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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38화목차

제238화 불퇴(不退)의 철벽

치이익―!

진세린의 찢긴 가슴팍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바닥의 합금 플레이트를 타고 붉은 선을 그렸다. 자신의 심장 바로 옆, 생체 코어와 직결되어 있던 최상층 비상 승강기 인증 칩을 스스로 뜯어낸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살점과 신경 케이블이 엉겨 붙은 은빛 칩. 그것을 건네받은 강진혁의 손바닥 위로 뜨거운 체온과 함께 지독한 혈향이 내려앉았다.

“……가.”

진세린이 입술을 깨물며 턱을 치켜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티타늄 타워의 그 어떤 강화유리보다도 단단하게 벼려져 있었다.

“진무극은…… 그 괴물은 신서울 전체의 생체 코어를 자신의 양분으로 삼으려 하고 있어. 1분 1초가 늦어질 때마다…… 이 도시의 인간들이 전부 그자의 단전 속 거름이 될 거야. 날 신경 쓸 시간 따윈…… 없어.”

진혁은 말없이 칩을 쥐었다.

피 묻은 금속의 감촉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시스템의 푸른색 HUD는 꺼져 있었으나, 진혁의 심안(心眼)은 이미 타워 전체의 맥을 낱낱이 훑고 있었다. 80층을 넘어 90층, 그리고 구름 너머 아득한 100층 최상층 마스터 돔.

그곳에서 고동치고 있는 역겨울 정도로 거대한 탐욕의 박동. 진무극이라는 한 인간의 망집이, 천 년 전 마교의 유골에서 추출해 낸 뒤틀린 데이터와 융합하여 신서울 전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마궁(魔宮)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그 순간, 타워 80층 전체의 조명이 일제히 핏빛으로 물들었다.

[EMERGENCY: 보안 등급 오메가 발령.]

[전 구역 내 인가되지 않은 생명체 감지.]

[티타늄 하이브 방위 사단 ‘타이탄 골렘’ 및 무인 섬멸 기갑 여단, 전면 가동.]

[구획 80-A부터 80-F까지 영구 폐쇄 시퀀스를 개시합니다.]

천장이 울렸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타워의 외벽을 타고 수백, 수천 톤에 달하는 중금속 덩어리들이 낙하하며 벽면을 짓이기고 내려오는 굉음이었다.

쿵! 쿵! 쿠구구궁!

중앙 홀로 이어지는 네 개의 거대한 통로. 그 통로의 두꺼운 방탄 셔터가 위에서부터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맞은편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붉은 안광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지잉― 찌르르르륵!

티타늄 그룹이 자랑하는 최악의 자동 살인병기. 인간의 뇌 대신 고성능 전투 알고리즘을 탑재하고, 5세대 중장갑 합금과 대구경 레일건, 고주파 블레이드로 무장한 무인 기갑 보병 ‘센티넬 엑스(Sentinel-X)’.

그것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을 이루며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보폭을 맞춘 기계 발소리가 바닥을 뒤흔들며, 80층 전체의 산소를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중압감을 뿜어냈다.

“퇴로를 완전히 틀어막을 생각인가 보군.”

낮고 거친 음성이 진혁의 귓전을 때렸다.

천우진이었다.

한쪽 눈을 덮은 검은 안대 너머, 붉게 타오르는 기계 의안을 번뜩이며 그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신 사이보그화된 거구. 한때 티타늄 그룹 특수공작대의 정점에 섰으나, 쓰레기처럼 버려진 채 밑바닥 슬럼가를 전전해야 했던 사내.

천우진의 묵직한 강철 의수가 진혁의 어깨를 툭 쳤다.

“멍하니 서 있지 마라, 애송이.”

“천 팀장님.”

“팀장은 개뿔.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난 지가 언젠데.”

천우진이 씁쓸하게 픽 웃었다.

그의 오른쪽 뺨을 타고 흐르는 은빛 회로가 급격하게 과열되며 푸르스름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전신 의수의 관절 마디마디가 ‘철컥’ 소리를 내며 전투 형태로 전개되었다.

양 어깨의 장갑이 양옆으로 벌어지더니, 빽빽하게 장전된 64연장 마이크로 미사일 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의 척추 프레임에서는 보조 동력 코어가 요란한 굉음을 토해내며 한계치를 넘어선 출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최상층으로 가는 승강기 샤프트는 저 기갑 놈들이 내려온 통로 바로 뒤편에 있다. 진세린이 준 칩을 꽂으면 100층까지 다이렉트로 올라갈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뚫고 갑니다.”

진혁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자신의 손으로 저 무인 기갑부대를 가루로 만드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신천마신공’의 파천검강을 한 번만 제대로 휘두른다면 복도 전체를 통째로 증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천우진이 거대한 기계 팔로 진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철컹!

