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프로토콜 실패작 군단
플로팅 랩의 붕괴는 장엄했다. 고도 3만 피트, 성층권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강철의 성채는 강진혁이 휘두른 ‘멸천(滅天)’의 일격에 의해 중심축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막을 찢는 금속의 비명과 함께 화염이 공간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 대혼란 속에서도 강진혁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시스템의 보조 HUD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오직 그의 의지가 투영된 붉은 마기만이 선명하게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나온다.”
진혁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랩의 잔해 사이로 기괴한 형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이미 생물학적 존엄은 거세된 지 오래였다. 곳곳에 노출된 고압 케이블이 뱀처럼 몸을 휘감고 있었고, 심장 부근에는 출력을 강제로 증폭시키기 위해 이식된 과부하 코어가 불협화음을 내며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천마 프로토콜’의 초기 실험체들.
티타늄 그룹이 ‘천마’를 복제하려다 실패해 폐기했던, 짐승보다 못한 괴물들의 군단이었다.
[식별: 프로토콜 실패작 04호~52호]
[특이사항: 자아 없음, 마기 오염도 98%, 파괴 본능만 잔존.]
더 이상 시스템의 친절한 경고는 없었다. 오직 진혁의 감각이 직관적으로 그들의 위협을 읽어낼 뿐이었다.
“실패작이라…….”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가 나노머신의 동기화를 강제로 재편했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축한 마도(魔道)의 회로가 폭발적으로 개방되었다.
쿠우우웅!
진혁의 발밑으로 랩의 강화 타일이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다. 50여 구의 실패작들이 동시에 도약했다. 그들이 내지르는 기세는 하나하나가 절정 고수의 일격에 필적했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그저 느릿하게 움직이는 고철 덩어리들에 불과했다.
“너희에게는 안식조차 사치겠군.”
진혁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찰나의 순간, 가장 앞서 있던 실패작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챙-!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고주파 진동 검이 검집을 벗어났다. 그건 검이라기보다 차원을 가르는 선에 가까웠다. 진혁의 검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실패작들의 목과 가슴팍이 매끄럽게 분리되었다.
동력원이 파괴된 실패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드는 수십 구의 괴물들이 진혁의 퇴로를 차단하며 자폭 코어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그들의 피부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파괴인가, 아니면 자폭으로 길동무라도 삼겠다는 건가.”
진혁은 검을 거두고 왼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 만법귀마(萬法歸魔)]
그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소용돌이쳤다. 주위의 공간이 뒤틀리며 실패작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주하는 에너지가 강제로 진혁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쿠르르릉!
폭발 직전이었던 50개의 코어가 순식간에 진혁의 단전으로 역류했다. 실패작들의 몸은 동력을 잃고 껍데기처럼 굳어버렸다. 진혁은 그 거대한 에너지를 자신의 기혈 안에서 단 한 번의 회전으로 정제했다. 현대 기술과 고대 마공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순수한 진기(眞氣)가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이것이 진짜 내 힘이다.’
시스템이 계산해주던 출력값이 아니다. 오직 스스로가 감당하고, 다스리고, 창조해낸 경지. 진혁은 그 에너지를 다시 검 끝으로 밀어 넣었다.
콰아아아-!
검 끝에서 뻗어 나온 검강이 랩의 벽면을 뚫고 지나갔다. 직선거리 50미터 내에 있던 모든 장애물이 먼지로 분해되었다. 통로가 확보되자, 진혁은 주저 없이 붕괴하는 요새의 심장부를 향해 질주했다.
그때였다.
진혁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진동. 단순한 기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인간의 내공과 기계의 광기가 뒤섞인, 낯익지만 훨씬 더 잔혹하게 변질된 살기(殺氣).
진혁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실패작 군단들 사이로, 한 남자가 으스러진 철판을 걷어차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과거 지하 격투장에서 진혁과 생사를 오가는 대결을 펼쳤던, 그리고 시스템의 개조 실험에 희생되어 자취를 감췄던 존재였다.
“……철호?”
남자의 머리 절반은 기계로 대체되어 있었고, 뇌 회로가 외부로 노출된 채 푸른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오직 진혁이라는 개체만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는 '광마(狂魔)' 김철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명백히 '이현도'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광마는 입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기계음을 뱉어내며 진혁을 향해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그의 손끝에서 사출되는 고주파 블레이드가 공간을 갈랐다. 이전의 격투 실력에 티타늄 그룹의 군사 개조가 더해진, 명백한 '살인 기계'였다.
진혁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저 베어 넘기면 끝날 상대가 아니었다. 광마의 몸 곳곳에는 진혁이 1부 시절부터 보아왔던 '천마 프로토콜'의 역작들이 이식되어 있었다.
이현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혁의 가장 아픈 기억을 꺼내 들었다. 광마를 죽이는 것이 곧 진혁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되도록 설계한 악의였다.
“이현도, 끝까지 추잡하군.”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광마의 공격이 쇄도했다.
챙! 챙! 챙!
두 사람의 격돌이 벌어질 때마다 주변의 잔해들이 불꽃이 되어 튀었다. 광마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혁의 심장을 노렸다. 뇌 회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 전자기장이 진혁의 마기를 교란하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광마의 공격을 받아내는 대신, 그의 기혈을 흐르는 인공 회로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다.
‘구원할 수 있다.’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 광기의 굴레를 찢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파괴를 위한 검이 아닌, 얽힌 회로를 끊어내고 봉인된 자아를 끌어내기 위한 '회수(回收)'의 마기였다.
