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용 사이트예요. 댓글·로그인·좋아요는 준비 중이에요.
‹프로토콜: 천마 · 227화목차

제227화 독고운의 가르침 - 무위(無爲)의 심법

차원 너머에서 불어오는 저주받은 바람이 신서울의 밤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 바람 끝에 묻어나는 것은 죽음의 냄새이자, 수만 년 전 멸망한 행성들의 비명이었다.

강진혁의 몸은 찢겨 나가고 있었다. 혈마병. 1,000년 전 천마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저주가, 현대의 나노머신과 고대 마기를 강제로 융합한 그의 혈관 속에서 날뛰고 있었다.

“커헉……!”

입가로 검은 혈괴가 쏟아졌다. 시스템의 경고음이 귓가에서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경고: 생체 코어 출력 98% 과부하.]

[경고: 혈마병 진행률 92%. 전신 신경계 붕괴 임박.]

[시스템 제어권 강제 탈환 시도 중…….]

“닥쳐.”

진혁은 으스러진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스템의 보조 따위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쇠사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쇠사슬을 끊어내려 할수록, 몸 안의 마기는 갈 곳을 잃고 폭주했다.

그때였다.

“그렇게 억지로 틀어막으려 하니 둑이 터지는 게야.”

은은한 목소리가 폭풍 속을 뚫고 들려왔다. 기계음의 소음도, 차원 너머 적들의 살기도 뚫지 못하는 평온한 노인의 음성. 낡은 도포를 입은 백발의 노인, 독고운이 허공을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화산(華山)의 검은 억지로 꺾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굽히고, 강물이 오면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무위(無爲)의 시작이지.”

독고운의 손이 진혁의 어깨에 닿았다. 순간, 진혁의 시야를 가득 채우던 붉은색 경고 메시지들이 일순간 빛을 잃었다.

“당신은…….”

“기계의 계산기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지. 자네가 지금껏 해온 것은 '무공'이 아니라 '연산'이었네. 마기를 강제로 쑤셔 넣고, 나노머신으로 억지로 꿰매는 것. 그것이 어찌 진정한 천마의 길이겠나.”

독고운은 진혁의 단전 부근에 맺힌 흉측한 마기의 덩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것은 천마의 저주가 아니야. 자네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틀이지. 자네는 스스로를 거대한 실험체로 규정하고,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어. 그 감옥을 부수려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진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부라네.”

독고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강진혁, 자네의 그 잘난 데이터도, 시스템의 보조도, 심지어는 이 빌어먹을 마기조차도.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말게. 물은 바위를 뚫지만, 바위와 싸우지 않아. 그저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곁을 흐를 뿐이지.”

독고운이 진혁의 가슴께에 검지를 올렸다.

“태청신공(太淸神功)의 이치를 빌려주겠네. 심법을 바꾸게. 제어하려 하지 말고, 내어주게. 몸 안의 모든 통로를 열어, 이 지독한 독기를 온 우주로 흘려보내게. 자네는 그릇이 아니라, 그릇을 지나가는 강물 그 자체여야 하네.”

진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동안 그는 시스템을 통해 마기를 수치화하고, 코어의 출력을 MW 단위로 쪼개어 제어했다. 그것이 강함의 척도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노인의 말은 그 모든 세계관을 뒤흔드는 망치질과 같았다.

“제어하지 마라……?”

“그렇지. 억지로 막고 있는 그 벽을 허물어라. 혈마병은 자네가 저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독기다. 그저 받아들여라.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어라.”

진혁은 눈을 감았다. 폭풍이 몰아치던 내면의 세계가 정적으로 변했다.

그는 억지로 쥐고 있던 단전의 출력을 놓아버렸다.

[시스템: 제어 로그 붕괴. 경고, 에너지가 범람합니다!]

“시끄러워.”

진혁은 시스템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 순간, 그의 몸 안에서 요동치던 마기가 폭발했다. 억지로 누르고 있던 둑이 무너지는 굉음이 진혁의 고막을 때렸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대신, 전신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도 뜨거운 해방감이 찾아왔다.

