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피로 맺은 맹약
팟, 파아아아앗―!
칠흑 같은 핏빛 번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티타늄 타워 80층 중앙 홀에는 오직 무겁고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불과 수십 초 전까지만 해도 음속의 벽을 찢어발기며 살기를 뿜어내던 티타늄 그룹의 최정예 부대, ‘철혈 근위대’. 5세대 카본-티타늄 합금 장갑과 1초에 수십만 번 진동하는 초고주파 진동검으로 무장했던 그 인간 흉기들은 단 한 점의 온전한 형태도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 있었다.
공기 중에 표류하는 것은 오직 분자 단위로 잘게 파쇄된 미세한 은빛 금속 가루와, 극한의 고열에 하얗게 타버린 탄소 섬유의 메케한 연기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최고급 충격 흡수 타일은 유리질처럼 녹아내려 기괴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스스스스…
그 무자비한 멸절의 진앙(震央)에 강진혁이 서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이 미풍에 가볍게 흩날렸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단전에서 흘러나온 마기(魔氣)의 짙은 잔향이 마치 검은 비단 도포 자락처럼 그의 전신을 유려하게 휘감고 있었다. 사방으로 튄 핏방울 하나, 공기 중에 부유하는 금속 분진 한 톨조차 그의 피부와 옷깃에는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완벽할 정도로 고요하고 단정한 자태였다.
‘이것이… 마신경(魔神境)의 세계인가.’
진혁은 조용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망막 위를 번잡하게 가리던 옅은 푸른빛의 HUD(헤드업 디스플레이) 아바타, 인공지능 설화의 무기질적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생체 코어의 잔여 출력을 메가와트(MW) 단위로 표기하던 디지털 텍스트도, 적의 공격 궤적과 거리를 격자선으로 계산해 주던 전술 예측 알고리즘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시스템의 통제에서 벗어난 그의 뇌 내 인터페이스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러나 진혁의 감각은, 과거 천마 프로토콜 시스템의 연산 보조에 의존하던 시절보다 수만 배는 더 예리하고 투명하게 확장되어 있었다.
타워 외벽의 초전도 케이블을 타고 맹렬히 질주하는 수백만 볼트의 고압 전류.
100층 최상층과 지하 심층부에서 진무극이 작동시킨 기괴한 마스터 돔의 에너지 공명.
그리고 지금 이 넓디넓은 80층 홀 구석구석에 웅크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체들의 떨리는 심장 박동과 혈관의 마찰음까지.
세계의 모든 삼라만상이 시스템의 이진법 코드가 아닌, 생동하는 무도의 ‘맥(脈)’으로서 진혁의 의념(意念) 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편협한 수치와 궤적에 육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곧 세계의 법칙이자 무공의 궤적이 되는 절대적인 경지.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의 계산을 완전히 초월해 도달한 제4단계, 마신경(魔神境)이었다.
"아… 아아……."
참혹하게 부서진 기둥 뒤편에서 억눌린 탄성과 거친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진무극에게 가차 없이 버림받고, 철혈 근위대의 초고주파 칼날 아래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티타늄 그룹 특수전 후사대 대원들이었다. 부대장 한석민을 비롯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18명의 잔존 병력은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은 형색으로 진혁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군율이나 직무상의 계급에 의해 강제된 굴복이 아니었다.
거대한 해일이나 천둥벼락 같은 자연재해, 혹은 신화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초월적인 지배자를 목도한 나약한 인간이 본능적으로 토해내는 근원적인 공포이자 전율이었다.
티타늄 그룹이 지난 반세기 동안 천문학적인 자본과 생명공학, 최첨단 나노 군사기술을 쏟아부어 구축해 낸 기술의 정점이 고작 고대 마공의 극의를 홀로 깨달은 한 명의 무인(武人) 앞에서 허무한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그 압도적인 무력의 격차 앞에서 그들이 자랑하던 전술 나노 수트도, 고성능 생체 코어도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세린 님……."
한석민이 입안에 고인 검붉은 핏물을 바닥에 뱉어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진혁의 등 뒤편, 반쯤 붕괴한 천장의 콘크리트 잔해 위에 한 여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티타늄 그룹의 정통 후계자이자, 특수전 후사대를 이끌어왔던 대장, 진세린이었다.