“철호야, 이제 그만 쉬어라.”
진혁의 검이 광마의 가슴팍,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제어 코어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괴가 아닌, 강제 동기화의 해제였다.
지지직-!
광마의 전신에서 불꽃이 튀었다. 폭주하던 에너지가 진혁의 검을 타고 역류하며 광마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진혁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비틀었다. 자신의 내공을 광마의 뇌 회로 속으로 주입했다. 기계적인 데이터의 흐름을 인간의 의지로 덮어쓰는, 신천마신공만이 가능한 극의였다.
“으으으…… 으으…….”
광마의 붉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진, 혁……?”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랩의 천장이 완전히 붕괴하며 거대한 철골들이 두 사람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진혁은 광마를 안고 잔해 밖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는 너무나 거대했다. 플로팅 랩의 메인 코어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신서울 하늘 전체를 뒤흔드는 대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 폭발의 중심부 너머, 찢어진 차원의 틈새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현도가 마지막으로 소환한 ‘그것’.
시스템이 사라진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 강림한, 차원 너머의 지배자였다.
진혁은 품 안에 쓰러진 광마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고,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그의 손에 든 검이 다시금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그에겐 세상을 베어버릴 힘이 있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콰아아아아!
신서울의 밤하늘이, 진혁이 긋는 멸천의 궤적을 따라 다시 한 번 갈라지기 시작했다.
진혁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중력을 무시한 도약은 마치 한 마리의 검은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았다. 등 뒤에서 요새가 완전히 붕괴하며 뿜어내는 화염의 파도는 그에게 추진력을 더하는 보조 엔진이 되었다.
차원의 틈새에서 쏟아져 나온 거대 존재는 신서울의 고층 빌딩 숲조차 장난감처럼 보이게 할 만큼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에너지의 집합체이자, 우주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시스템이 배양해 온 ‘관리자’의 화신이었다.
“실험체 07호, 프로토콜 위반을 선언한다.”
기괴한 공명음이 고막이 아닌 뇌리를 직접 울렸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데이터의 파동이었다. 진혁의 주변 공간이 억눌렸다. 관리자가 시전한 것은 중력장 제어였다. 3만 피트 상공의 대기가 순식간에 진공으로 변하며 진혁의 호흡을 앗아가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비웃음으로 답했다.
“시스템은 이미 죽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실험체가 아니라, 그 프로토콜을 찢어발긴 천마(天魔)다.”
진혁의 단전에서 마기가 폭주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나노머신이 열을 내며 피부 위로 붉은 문신처럼 회로를 그려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13식, ‘멸천’이 검 끝에 응축되었다.
공간이 비틀렸다. 관리자가 휘두른 차원 절단 공격이 진혁의 검강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앙-!
두 거대한 힘의 충돌은 신서울의 밤하늘을 낮처럼 밝게 물들였다. 3만 피트 상공에서 발생한 충격파는 대기권을 흔들며 도심의 창문들을 일제히 박살 냈다. 티타늄 타워의 꼭대기에서 이를 지켜보던 생존자들은 그 눈부신 광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진혁은 후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폭풍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 역류.’
관리자가 뿜어내는 에너지 파장을 진혁의 마기가 감싸 안았다. 역류하는 힘의 물결은 관리자의 본질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데이터의 덩어리였던 관리자에게, 진혁의 순수한 의지력은 해독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다.
“너희가 만들어낸 이 세계의 질서가, 결국 내 마기 한 줌에 허물어지는구나.”
진혁의 검이 관리자의 중심부를 관통했다. 파괴가 아니었다. 그것은 데이터의 강제 흡수였다. 관리자가 유지하던 차원의 결계가 산산조각 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방대한 정보들이 진혁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속에서 진혁은 보았다.
이현도가 그토록 갈망했던 ‘창조주의 좌표’를. 그리고 시스템이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자신을 ‘그릇’으로 만들려 했는지에 대한 우주적 음모를.
“창조주…….”
진혁은 검을 뽑아내며 허공에 흩어지는 관리자의 잔해를 응시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차원의 문 너머에는 아직 수천, 수만 명의 ‘관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진혁의 몸이 지면을 향해 낙하했다. 광마 김철호가 쓰러져 있는 잔해 위로 착지한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찢어놓은 검흔을 바라보았다.
광마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지만, 맥박은 안정되어 있었다.
[Warning: 차원 침식율 42% -> 12%로 감소.]
더 이상 시스템의 친절한 HUD는 없었지만, 진혁은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신서울의 밤은 끝났다.”
그의 등 뒤로 무너지는 요새의 불길이 마치 장엄한 신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진혁은 광마를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이제 신서울의 복수를 넘어선, 우주를 향한 광기 어린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창조주들이 만들어놓은 낡은 판을 엎어버릴 시간. 진혁은 자신이 걸어갈 길이 피로 물든 수라의 길일지라도, 그 끝에서 마주할 진정한 자유를 위해 멈추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그때였다.
진혁의 의식 속에 남아있던 관리자의 데이터 파편이 돌연 기괴한 신호를 보냈다.
‘07호, 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심연의 끝에서 너를 기다리는 것은 네가 죽인 진무극조차 범접하지 못한… 진짜 공포다.’
진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닫혀가던 차원의 틈새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안광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진혁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기다려라. 머지않아 내가 그곳으로 가서, 너희들의 왕좌를 부숴줄 테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그의 흑발을 흩뜨렸다. 신서울의 영웅이자, 스스로 신이 된 천마(天魔)의 새로운 전쟁이 이제 막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