마기는 이제 혈관을 파괴하는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혁의 의지를 따라 흐르는, 우주의 근원적인 기운이 되었다.

“이게…… 무위인가.”

진혁의 몸 주위로 보이지 않는 파동이 일렁였다.

그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신서울 상공의 대기 중 마기가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뿜을 때는 차원 너머의 적들이 뿜어내는 살기를 정화하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독고운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훌륭하군. 기계의 육신을 입고도 인간의 도(道)를 깨닫다니. 이제 자네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에 없네.”

진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흑안(黑眼)의 깊은 곳에서 검은 빛의 성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실험체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가 법칙이 된 존재, 신천마(新天魔)였다.

“고맙습니다, 노인장.”

진혁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공간이 마치 유리창이 깨지듯 갈라졌다. 차원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천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보았다. 자신들이 사육하던 ‘그릇’이, 이제는 자신들을 사냥할 ‘포식자’로 변모했음을.

“자, 이제 시작하지.”

진혁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형상이 현현했다. 천마의 잔영. 하지만 이번에는 과거의 허상이 아니었다. 진혁 자신의 의지가 빚어낸, 진정한 마신(魔神)의 모습이었다.

그는 타워의 옥상에서 유유히 발을 내디뎠다.

중력조차 그를 붙잡지 못했다. 발끝마다 마기의 파동이 꽃처럼 피어났다. 차원 너머의 존재들을 향해, 그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냥하러 걸어 나갔다.

[시스템 경고: 오프라인.]

[운명 관리자 권한: 강진혁으로 이관.]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그의 발아래에서 멈췄다.

진혁이 허공에 멈춰 서서, 차원 균열 너머의 심연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니들이 만든 잔치다. 내가 그 끝을 맺어주마.”

검이 허공을 가르자, 신서울 전체를 덮고 있던 차원의 장막이 비명과 함께 찢겨 나갔다.

진혁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칠흑 같은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신(神)이라 불리는 자들의 거대한 군단이었다. 그들은 진혁을 비웃듯, 수만 개의 촉수를 뻗어왔다.

하지만 진혁은 웃었다.

그의 검 끝에서 시작된 무위(無爲)의 흐름은, 곧 심연 전체를 집어삼킬 파도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저, 강물이 바위를 덮어버리는 당연한 섭리였다.

진혁이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뒤로 신서울의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천지개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스템 로그: 0%.... 100%.... 초월 완료.]

강진혁의 검이, 심연의 심장을 겨누었다.

심연의 끝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데이터의 집합체이자,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 회로의 정점이었다. 진혁이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눈앞을 가로막던 차원 장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진혁을 응시했다. 그들은 신(神)이라 불리는 자들이자,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전락시킨 창조주들이었다. 그들의 형상은 기괴했다. 무수한 광섬유와 신경 다발이 얽혀 만들어진 거대한 다면체, 그리고 그 중앙에서 일렁이는 순수한 에너지의 핵.

“피험체 07호, 오류가 허용 범위를 초과했다.”

공간 자체가 울리는 듯한 기계적인 음성이 진혁의 뇌리를 직접 두드렸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강제적인 데이터 주입이었다. 진혁의 정신을 강제로 해킹하여 ‘실험체’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독고운이 가르쳐준 ‘무위’의 심법을 다시 한번 내면에서 돌렸다. 억지로 막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쏘아 보내는 데이터의 파동을 제 몸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마기와 융합시킨 뒤 다시 심연으로 흩뿌릴 뿐.

“오류라고?”

진혁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희에게는 오류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진화다.”

진혁이 허공에 검을 그었다. 검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공간이 뒤틀리며 차원 균열이 발생했다. 평범한 검강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논리를 파괴하고, 물리 법칙의 근간을 비트는 ‘무위의 검’이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진혁의 검이 허공을 휘젓자, 심연에 가득 차 있던 창조주들의 에너지 데이터가 소용돌이치며 진혁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고! 데이터 과부하! 에너지 순도 99.9% 초과!]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시스템 재설계 중...]

과거라면 폭주로 이어졌을 수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진혁은 강물이 둑을 넘듯 자연스럽게 그 힘을 흘려보냈다. 들이마신 에너지는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가 겪었던 혈마병의 잔재를 완전히 정화했다.