치지지직―!
진세린의 몸을 감싼 흑철색 전투 수트 곳곳에서 유전압 스파크가 사납게 튀어 올랐다.
철혈 근위대와의 사투에서 입은 참혹한 내상으로 인해 심장에 직결된 4세대 생체 코어가 위험 임계치를 넘어 오버히트하고 있었다. 백옥처럼 창백해진 얼굴선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찢겨나간 수트 틈새로 드러난 쇄골과 옆구리에서는 선홍색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만큼은, 부서진 갑주와 상처투성이 육신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진세린은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유리 조각과 분쇄된 금속 가루를 짓밟는 그녀의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으나, 결코 비틀거리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은 오직 한 사람, 홀 중앙에 홀로 우뚝 선 강진혁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쿵, 쿵, 쿵.
진세린이 한 걸음씩 다가설 때마다, 그녀의 흉강 깊은 곳에 이식된 생체 코어가 기이할 정도로 맹렬하게 요동쳤다.
진혁이 방금 전 홀 전체를 집어삼키며 뿜어냈던 패도적인 흑자색 마기. 그 순수한 무도의 의념이 진세린의 메마른 기혈과 단전을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비록 티타늄 그룹의 최첨단 기계 회로로 온몸이 개조된 신체였으나, 진세린의 핏줄 속에도 고대 마교 유적의 천마 유골에서 추출해 낸 ‘천마 프로토콜’의 유전적 인자가 미량이나마 각인되어 있었다.
진무극이 완벽한 그릇을 만들기 위한 중간 실험 단계로서 자신의 혈통에 주입했던 생체 열쇠의 흔적.
그 잠들어 있던 인자가, 시스템의 허상을 부수고 진정한 마신경에 도달한 진혁의 마기라는 거대한 불꽃을 마주하자 족쇄를 끊어내듯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코어의 기계적 냉각 시스템이 마비되어 가는 와중에도, 그녀의 혈관 속에서는 낯설고 뜨거운 기운이 맥동하고 있었다.
스윽.
진세린은 진혁의 등 뒤 세 걸음 거리에 멈추어 섰다.
진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과거, 제3구역 슬럼가의 축축한 골목과 피비린내 나는 지하 격투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칼날을 겨누었던 지독한 악연. 티타늄 그룹의 가장 완벽하고 차가운 도구로서, 그리고 아버지를 전지전능한 신처럼 맹신하던 충직한 후계자로서 진세린은 강진혁을 ‘통제 불가능하여 폐기 처분해야 할 결함품’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일개 도망자나 복수에 눈이 먼 복수귀가 아니었다.
티타늄 그룹이라는 거대한 디스토피아적 체제 전체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진무극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오만한 기술의 바벨탑을 홀로 무너뜨리며 전진하는 절대적인 초월자였다.
"강진혁."
진세린이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싹 말라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는 기이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나를… 그리고 내 부하들을 처단하러 왔나."
진혁은 감정이 배제된 서늘한 눈빛으로 진세린을 내려다보았다.
시야를 보조해 주던 HUD의 생체 스캔 수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진혁은 자신의 피부에 닿는 기운만으로도 진세린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생체 코어는 이미 한계 출력의 140%를 초과하여 내부 냉각 도관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장기 곳곳에 미세한 내출혈이 번져 있었다. 자신이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손가락 끝으로 마기 한 줄기만 튕겨내도 그녀의 기계 신경망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즉시 타버릴 터였다.
하지만 진혁의 의념 속에 비친 진세린의 기운은, 예전에 보았던 ‘진무극의 정교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충성했던 아비에게 소모품처럼 버림받고, 자신이 믿어왔던 세상의 모든 법칙이 기만이었음을 깨달은 자의 처절한 절망. 그러나 그 잿더미 속에서 굴종 대신 자신의 두 발로 버텨 서려는 한 명의 무인(武人)다운 오기가 그녀의 부서진 육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다."
진혁의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홀 전체에 울렸다.
"그리고 내 검이 향하는 끝은 오직 진무극 한 놈뿐이다. 아비의 손바닥 위에서 줄에 매달려 춤추던 꼭두각시 인형을 베는 것은… 내 무도의 길을 더럽힐 뿐이지."
