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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28화목차

제228화 융합을 넘어선 순화

하늘이 무너진 자리, 그곳에서 강진혁은 홀로 서 있었다.

신서울의 상공을 뒤덮었던 차원 균열은 이제 흉측한 흉터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시스템의 기계적인 경고음도, 진무극이 심어놓은 백도어의 간섭도 더는 없었다. 오직 고요만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고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폭풍 전야의 정적이었다.

"……역시."

진혁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혈관을 따라 흐르던 은빛 회로들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 기술의 산물인 나노머신이었고, 동시에 마공의 본질인 마기가 뒤엉킨 통로였다.

과거, 그는 이 둘을 강제로 융합하려 했다. 마치 물과 기름을 억지로 섞듯, 시스템이라는 강제적인 촉매를 사용하여 에너지를 압축하고 폭발시켰다. 그 결과는 강력했으나 치명적이었다. 혈관은 마기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언제나 타들어 갔고, 혈마병이라는 비극적인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계는 지배의 도구가 아니다.'

독고운이 남긴 말, 그리고 스스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얻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나노머신은 혈관을 옥죄는 족쇄가 아니라, 마기가 흐를 수 있는 새로운 인공 혈맥(人空血脈)이어야 했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단전에서부터 일어난 마기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예전 같았으면 나노머신과 충돌하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을 그 기운이, 지금은 마치 물길을 따라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나노머신 사이를 통과했다.

[시스템 강제 동기화 모드: OFF]

[나노머신 제어권: 사용자 임의 제어 전환 완료]

더 이상 붉은 경고창은 없었다. 대신, 진혁의 의지가 곧 법칙이 되었다.

"융합이 아니라, 순화(順化)인가."

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나노머신의 구조를 물리적으로 변형시키는 대신, 마기의 파동을 나노머신의 공진 주파수에 맞추어 조율했다. 상극(相剋)이었던 두 에너지가 비로소 상생(相生)의 궤도에 들어섰다.

검게 타들어 가던 손목의 회로 선이 찬란한 금빛으로 변하며 혈색을 되찾았다. 뼈마디를 짓누르던 혈마병의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쿠구구구-.

진혁의 몸 주위로 파동이 일었다.

주변의 공기가 그의 마기에 이끌려 소용돌이쳤다. 과거 2단계 [마기융합] 시절에는 그저 신체를 강화하는 정도에 그쳤다면, 지금은 주변의 환경 그 자체가 그의 의지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진혁의 뒤편, 허공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역시,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지."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간의 파동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아있었다. 차원 너머의 지배자들이 남겨둔, 일종의 ‘청소부’들이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기괴한 형상들이 차원의 틈새를 찢고 나타났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인간의 생체 코어 대신 차원 조각이 박혀 있는 존재들. 그들은 진혁이 시스템의 구속을 벗어던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일제히 기괴한 소음을 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들이 나를 '그릇'으로 보았다면, 그 대가는 치러야겠지."

진혁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평범한 강철 검이었으나, 그 검신에는 이미 그의 의지가 서려 있었다.

[마신경(魔神境) - 현신]

화려한 상태창도, 데이터 분석도 없었다.

오직 진혁의 감각과, 마기가 흐르는 인공 혈맥의 박동만이 존재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17식."

진혁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화려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저 허공에 선을 하나 긋는 듯한 단순한 동작. 그러나 그 선이 지나간 자리는 현실의 법칙이 붕괴하며 텅 비어버렸다.

'참단(斬斷).'

공간 자체가 절단되는 소리가 울렸다.

달려들던 청소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들의 육체는 물론, 차원 너머의 근원까지 검흔을 따라 고스란히 쪼개졌다.

한 번의 휘두름.

그것으로 충분했다.

진혁은 검에 묻은 보이지 않는 잔재를 털어내며 차원의 틈새를 응시했다. 저 너머에 더 큰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두렵지 않았다.

스스로가 법칙이 된 자에게, 두려움이란 사치일 뿐이었다.