“착각하지 마라, 진혁아.”

천우진의 음성은 지독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네 내력과 마기는 무한한 게 아니야. 여기서 네놈이 저 깡통 새끼들을 상대로 힘을 쏟아붓는 순간,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무극의 덫에 걸려드는 거다. 그 영감탱이가 왜 이 깡통들을 이 타이밍에 쏟아부었겠냐? 네 마기를 단 1%라도 갉아먹기 위해서다.”

“…….”

“네 마기는 그 개자식의 목을 딸 때 써야 해. 저딴 고철 부스러기들을 상대하며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 순간, 센티넬 군단의 선두가 중앙 홀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파지지직!

선두에 선 세 기의 센티넬이 양팔에 장착된 40mm 고속 유탄포를 치켜들었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 스파크. 백색의 열화탄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들었다.

쾅! 콰과광!

폭음과 함께 거센 화염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 화염을 뚫고 튀어나간 것은 천우진이었다.

“후사대! 그리고 니르바나 녀석들!”

천우진의 포효가 폭발음을 찢고 울려 퍼졌다.

“부상자들을 데리고 승강기 앞 중앙 방어선으로 후퇴해라! 내가 이 통로를 닫는다!”

“팀장님! 안 됩니다! 격벽을 내리면 혼자 고립됩니다!”

뒤편에서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지원 사격을 퍼붓던 송수연이 악을 썼다.

그러나 천우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명령이다, 송 대장! 네놈들이 살아야 진혁이가 뒤를 안 돌아보고 위로 갈 거 아니냐!”

쿠구구구궁!

천우진이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 사이보그 의수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 전류가 바닥의 전력 케이블을 타고 벽면의 비상 차단기로 침투했다.

치지직! 펑!

천장에서 수십 톤 무게의 초중량 티타늄 방어 격벽이 굉음을 내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거대한 철문. 그 문이 완전히 닫히면, 이 통로는 완벽한 밀실이 된다. 적들의 수천 기에 달하는 무인 기갑부대와, 오직 천우진 한 사람만이 남겨지는 죽음의 사냥터가 되는 것이다.

“천 팀장!”

진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스템의 차가운 계산 따위가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 인간 강진혁으로서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폐기장에서 기어 나와 아무것도 모른 채 방황하던 시절, 현대 무기의 궤적을 가르쳐 주고 총기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법을 쥐여 주었던 사내.

비정한 기업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스승이자 형처럼 곁을 지켜주었던 자였다.

진혁이 발을 굴렀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기동과 함께 격벽 아래로 몸을 던져 천우진을 낚아채려 한 그 찰나.

탕―!

천우진의 왼팔에 장착된 리볼버 캐논이 진혁의 발치 앞 바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파편이 튀며 진혁의 옷자락을 스쳤다.

“오지 마라, 진혁아!”

천우진이 반쯤 내려앉은 격벽의 틈새 너머로 진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외눈에 서린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체념도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속죄, 그리고 자신이 키워낸 가장 위대한 무인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였다.

“기억하냐? 슬럼가 쓰레기장에서 네놈이 처음 나한테 총을 겨눴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격벽이 절반을 지나 3분의 2 지점까지 떨어져 내렸다.

센티넬 군단의 총구가 천우진의 전신을 조준하며 붉은 레이저 조준선이 그의 가슴팍에 수십 개비의 거미줄처럼 얽혀들었다.

“무인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죽는다고 했다.”

천우진이 피 묻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앞만 보고 달려라. 넌 저 위로 가서, 그 역겨운 노친네의 숨통을 끊어. 그게 네놈이 나한테 갚아야 할 마지막 빚이다.”

“…….”

“가라, 진혁아! 가서 신천마(新天魔)의 검이 뭔지 그 새끼 면상에 똑똑히 박아 넣어 줘라!”

쾅―!

마침내 거대한 티타늄 격벽이 바닥과 맞부딪치며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토해냈다.

완벽한 단절.

두께만 1미터에 달하는 복합 장갑 격벽이 내려앉으며, 천우진의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두두두두두두둥!

콰아아앙!

격벽 너머에서 즉각 살인적인 총성과 포성이 터져 나왔다.

중기관포의 연사음, 마이크로 미사일이 벽면을 때리는 파열음, 그리고 고열 블레이드가 장갑을 가르고 뼈와 강철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파쇄음이 두꺼운 철문을 뚫고 진동으로 전해져 왔다.

“으아아아악! 와라, 이 깡통 새끼들아! 내가 누군지 잊었냐! 내가 바로 티타늄 특수공작대 대장이었던 천우진이다!”

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천우진의 처절한 포효.

그 포효와 함께, 진혁의 감각 속에서 천우진의 ‘생명 반응’이 격렬하게 널뛰기 시작했다.

