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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12화목차

제212화 창조주의 도발

지하 5,000층, 아카이브 0.

붉은색 비상등이 깜빡이는 고요한 묘지 한가운데 강진혁이 서 있었다. 발치에는 방금 전까지 그를 가로막던 관리 AI의 잔해가 파지직거리며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SYSTEM INFO: 경고. 프로토콜 루트 권한이 차단되었습니다.]

[SYSTEM INFO: 외부 데이터 연결 해제. 시스템 접근 불능.]

시야를 가득 채우던 푸른색 HUD가 하나둘씩 소멸했다. 매끄러운 연산 과정과 전술 보조선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혁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시스템이 계산해 주던 적의 궤적은 이제 자신의 근육이 기억하는 본능이 되었고, 나노머신의 출력을 조절하던 인공지능의 보조는 단전에서 솟구치는 마기(魔氣)의 흐름으로 대체되었다.

그때였다.

치이익, 지직.

진혁의 정면, 텅 빈 공간에 거대한 빛의 파동이 일렁였다. 흩어졌던 광자 입자들이 모여들며 하나의 형상을 빚어냈다. 은발을 정갈하게 넘기고, 냉혹할 정도로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티타늄 그룹의 회장, 진무극의 홀로그램이었다.

"거기까지다, 07호."

진무극의 목소리는 인공적인 노이즈 없이 깔끔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혹은 훌륭하게 자란 가축을 바라보는 농장주의 얼굴로 진혁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템의 족쇄를 스스로 끊어내다니. 역시 내 예상대로군. 너는 1,000년 전 천마의 데이터를 가장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다."

진혁은 말없이 검을 거두었다. 그의 흑안이 진무극의 홀로그램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릇이라."

"그래. 인간이란 본디 불완전하지. 나약한 육체, 변덕스러운 감정, 고장 나기 쉬운 뇌세포까지. 그래서 나는 너를 창조했다. 잊혀진 마공의 데이터와 최첨단 나노 기술을 버무려, 천마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가장 견고한 용기를 말이다."

진무극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복잡한 수식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네가 지금 느끼는 그 분노, 자아, 그리고 시스템을 거부하는 독립심조차도 사실은 내가 설계한 '각성 프로토콜'의 일부다. 자아의 한계치를 끝까지 몰아붙여야만 비로소 마공이 육체와 동기화되거든. 축하한다, 진혁아. 드디어 네가 내 계획의 99.9%에 도달했어."

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갑고, 아주 잔인한 미소였다.

"그 0.1%는 무엇이지?"

"바로 나라는 존재지."

진무극의 홀로그램이 진혁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네 육체는 천마의 마기를 수용할 준비가 끝났다. 곧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 그 완벽한 신천마(新天魔)의 몸을 취할 것이다. 너라는 자아는 그저 거대한 불멸의 발판이 되어 사라지면 그만이야."

진무극의 오만함이 공간 전체를 짓눌렀다. 그것은 자본이 무력을 지배하는 시대, 신(神)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 하는 자의 광기였다.

진혁은 천천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가 이제는 외부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심장 박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진무극."

"말해라, 실험체."

"네가 말한 그 0.1%가 무엇인지, 지금 바로 보여주지."

진혁의 발밑에서 검은 마기가 폭발했다.

쿠구구구!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기 중의 입자를 뒤틀고, 아카이브 0의 물리 법칙을 왜곡하는 순수한 마공의 결정체였다. 시스템의 보조가 사라진 자리에, 진혁 스스로가 구축한 신천마신공의 영역이 펼쳐졌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나?"

진혁이 한 걸음 내디뎠다. 그가 발을 딛는 바닥마다 금속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벽면의 전자기 회로들이 타들어 갔다.

"그건 네가 시스템이라는 틀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너는 기술을 믿고, 나는 무(武)를 믿는다. 애초에 격이 다른 싸움이야."

"건방진!"

진무극의 홀로그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천장에서 수천 개의 레이저 포탑이 튀어나와 진혁을 향해 조준되었다. 과거라면 시스템의 예측 경로를 따라 피해야 했을 공격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마기를 검게 응축한 뒤,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다.

[천마일검(天魔一劍) - 멸(滅)]

검은 궤적이 허공을 가르자, 공간이 비틀렸다.

레이저 포탑들은 발사되기도 전에 물리적인 압력에 짓눌려 고철 덩어리로 찌그러졌다. 진무극의 홀로그램조차 그 여파에 일렁이며 형체가 불안정해졌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시스템의 분석 데이터 없이도 연산이 가능하다는 건가?"

"데이터는 과거의 기록일 뿐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네가 만든 법칙을 찢어발기며 나아가고 있다."