진세린의 창백한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꼭두각시 인형이라… 그래, 부정할 수 없군. 나는 평생을 그자의 정교한 도구로 살았으니까."
진세린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한가운데, 붉은빛 경고등을 점멸하며 과열되고 있는 생체 코어 부근을 짚었다.
진무극은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그녀를 피를 나눈 딸로 대우한 적이 없었다.
그저 궁극의 육체인 강진혁이 완전히 성숙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줄 예비 부품이자, 만약 강진혁이라는 그릇이 폭주했을 때 이를 억누르고 제어하기 위해 준비해 둔 살아있는 비상 정지 키(Key). 그것이 ‘진세린’이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였다.
지하 3,500층의 기밀 데이터 저장소 ‘아카이브 0’에서 열람했던 참혹한 진실.
그리고 방금 전 80층 홀에서 자신과 후사대 대원들을 가차 없이 사살하라고 내리던 진무극의 차갑고 메마른 음성.
그 모든 배신의 편린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진세린의 가슴을 난도질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자멸하지도 않았다.
대신 진세린은 심장에 꽂힌 그 비수를 제 손으로 뽑아내어, 자신을 만든 아비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스스스스…
진세린이 굳은 결의를 담아 가슴 수트의 중앙 티타늄 장갑판을 거칠게 뜯어냈다.
파지지직! 치익!
유전압 냉각액이 하얗게 끓어오르며 지독한 탄내가 진동했다. 진세린은 극심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갈비뼈와 생체 코어 사이에 깊숙이 매립되어 있던 암호화 모듈을 향해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그것은 진무극의 유전적 직계 혈통만이 육체적 신호를 통해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 티타늄 타워 전체를 통제하는 최상위 마스터 오버라이드 칩이었다.
"커흑…!"
진세린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터져 나왔다.
살아 숨 쉬는 생체 코어의 신경망과 단단히 결합해 있던 모듈을 마취도 없이 맨손으로 강제로 뜯어내는 행위는, 산 채로 심장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다름없는 극도의 고통을 수반했다. 그녀의 전신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파들거렸다.
스륵.
마침내 진세린의 피 묻은 손바닥 위에 은빛으로 미세하게 맥동하는 생체 칩과, 붉은 마스터 억세스 키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칩 표면에는 그녀의 체온과 생체 코어에서 흘러나온 맑은 피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진세린은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 그 피 묻은 열쇠를 진혁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은… 티타늄 타워 100층, 진무극의 회장실로 직통 연결되는 초고속 승강기 '제네시스 샤프트'의 마스터 키다."
진혁의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진세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진무극은… 지금 타워 내의 모든 가용 전력을 100층과 지하 마스터 돔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만약 네가 일반 승강로나 환기 덕트 같은 우회로를 이용하려 든다면, 90층 이상의 외벽과 통로에 설치된 고열 플라즈마 소각로가 즉각 가동되어 반경 수백 미터 전체가 녹아내릴 거다. 어떤 초인이라도 그 열량을 버틸 수는 없어. 하지만 이 키카드가 있다면… 제네시스 샤프트를 타고 그 모든 트랩을 무력화하며 단 10초 만에 100층 회장실 중심부로 침투할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고통을 뛰어넘은 차가운 냉정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생체 칩 속에는… 진무극의 망막, 뇌파, 유전자 코드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마스터 바이오 데이터가 들어있다. 마스터 돔을 감싸고 있는 절대 방어막의 역위상 코드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이것 없이는… 설령 네가 100층에 도달한다 해도 그자의 방을 부수지 못해."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석민과 후사대 대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소리쳤다.
"세린 님! 안 됩니다! 그것을 넘기시면 님은 반역자로 낙인찍혀…!"
"모두 입 다물어라, 한석민!"
진세린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날카롭게 일갈했다. 피를 토하면서도 그녀의 음성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버려졌다! 아니, 우리뿐만이 아니라 신서울 전체의 수천만 시민이 그 광기 어린 인간의 불멸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이다. 저 자가 오늘 밤 진무극의 목을 베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신서울에도 내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진세린의 결연한 시선이 다시 진혁의 흑안을 향했다.