마신경(魔神境)의 정점에 선 진혁의 심안은, 시각을 가로막은 철벽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다. 벽 너머의 풍경이 고스란히 뇌리에 박혀 들어왔다.

천우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과부하의 스파크.

그는 자신의 생체 코어 제한 리미터를 스스로 뽑아버렸다.

[Warning: 생체 코어 출력 300% 돌파.]

[경고: 신경계 융해 및 인공 장기 영구 파손 진행 중.]

인간의 몸이 버틸 수 없는 열량이었다.

천우진의 살점이 타들어 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의 강철 팔은 멈추지 않았다. 쇄도하는 센티넬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두개골을 박살 냈고, 흉부의 레일건을 영거리에서 격발하여 뒤따라오던 장갑차량의 엔진 블록을 일격에 관통시켰다.

콰아앙!

기계 팔 하나가 적의 고주파 블레이드에 통째로 잘려 날아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천우진은 잘려 나간 어깨의 파이프를 적의 렌즈에 쑤셔 넣고, 체내에 잔류하던 마이크로 미사일의 탄두를 그 자리에서 자폭시켰다.

쿠구구궁!

벽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이 진혁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흔들었다.

“……크윽.”

뒤편에서 송수연이 주먹을 쥐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후사대의 잔존 병력들도, 니르바나의 전사들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떨리는 눈으로 닫힌 격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한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연료로 태워 바치는, 가장 숭고하고도 잔혹한 ‘방패’였다.

“진혁 씨…….”

윤아영의 떨리는 통신 음성이 인이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저 격벽…… 센티넬 군단의 해킹 코드가 진입하면 3분도 못 버텨요. 천 팀장님이…… 자신의 코어를 과부하시켜서 방어 시스템 메인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태워버리고 계세요. 저건…… 돌아올 수 없는 자폭 시퀀스예요……!”

알고 있었다.

진혁은 그 누구보다도 천우진이라는 사내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설픈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완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3분.’

천우진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진혁에게 사준 시간.

진혁의 흑안(黑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분노로 타오르던 눈동자에서 일체의 감정이 증발하고, 그 자리에는 오직 만물을 베어 넘기는 절대적인 멸(滅)의 의지만이 남았다.

슬픔을 토해낼 시간 따위는 없다.

애도(哀悼)는 시체를 넘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지금 진혁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천우진이 사준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적의 심장부를 짓밟는 것뿐이었다.

스스스스―.

진혁의 전신에서 칠흑의 마기가 피어올랐다.

시스템의 간섭이 배제된 순수한 마기. 그것은 대기 중의 전자기 노이즈를 씹어 삼키며, 진혁의 발밑에 거대한 암흑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송수연.”

진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조용했으나, 홀 안의 모든 폭음을 덮어버릴 만큼 깊은 패도(覇道)가 담겨 있었다.

“……네.”

“진세린과 부상자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서라. 저 격벽이 무너지면, 남은 쥐새끼들은 너희가 쓸어 담아.”

“진혁 씨는…….”

“난 올라간다.”

진혁이 등을 돌렸다.

그의 눈앞, 80층 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강철 게이트가 보였다.

최상층 직통 비상 승강기 샤프트.

그 거대한 게이트의 키 콘솔을 향해, 진혁은 진세린의 피가 묻은 은빛 칩을 내리꽂았다.

콰직!

[ACCESS GRANTED: 최상위 인가 코드 확인.]

[비상 직통 리프트 ‘발키리-01’이 플랫폼에 접안합니다.]

[경고: 외부 방어선 붕괴 위험. 탑승을 서두르십시오.]

철컥, 쿠구구구궁―!

두꺼운 게이트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타워의 외벽을 따라 수직으로 솟아 있는 초고속 외부 승강기의 탑승 플랫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너머는 신서울의 밤하늘이었다.

해발 수천 미터 상공의 살인적인 돌풍이 열린 문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저 아래로는 불야성을 이루는 네온사인의 슬럼가가 까마득한 심연처럼 내려다보였고, 머리 위로는 먹구름을 뚫고 솟구친 티타늄 타워의 첨탑이 붉은 번개를 내뿜으며 우뚝 서 있었다.

쿵―!

격벽 너머에서 천우진의 마지막 포효가, 그리고 거대한 폭발음이 길게 메아리쳤다.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걸음.

진혁의 신형이 허공을 갈라 승강기 플랫폼 위로 착지했다.

위이이잉―! 콰아앙!

승강기의 바닥 플레이트가 요동치며, 상공 100층을 향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 속에서, 진혁은 마검의 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그의 감각망에, 저 높은 허공의 어둠 속에서 와이어를 타고 낙하하는 네 개의 서늘한 살기(殺氣)가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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