상공의 차가운 밤바람이 홀을 휩쓸었다. 진무극은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와중에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인간인 네가…… 나를 뛰어넘는단 말이냐…….”
진혁은 무너져 내리는 잔해 속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진무극의 잿더미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인간을 부정하고 신이 되려 했기에 너는 패배한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신이 되려 한 적이 없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운명을 부수고 싶었을 뿐.”
진무극의 형체가 완전히 소멸했다. 그가 남긴 것은 파편화된 코드 데이터와, 고대 마교의 사념이 담긴 낡은 유골 가루뿐이었다.
진혁은 그 가루를 쥐어짜듯 허공으로 흩뿌렸다. 주변의 공간은 이제 진혁의 마기에 의해 재구축되고 있었다. 120층의 연구실은 이제 타워의 꼭대기가 아니라, 진혁의 의지가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마계(魔界)’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때, 타워의 잔해 아래쪽에서 희미한 통신 신호가 잡혔다. 윤아영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진혁 씨! 들려요? 120층 붕괴와 동시에…… 차원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접근하고 있어요! 이건 진무극이 부른 수준이 아니에요. 차원 자체가 찢어지고 있다고요!]
진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신서울의 밤하늘이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 너머, 칠흑보다 더 깊은 심연 속에서 수만 개의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무극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정한 재앙은 이제부터였다.
진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마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그러나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오라.”
그의 목소리가 온 신서울에, 아니 차원을 넘어 심연의 끝까지 울려 퍼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떠오른 마신의 형상이 차원의 틈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