"내 목숨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후사대의 죄과 역시 네가 묻는다면 기꺼이 받겠다. 다만… 나는 단 하나의 대가만을 요구하겠다."
"말해라."
진혁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진무극을… 그 오만하고 추악한 자를 네 손으로 직접 찢어발겨라. 자신이 신봉하던 기술과 자본의 정점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인간의 진정한 의지와 무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껍데기인지… 그자의 두 눈에 똑똑히 각인시킨 채 지옥으로 보내라. 그것만이… 나를 비롯해 티타늄이라는 거대한 거짓 아래에서 소모품으로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자 복수다."
진세린의 눈동자 속에는 특권층 특유의 나태함이나 거만함 따위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세상에 배신당한 자의 사무치는 한과,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눈을 뜬 무인(武人)으로서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비굴한 구걸도, 단순한 이해관계에 기반한 거래도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영광, 남은 여생의 모든 것을 불살라 맺는 피의 맹약이었다.
진혁은 진세린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
그녀의 찢겨진 흉부 안쪽, 생체 코어가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진혁의 마기에 감응하여 미약하게나마 꿈틀거리는 기혈의 궤적이 느껴졌다.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철창에 갇혀 있던 한 인간이, 마침내 스스로의 의지로 한계를 깨부수려 하는 태동.
슬럼가에서부터 80층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적으로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이를 갈았던 두 사람이 마침내 가장 거대한 악을 처단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진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진세린의 피가 흥건하게 묻은 붉은 키카드와 은빛 칩을 건네받았다.
스스스스…
진혁의 손끝에서 은은한 흑자색의 진기가 피어올라, 키카드와 칩 표면에 엉겨 붙어 있던 핏물을 정화하듯 감싸 안았다.
기계적인 분석 인터페이스 없이도, 진혁의 의념은 칩 내부에 각인된 나노 회로의 미세한 진동과 유전자 데이터의 결을 막힘없이 읽어냈다. 진무극의 고유 생체 파동과 타워 메인프레임의 절대 통제권. 거짓이나 함정이 섞이지 않은 완벽한 진짜였다.
진혁은 키카드를 도포 안쪽 품에 갈무리하며 진세린을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떼었다.
"훌륭한 결단이다, 진세린."
진혁의 흑안 속에서 오만한 자들을 심판할 천마의 패도적인 마광(魔光)이 굳건하게 타올랐다.
"네가 건넨 이 피와 원한의 무게를 결코 잊지 않겠다. 티타늄 그룹의 영원한 몰락과, 진무극이라는 탐욕의 종말을… 내 두 손으로 반드시 증명해 보이마."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었으나, 세상 그 무엇도 뒤엎을 수 없는 절대적인 무게와 확신이 실려 있었다.
그제야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중압감이 풀려난 듯, 진세린은 파리한 미소를 지으며 비틀거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석민과 대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신형을 부축했다.
"고맙다… 강진혁."
진세린의 입술 사이로 스러져가는 듯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나고 자란 거대한 제국의 파멸을, 한때 자신이 사냥하려 했던 천적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비극적이면서도 해방감 넘치는 고백이었다.
그 애절한 고백이 허공에 흩어지기가 무섭게,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80층 홀 전체의 천장과 벽면에 매립된 비상 경보등이 일제히 핏빛으로 번뜩이며 귀를 찢는 사이렌을 울부짖기 시작했다. 바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납게 요동쳤다.
[긴급 경고. 80층 보안 구역 내 비인가 생체 접속 및 0계급 마스터 바이오 코드 유출 확인.]
[회장 직속 긴급 방어 프로토콜 ‘라그나로크’ 4단계 자동 인가.]
[대(對)초인 전술 기갑 부대 ‘체르노보그(Chernobog)’ 전 기체, 동면 해제 및 섬멸 모드 전환.]
타워 전체에 매립된 서라운드 지향성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인 필터로 변조된 진무극의 서늘하고 나지막한 음성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역시… 불완전한 혈통으로 빚어낸 미물은 마지막 순간까지 실망을 안겨주는군. 진세린, 내 관용을 저버리고 기어이 선을 넘었구나."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진무극의 목소리에는 딸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 따위는 티끌만큼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직 오작동을 일으킨 부품을 폐기하는 냉혹한 기술자의 무감정한 어조였다.