"아직 시작이다."

진혁은 신서울의 폐허가 된 지붕 위를 박차고 올랐다.

그의 발걸음마다 은빛 파동이 일렁이며 대기를 갈랐다. 시스템이 지배하던 디스토피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신천마(新天魔)의 시대였다.

진혁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

그 안에서 요동치는 생체 코어의 출력은 이제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이현도, 그리고 진무극.'

그들은 자신을 이용해 불멸을 꿈꿨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진혁이라는 불꽃을 피워내기 위한 땔감에 불과했다.

진혁의 눈동자가 차가운 흑안에서 붉은 마기로 물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알았다.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는 것을 넘어, 이 세계를 망가뜨린 근원적인 파멸의 근원을 뿌리 뽑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완성해야 할 마지막 마공의 완성체였다.

신서울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연기로 뒤덮인 도시 위로 희미한 태양 빛이 내리쬐었지만, 그 빛조차 진혁의 등 뒤에 서린 마신(魔神)의 형상을 덮지는 못했다.

그때, 윤아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통신 장비가 아닌, 오직 진혁의 신경계에 직접 연결된 무선 링크를 통해.

[진혁 씨! 들려? 지금 지하 5,000층 아카이브 0에서... 아니, 이제는 말할 필요도 없겠네. 그쪽 에너지가... 신서울 전체를 압도하고 있어.]

아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공포와 경외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영아."

[응, 말해.]

"상황은 정리됐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부터다."

진혁의 시선이 신서울의 심장부, 티타늄 그룹이 자리했던 폐허로 향했다.

그곳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터였으나, 그 지하에는 여전히 밝혀내야 할 진실이 있었다.

"준비해라. 우리는 지상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근간을 바꿀 준비를 할 테니까."

[...알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 하지만 진혁 씨, 조심해. 차원 너머에서... 정말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어.]

거대한 것.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서울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우주 전체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시스템이라는 절대적 법칙을 꺾고, 스스로 새로운 법칙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칼집에 들어간 순간, 검은 마기를 완전히 감췄다.

그것은 이제 흉기가 아니라, 세상을 베고 다시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와라."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누가 오든, 이 땅 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놈들의 법칙은 나의 마공 아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오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초월천마경]의 경지를 넘어, 우주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뒤엎을 준비를 마친 참된 천마였다.

신서울의 밤이 지나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새벽이 도래했다.

하지만 그 새벽은 평온한 아침이 아니었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지평선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는 군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오직 파멸과, 그 파멸 너머에 있을 새로운 질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지평선 끝에서 붉은 섬광이 쏘아 올려졌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는 거대한 차원 포격.

티타늄 그룹의 유산도, 신서울의 방어선도 아닌, 차원 밖의 적들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그는 다시 한번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검끝을 하늘로 향했을 뿐인데, 지상의 모든 대기가 진혁의 검기를 따라 소용돌이쳤다.

[신천마신공 제18식 - 개천(開天)]

하늘을 열어젖히는 검기가 신서울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우주를 향한, 그리고 그 우주를 통제하려 드는 창조주들을 향한 강진혁의 답변이었다.

이제, 시스템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명의 천마가 왕좌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전쟁의 서막이었다.

[개천(開天)]의 검기는 신서울의 대기를 가로질러 차원의 틈새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진혁이 스스로 재정의한 인공 혈맥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현실의 물리 법칙을 뒤틀어버렸다. 차원 포격의 궤적이 마치 잉크가 물에 번지듯 흩어졌고, 거대한 붉은 섬광은 진혁의 검기 아래서 무력하게 사그라들었다.

"이게 너희들의 최선인가?"

진혁의 음성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

신서울 상공에 떠 있던 거대한 차원 함대들이 진혁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일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스템의 붕괴를 알리는 경고를 수신한 뒤, 아카이브 0가 소멸한 자리에 좌표를 고정하고 있었다.

[Warning: 미식별 개체 '강진혁'의 마력 출력, 측정 불가.]