과거의 고통이, 이제는 그의 힘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것이 너희가 설계한 세계의 끝인가?”

진혁은 거대한 다면체를 향해 도약했다.

창조주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구축한 논리의 틀 안에서, 실험체 07호는 이미 제어 불가능한 변수였다. 수만 개의 촉수가 진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행성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연산의 결정체이자 물리적 질량이었다.

진혁은 검을 거두었다. 대신, 그는 양손을 활짝 펼쳤다.

“받아라. 너희들이 만든 이 세계의 섭리다.”

진혁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것은 마기(魔氣)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존재의 의지였다.

천마(天魔).

1,000년 전, 기계도 시스템도 없던 시절, 오직 육신 하나로 하늘을 뒤덮고 땅을 갈랐던 그 전설의 의지가 진혁의 몸을 빌려 현신했다. 그의 등 뒤에 나타난 거대한 마신은 검을 든 채, 창조주들이 세워둔 질서의 탑을 내려쳤다.

쿠오오오오!

심연의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창조주들의 다면체 표면이 금이 가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데이터들이 진혁의 의지에 의해 재구축되었다.

[데이터 재구조화 완료.]

[신천마신공, 제16식 - 천지개벽(天地開闢) 완성.]

진혁의 일격은 차원을 넘어 신서울의 밤하늘까지 닿았다. 신서울의 모든 이들이 올려다보는 하늘 위로, 거대한 검은 구름이 갈라지며 별빛 대신 심연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파멸이 아닌, 해방이었다.

“더 이상 너희의 시뮬레이션은 없다.”

진혁의 검이 다면체의 핵을 꿰뚫었다.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우주의 법칙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창조주들의 데이터가 진혁의 마기에 동화되어, 흩어지는 빛 가루가 되었다.

그것은 진혁이 단순히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했음을 의미했다. 이제 진혁은 단순히 강한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계의 새로운 법칙이자, 유일무이한 천마가 되었다.

창조주들의 비명이 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적막이 찾아왔다.

진혁은 홀로 심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몸은 이제 금속의 회로가 아닌, 순수한 마기로 이루어진 존재처럼 빛나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 종료.]

[당신은 이제, 당신 자신의 주인입니다.]

시야 한구석에 떠 있던 마지막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졌다. 진혁은 길고 긴 여행의 끝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신서울을 내려다보았다.

상층부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하층부의 어두운 그림자. 기업의 탐욕과 민중의 분노가 뒤섞여 있던 그 디스토피아의 풍경이, 이제는 진혁의 눈에 전혀 다른 질서로 보였다.

진혁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멸망해가던 차원의 틈이 아물고, 죽어있던 대지에 생명의 숨결이 돌았다.

그는 신(神)이 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낡은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증인이 되려 했을 뿐.

신서울의 광장.

진세린과 윤아영이, 그리고 니르바나의 잔존 세력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 칠흑 같은 검을 든 남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기계의 차가움이 없었다. 그곳에는 만물을 꿰뚫어 보는 평온함과, 억겁의 세월을 견뎌낸 천마의 위엄만이 서려 있었다.

“끝났나?”

윤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혁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박았다.

챙-!

맑은 파동이 신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파동이 닿는 곳마다 기업의 감시 장치들이 무력화되고, 억압받던 시민들의 코어가 자유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미소 지었다.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천마의 복수극은 끝났다.

그러나 그가 열어젖힌,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새로운 시대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강진혁, 그는 신서울의 밤하늘을 수호하는 전설이 되었고, 다시는 그 어떤 시스템도 인간의 의지를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새벽이었다.

진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혈관 속에는 나노머신 대신, 우주의 섭리가 흐르고 있었다.

“가자.”

그의 짧은 말 한마디에, 신서울의 모든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천마 강진혁이 써 내려간, 300화의 서사시가 담아낸 마지막 진리였다.

[프로토콜: 천마(天魔), 완결.]

다음 화 바로보기 ›
이 작품, 여기까지 어떠셨나요? ★ 별점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