"강진혁. 네놈이 내 실패작의 피를 제단 삼아 이곳까지 기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0층으로 올라오거라. 네놈이라는 위대한 그릇을 온전히 수확하여, 진정한 신천마(新天魔)로 거듭나기 위한 연성진이 이미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으니."
쿠구구구구궁―!
진무극의 오만한 선언이 끝나자마자, 80층 홀의 동서남북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수십 톤 무게의 초합금 격벽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퇴로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동시에 외벽 방어용 비상 격납고의 거대한 장갑문이 양옆으로 열려 젖혀지며, 지금까지 마주했던 사이보그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흉악한 거대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발구름 소리가 홀의 바닥재를 부수며 울려 퍼졌다.
높이만 5미터를 훌쩍 넘는 칠흑색의 거대 이족보행 전술 메카닉들.
전신이 전차용 반응 장갑과 나노 카본 복합체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한쪽 팔에는 도시 블록 하나를 통째로 기화시킬 수 있는 대구경 플라즈마 압축 캐논이, 다른 한쪽 팔에는 초당 수백만 회를 진동하는 거대한 초합금 파쇄 바이브로 블레이드가 장착되어 있었다.
티타늄 그룹이 국가 간의 전면전을 상정하고 극비리에 건조한 최종 살육 기갑병기, ‘체르노보그’ 삼십여 기가 붉은색 광학 센서를 번뜩이며 홀을 빽빽하게 에워쌌다.
치이익―!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장의 장갑판이 열리며 수백 문의 대인 유도 발칸포와 미사일 포드가 모습을 드러냈고, 환기구에서는 피부와 호흡기를 녹여버리는 신경 독가스와 극초음속 소이 플라즈마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미 한 마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도록 설계된 완벽한 학살의 덫이었다.
"큭…! 체르노보그 부대라니! 회장은 진심으로 우리까지 이 자리에서 소각할 셈인가!"
한석민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그가 비틀거리며 총구를 겨누었지만, 눈앞을 가득 메운 거대 메카닉 군단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화력의 위압감 앞에서 후사대 대원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저 괴물들은 일개 보병이나 무인이 상대할 수 있는 영역의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대이자, 요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강진혁의 표정에는 단 한 가닥의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
진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포문을 장전하는 체르노보그 군단의 정면을 향해 걸어 나갔다.
스스스스…
그의 오른손 끝에서 짙은 흑자색의 마기가 피어오르더니, 허공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며 길이 세 자에 달하는 예리한 마검(魔劍)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고밀도로 압축된 기운이 스스로 진동하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체르노보그라."
진혁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조소가 흘러나왔다.
"진무극. 네놈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고작 이런 쇳덩이 장난감 따위로… 하늘을 향해 뻗은 내 검의 궤적을 멈출 수 있을 거라 여겼나?"
마신경(魔神境)에 도달하여 만물의 결을 꿰뚫어 보는 강진혁에게, 첨단 합금으로 둘러싸인 기계의 장갑판 따위는 기혈의 급소와 결함이 훤히 드러난 얇은 종잇장에 불과했다.
진혁의 단전 속에서 잠자고 있던 신천마신공의 거대한 기운이 용트림하며 전신의 맥을 타고 맹렬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콰아아아앙―!
80층 중앙 홀 후방, 굳게 닫혀 있던 두께 1미터의 특수 방화 격벽이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며 통째로 날아갔다.
화염과 자욱한 분진을 뚫고, 홀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진혁아! 잡것들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곧장 위로 튀어 올라가라!"
"……!"
진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욱한 매연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온 거대한 그림자.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차고, 전신에 이식된 군용 사이보그 의수에서 붉은 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백전노장의 거구—전(前) 특수공작대 팀장이자 진혁의 무기 스승인 천우진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는, 붉은 머리를 사납게 휘날리며 대형 대전차 도검을 꼬나쥔 저항군 ‘니르바나’의 총수 송수연과 수백 명의 무장 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천 스승님. 수연 씨."