[경고: 법칙 간섭 계수, 허용 범위를 초과하였습니다.]

허공에 떠다니던 잔류 시스템의 노이즈가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진혁은 그것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시스템의 언어가 아닌, 마기의 파동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차원의 문 뒤편, 칠흑 같은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의지들이었다. 진무극과 이현도를 장기말로 써먹으며 인간을 실험체로 전락시켰던 창조주들. 그들이 이제야 본체를 드러내기 위해 차원의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더 이상 장기판 위에서 놀아나지 않겠다.'

진혁은 발을 굴렀다.

쿠웅-.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마기가 타워의 잔해를 뚫고 지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진혁은 티타늄 그룹이 숨겨두었던 마지막 유산, '마스터 데이터 센터'의 근간을 마기로 침식했다.

[프로토콜 강제 해제: 역식(逆蝕) 개시.]

그동안 진혁을 옭아매던 수만 줄의 코드가 그의 의지에 따라 역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강제로 이식했던 '천마 프로토콜'의 잔재들이 이제는 진혁의 마기를 강화하는 연료로 전락했다.

이것이 바로 순화(順化)였다.

적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흡원천공의 궁극적인 형태.

순식간에 진혁의 마력 회로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찬란한 검은 빛을 뿜어냈다. 그의 육체는 이제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기로 응축된 하나의 거대한 현신(現身)과 같았다.

"윤아영."

진혁이 나지막이 불렀다.

[말해, 진혁 씨. 나 지금 데이터 라인 다 털어버렸어. 이제 기업이고 뭐고 없어. 신서울의 모든 제어권이... 아니, 진혁 씨의 마기 회로에 동기화됐어!]

윤아영의 목소리에는 환희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진혁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것으로 재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좋아. 지금부터 신서울의 하늘을 닫아라. 그 어떤 놈들도 외부에서 발을 들이지 못하게."

[알겠어. '천마의 영역'을 설정할게.]

신서울의 상공을 뒤덮었던 차원의 틈새가 윤아영의 해킹과 진혁의 마기가 결합된 보이지 않는 장막에 의해 강제로 봉인되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들을 번뜩이던 차원 너머의 존재들이 당황한 듯 소음을 쏟아냈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향해 검을 든 채, 지상으로 낙하하는 포격들을 하나하나 요격했다. 검이 닿을 때마다 차원의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학살이 아니라 정리였다.

실험실의 쓰레기를 치우는 주인의 단호한 손길.

"다음은 너희 차례다."

진혁은 검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신서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티타늄 그룹은 사라졌다. 그들의 지배 아래 고통받던 시민들은 폐허 속에서 진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경외감.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그들의 눈에 서려 있었다.

진혁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원자도, 지배자도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시스템의 족쇄를 끊어내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무법의 자유'를 되찾아주었을 뿐이다.

그때, 하늘 저 멀리서 더 거대한 차원의 문이 열렸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기운.

창조주들의 진정한 선봉장이자, 차원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재앙'이 강림하고 있었다.

진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상대였다.

"마지막 관문인가."

진혁은 다시 한번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신서울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신천마신공의 19식, [만상귀일(萬象歸一)].

우주의 모든 법칙을 자신의 마기로 귀속시키는 절대적인 권능이 발현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을 천마의 기세가 전 우주를 향해 포효했다.

전쟁의 서막이 지나가고, 이제 비로소 참된 마신(魔神)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온다면 환영해 주지. 내 검 아래서 너희들의 법칙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똑똑히 봐라."

진혁은 하늘을 박차고 올랐다.

그의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 형상의 마기가 펼쳐지며, 신서울의 하늘을 뒤덮은 차원의 구름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이제, 그 누구도 이 천마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시스템의 그릇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시스템을 심판하는 심판자이자,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울 유일한 지존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진혁의 검을 감싸 안았다.

그의 검 끝에 맺힌 작은 마기의 이슬이, 차원 너머의 불청객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다.

이제, 진짜 천마의 강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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