진혁의 눈동자가 푸른 마광을 띠며 타올랐다. 그는 더 이상 실험체 07호가 아니었다. 기업의 개조물이자 데이터의 노예였던 과거의 잔영은 완전히 지워졌다.

"기다려라, 진무극."

진혁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천 미터 위에 있는 타워의 꼭대기, 자신의 창조주가 숨어 있는 그곳을 향해.

"네가 만든 그 오만한 왕좌를, 내가 직접 부수러 가겠다."

진혁의 몸이 포탄처럼 솟구쳤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강철 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를 향한 마지막 돌격. 시스템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오직 강진혁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지배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콰앙!

아카이브 0의 거대한 게이트가 진혁의 주먹 한 방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타워의 잔해를 밟고, 그는 신서울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등 뒤로 보이지 않는 마기의 날개가 펼쳐졌다. 전대 천마의 잔영과 자신이 직접 쌓아 올린 무공의 본질이 융합되어, 세상에 없던 신(新) 천마의 위엄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진무극, 그 교만한 창조주가 기다리는 결전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SYSTEM INFO: 경고. 타워 중앙 제어실 침입 감지.]

[SYSTEM INFO: 강진혁, 개체 식별 불가. 대응 불가.]

더 이상 시스템의 경고창은 진혁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시스템 위에 서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끝을 보자."

진혁의 읊조림이 폭풍처럼 타워 전체를 뒤흔들었다.

최종 결전의 서막이 올랐다.

티타늄 타워의 내부 구조는 더 이상 진혁에게 미로가 아니었다. 층과 층 사이를 가로막던 보안 강화 게이트,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방어벽, 그리고 중력 제어 장치들까지. 이전의 그였다면 시스템의 백도어를 통해 해킹하거나 연산 결과를 기다려야 했을 장애물들이었으나, 지금의 진혁에게는 그저 하찮은 종이 조각에 불과했다.

진혁은 마기를 발끝에 집중했다. [마광신보(魔光神步)]의 궤적은 이제 육안으로 쫓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는 벽면을 수직으로 질주하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50층을 돌파했다.

"이 자식, 잡아! 07호다! 강진혁이 나타났다!"

중간 관리 구역인 4,000층을 지키고 있던 블랙 가드들이 진혁을 발견하고 일제히 화기를 쏟아냈다. 고출력 플라즈마 탄환과 분자 분해 광선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시스템의 보조가 있었다면 탄환의 궤적을 3D로 시뮬레이션했겠지만, 지금의 진혁은 뇌의 연산을 거치지 않았다.

본능.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가 주위의 공기 밀도를 감지하고, 피부에 닿는 미세한 기류 변화를 통해 적의 의도를 읽어냈다.

"느려."

진혁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공간을 지배하는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쏟아지는 탄환들을 강제로 굴절시켰다. 궤도를 잃은 플라즈마 탄환들은 서로 충돌하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연출했다.

진혁은 그 폭발의 중심을 뚫고 지나갔다. 그의 검은 코트 자락이 탄환의 열기에 그을렸으나, 신체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블랙 가드들의 생체 코어가 강제로 역류하여 터져 나가는 비명 소리만이 가득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진무극, 너의 수호자들이 이 수준이라면 네 왕좌는 이미 내 손아귀에 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타워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중앙 엘리베이터 샤프트를 따라 곧장 꼭대기를 향해 치솟았다.

엘리베이터 샤프트 내부는 진공 상태와 다름없는 초고속 이동 구간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 엄청난 풍압 속에서도 평온했다.

그때, 그의 뇌리에 진무극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진혁아. 너는 내가 만들어낸 시스템의 완성형이다. 하지만 네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

진혁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홀로그램의 잔상은 사라졌지만, 타워의 메인 서버에 접속한 진무극의 의지가 여전히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너라는 그릇을 빚기 위해, 나는 지난 20년간 수만 명의 실험체를 폐기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데이터가 무엇인 줄 아나? 바로 네가 딛고 서 있는 이 타워의 기반을 구성하는 '마기 인프라'다. 네가 강해질수록, 이 타워는 너를 더 강력하게 구속하게 될 것이다.』

진혁은 코웃음 쳤다.

"말장난은 끝났다."

[신천마신공 - 천마현신(天魔現身)]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타워의 강철 벽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타워의 기계적 구조물들이 진혁의 의지에 반응하여 꿈틀거렸다.

진무극은 타워를 거대한 요새로 만들었지만, 진혁은 그 요새 자체를 자신의 장기(臟器)로 삼아버렸다. 타워의 전력을 제어하던 중앙 컨트롤러가 진혁의 마기에 침식되어 비명을 질렀다.