진혁이 돌아보자, 천우진이 특유의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의수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하층부의 잔챙이 방어선은 우리 니르바나 정예들이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올라왔다! 이 오만한 기업 놈들의 철고철 깡통들은… 우리 저항군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송수연 역시 붉은 칼날 위에 푸른빛 고주파 전류를 감아 올리며 체르노보그 군단을 노려보았다.
"강진혁! 슬럼가의 시궁창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의 원한… 그리고 오늘 희생된 모든 이들의 피값을 저 꼭대기에 있는 괴물 놈의 목을 베어 갚아줘! 이 자리는 우리가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낼 테니까!"
"와아아아아―!"
니르바나의 전사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휴대용 대전차 로켓과 EMP 유탄을 체르노보그 군단의 관절부를 향해 일제히 퍼붓기 시작했다.
쿠쾅! 콰콰쾅! 콰아아앙!
홀 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최첨단 기갑 병기와 결사항전의 저항군이 뒤엉킨 거대한 불바다로 변모했다. 체르노보그의 플라즈마 캐논이 허공을 가르며 기둥을 녹여버렸고, 저항군의 화망이 장갑 틈새를 뚫고 들어가며 폭쇄음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천우진이 양팔의 플라즈마 부스터를 점화해 체르노보그 한 기의 다리를 후려쳐 쓰러뜨리며, 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려 고함쳤다.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냐, 멍청한 놈아! 어서 저 샤프트로 들어가!"
진혁은 불길 속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천우진과 송수연, 그리고 부축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진세린의 눈빛을 차례로 응시했다.
폐기장 바닥에 버려졌던 실험체 07호 시절부터 티타늄 타워 80층에 도달하기까지.
언제나 고독하게 홀로 걸어왔던 핏빛 복수의 여정이라 믿었으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등 뒤에는 같은 뜻을 품고 목숨을 걸어주는 수많은 동료와 무인들이 버텨 서 있었다.
스스로의 복수는 더 이상 한 개인의 원한에 머무르지 않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해방을 향한 거대한 의지가 되어 있었다.
진혁의 입술 끝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렸다.
"…알겠습니다."
진혁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홀 중앙 가장 깊숙한 곳, 굳게 봉인된 제네시스 샤프트의 중장갑 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파아아앗―!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극의.
공간의 틈새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진혁의 잔상이 허공에 흑색 궤적을 그리며, 체르노보그 군단이 쏟아내는 수백 발의 맹렬한 대공 포화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어떤 센서도, 어떤 화망도 그의 신묘한 보법을 포착하지 못했다.
철컥! 치이이익―!
진혁의 손에 쥐어져 있던 붉은 마스터 키카드가 승강로 중앙 제어 콘솔에 삽입되는 순간, 푸른색 전자기 락이 일제히 해제되며 두께 1미터의 초합금 문이 거대한 공압음을 내뿜으며 좌우로 갈라졌다.
그 너머로 드러난 것은, 타워 최상층 100층을 향해 한 치의 굴절도 없이 수직으로 곧게 뻗어 있는 거대한 초전도 리니어 샤프트였다.
진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원형 승강기 플랫폼 위에 발을 디뎠다.
스스스스…
그가 단전의 순수한 마기를 콘솔의 동력선에 불어넣자, 비상 잠금이 영구히 해제되며 승강기 바닥의 반중력 유도 코일이 눈부신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웅―!
초전도 펄스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승강기는 중력의 법칙을 비웃듯 음속의 세 배가 넘는 경이로운 속도로 100층 최상층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발아래 저 멀리로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80층의 폭음과 화염, 그리고 동료들의 처절한 함성.
그리고 머리 위, 차가운 유리 천장 너머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이 모든 비극의 설계자이자 자신의 증오스러운 창조주.
진무극.
진혁의 서늘한 흑안 속에서, 1,000년 전 전설의 천마(天魔)마저 뛰어넘어 스스로의 의지로 완성해 낸 신천마(新天魔)의 살기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기다려라, 진무극."
광속으로 치솟는 승강기 안, 거센 풍압을 가르는 진혁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서늘하게 채웠다.
"네놈이 쌓아 올린 오만한 거짓의 신화는… 오늘 밤, 내 손으로 완전히 끝장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