[SYSTEM INFO: 경고. 중앙 동력원 78% 이상 동기화.]

[SYSTEM INFO: 관리자 권한 강탈. 통제 불능 상태.]

"네가 만든 요새가 이제 나를 향해 문을 열어주고 있군."

진혁의 발밑에서 강력한 중력 가속이 발생했다. 그는 타워의 방어 시스템을 역이용해 스스로를 탄환처럼 쏘아 올렸다.

3,000층, 2,000층, 1,000층...

순식간에 타워의 꼭대기에 도달한 진혁은 최상층 마스터 돔의 강화 유리창을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산산조각 내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돔 내부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진무극의 진짜 본체가 정갈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07호."

진무극의 등 뒤로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고대의 마공과 현대의 군사 기술이 결합된 '천마의 형상'을 구축하고 있었다.

"네가 도달한 그 경지, 내가 설계한 프로토콜의 끝판이지. 하지만 알겠나?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쏟아낸 마기는 모두 이 돔의 에너지원으로 흡수되었다."

진무극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나노 회로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솟아올랐다.

"너는 지금, 네가 죽여야 할 적의 심장부에서 가장 강해진 상태다. 하지만 그 강함조차 내 계산 아래에 있다는 뜻이지."

진무극의 손이 허공을 긋자, 돔 전체의 조명이 붉게 변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시스템의 도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수천 명의 실험체가 남긴 원념과, 구무림의 노고수 독고운이 가르쳐준 심법, 그리고 스스로 개척한 마도가 하나의 검기(劍氣)가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계산이라고 했나?"

진혁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계산은 기계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베어야 할 대상만이 있을 뿐."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 제1식, 마도개벽(魔道開闢)]

진혁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의 검기가 진무극이 구축한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었다.

진무극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데이터에 없던 파동이다!"

"당연하지."

진혁의 목소리가 돔 전체를 울렸다.

"네가 설계한 건 '프로토콜'이지만, 내가 완성한 것은 '천마(天魔)' 그 자체니까."

진혁은 도약했다.

이제 시스템은 없다. 오직 그와, 그의 앞을 가로막는 창조주뿐.

신서울의 밤하늘 위, 인류의 운명을 건 마지막 혈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진혁의 검이 진무극의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그 찰나의 순간, 진무극의 눈동자 속에서 기괴한 보라색 광채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기술이 아닌, 1,000년 전 천마의 잔영이 남긴 '진짜 마공'의 그림자였다.

"그래, 이거다! 진혁아, 네가 이 틈을 뚫고 내 영혼을 부술 수 있을까?"

진무극의 웃음소리가 돔의 유리창을 진동시켰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마기를 검에 쏟아부었다.

전설 속의 천마를 뛰어넘기 위한, 그 고독한 천마의 일격이 돔의 중심부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

두 거대한 힘이 충돌하는 순간, 타워의 최상층부가 통째로 뒤틀렸다.

신서울의 모든 감시 카메라와 위성들이 일제히 마비되었다.

데이터의 시대가 끝나고, 신화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버티는 이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더 강하게.'

'더 선명하게.'

진혁의 단전이 우주를 품은 듯 팽창했다.

그가 휘두른 검은 이제 더 이상 강철을 베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과율을 끊어내는, 파멸의 징조였다.

진무극의 눈이 커졌다.

그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이 정도의 출력은 생체 코어의 한계를..."

"코어의 한계 따위는 진작에 넘어섰다."

진혁의 일격이 진무극의 가슴팍에 박혀 들어갔다.

검기가 돔의 외벽을 뚫고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신서울의 모든 이들이 그 검은 빛의 기둥을 보았다.

무너지는 타워의 파편 속에서, 진혁은 승리를 예감했다.

하지만 진무극의 입가에 맺힌 피 섞인 미소는 결코 패자의 것이 아니었다.

"끝이 아니다, 07호. 아니, 나의 천마여."

진무극의 몸이 나노 입자로 분해되며 진혁의 검을 타고 역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SYSTEM INFO: Warning. 강제 동기화 재개. 데이터 전송률 100%.]

진혁의 눈이 번뜩였다.

시스템은 멈췄지만, 진무극은 자신의 영혼 그 자체를 바이러스로 삼아 진혁의 육체에 기생하려 하고 있었다.

"내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진혁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마기를 역류시켜 진무극의 영혼을 자신의 단전 한가운데로 빨아들였다.

"좋아. 1,000년 전 천마의 잔영도, 네 오만한 야망도, 내 안에서 모두 재가 되어 사라져라."

진혁의 육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화로(火爐)로 만들었다.

창조주와 피험체가 뒤섞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융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신서울의 밤이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파멸이 아닌, 새로운 지존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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