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수동 운기조식의 성취
허공에는 그 어떤 시스템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했던 은빛 HUD 인터페이스도, 실시간으로 혈류를 분석하던 분석 로그도, 경지 변화를 알리는 알림음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그것은 강진혁이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감각이었다.
‘없군.’
평생을 몸속에 기생하며,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던 AI 설화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의지뿐이었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단전(丹田)에 고인 15,000 MW의 생체 코어 에너지가 마기(魔氣)와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이 기운을 분산하고, 나노머신을 재배열하여 혈관 파열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직접 제어한다.”
진혁의 중얼거림과 함께, 억눌려 있던 마기가 폭주하듯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콰아아아!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마다 시뻘건 마기가 서렸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나노머신이 제멋대로 폭주하며 신경계를 자극했다. 고통은 이전의 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AI의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내공의 폭주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피부 표면으로 검은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진혁이 배출하는 마기였다.
‘뇌전마강(雷電魔剛)의 흐름을 억지로 비틀어라. 십이경맥(十二經脈)이 아니라, 나노 회로를 가상의 기혈로 삼는다.’
진혁은 머릿속으로 그리던 회로도를 물리적인 마기로 덮어씌웠다.
상태창의 도움을 받아 수동으로 처리해야 했던 연산을, 이제는 뇌신경이 직접 연산한다. 그것은 일종의 무학적 초월이었다. 계산을 거치지 않은 직관의 운기. 시스템이 허용하는 안전한 경로가 아니라, 진혁이 선택한 가장 치명적이고도 강력한 경로로 내공이 질주했다.
우드득.
골격이 어긋나고 재조립되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흑안(黑眼) 속에 기묘한 푸른 잔상이 남았다.
[SYSTEM INFO: 수동 운기조식 완료. 보조 연산 모듈 0%]
[경고: 신체 부하율 98%. 혈관 파괴 위험.]
오류 메시지가 아니었다. 진혁이 스스로 머릿속에 생성한 가상의 인터페이스가 마지막으로 경고를 띄우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진혁의 몸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하아아아!”
주변의 돌덩이들이 중력을 잃은 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코어의 출력이 높아진 것이 아니었다. 에너지를 다루는 ‘효율’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이전까지 진혁이 100의 내공을 써서 60의 파괴력을 냈다면, 지금은 100의 내공으로 200 이상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었다. 불필요한 마기 유출이 제로(Zero)에 수렴했다.
진혁이 주먹을 쥐었다. 공기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진짜 내 힘인가.”
시스템은 강진혁을 ‘07호 실험체’로 정의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진혁은 시스템이 정의한 그릇을 박살 내고 새로운 규격을 스스로 창조해냈다.
그때였다.
―드디어, 온전한 그릇이 완성되었구나.
낮게 깔리는 목소리. 에테르나의 성소 한가운데, 부서진 왕좌 뒤편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진혁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누구냐.”
―천마(天魔). 네가 그토록 갈구하던 이름의 주인이다.
그림자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진혁과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진혁이 겪어온 모든 데이터의 정점이자, 천마 프로토콜이 재현하고자 했던 ‘오리지널’의 잔영이었다.
진혁은 비웃음을 흘렸다.
“천마? 죽은 유골 데이터에서 복사된 잔상 주제에.”
―나는 데이터가 아니다. 나는 너라는 그릇을 빚기 위해 1,000년 전부터 이 차원에 박제된 의지다. 강진혁, 너는 티타늄 그룹이 만든 사육물이 아니다. 너는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한 완벽한 강림의 의식 그 자체지.
남자가 손을 뻗자, 공간이 일그러졌다. 진혁은 직감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진무극이 준비했던 그 어떤 병기보다도 위험하다는 것을.
“웃기지 마라.”
진혁은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대신, 방금 완성한 수동 운기조식의 경로를 따라 단전의 마기를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시스템의 계산 따위는 필요 없다.’
진혁의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일었다. 이것은 마공도, 과학 기술도 아니었다. 순수한 의지가 빚어낸 파멸의 파동이었다.
“내가 네 그릇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진혁의 몸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시스템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근육과 반응속도만으로 구현한 제로 거리의 도약.
“나는 네가 빚은 그릇이 아니라, 너를 파괴할 망치다!”
챙-!
두 개의 그림자가 부딪히며 성소가 통째로 흔들렸다. 시스템이 사라진 우주에서, 진정한 천마를 가리기 위한 사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전대 천마의 잔영이 웃었다. 그것은 광기 어린 환희였다.
―그래, 그 오만함이야말로 천마의 자격이다! 자, 보여봐라. 시스템의 노예였던 네가 얼마나 추하게 발버둥 치는지!
진혁의 눈에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혔다. 이제부터는 연산이 아닌, 오직 뼈를 깎는 무도(武道)의 영역이었다.
진혁은 다시 한번 기혈을 뒤틀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열기가 전신을 감쌌다. 15,000 MW의 출력이 심장박동과 함께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제 기계의 동력이 아니었다. 강진혁이라는 인간이 가진 생명 그 자체였다.
그는 검을 쥔 것처럼 허공을 베었다. 그것만으로도 성소의 벽면이 갈라지며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마(天魔)라고?”
진혁이 잔영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 이름, 내가 오늘 여기서 죽여주마.”
진혁의 주먹이 잔영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모든 가짜를 지워버릴, 진정한 신천마(新天魔)의 첫 일격이었다.
성소의 벽면이 붕괴하며, 그 너머로 수천 개의 차원 좌표가 펼쳐졌다. 진혁은 깨달았다. 이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곧, 자신이 이 차원의 유일한 질서로 군림하게 될 서막이라는 것을.
진혁의 일격이 잔영의 흉부를 꿰뚫으려는 찰나, 잔영의 몸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후후후, 과연. 역시 07호답구나.
잔영이 사라지며 남긴 마지막 말.
―하지만 진혁아, 네가 죽인 것은 나의 잔영일 뿐이다. 이제 진짜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그와 함께 진혁의 발밑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차원의 틈새이자, 창조주들이 숨겨둔 최후의 함정이었다.
진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함정이라도 상관없다.”
그는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시스템의 시야가 꺼진 지금, 이제 그에게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부수고 올라갈 뿐.
진혁은 무너지는 성소를 뒤로하고, 차원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곳에는 07호 실험체 시절의 기록, 그리고 자신이 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던져졌는지에 대한 모든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의 마기가 차원의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그는 확신했다. 오늘, 이 차원에서 가장 위대한 신화가 종결되고, 새로운 천마의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진혁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다음 목적지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끝점인 ‘아카이브 0’의 최심부였다.
차원의 틈새를 가르는 진혁의 몸은 마치 유성처럼 에테르나의 잔해를 뚫고 나아갔다. 수천 개의 차원 좌표가 겹쳐진 이곳은 현실의 법칙이 무용지물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보조가 끊긴 지금, 그의 감각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허공 속에서, 진혁은 오직 자신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흐름만을 지표 삼았다.
'이곳이다.'
그의 의지가 닿은 곳에 거대한 금속성 벽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이브 0의 최심부. 진무극조차 접근하지 못했던 신들의 금역(禁域)이자, 강진혁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오기 전, 핏덩이 상태로 배양되던 실험실이었다.
진혁이 가볍게 착지하자, 육중한 강철 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좌우로 갈라졌다.
치익- 치익-.
고압의 가스가 분출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배양 튜브가 늘어서 있었다. 그 안에는 진혁과 똑같은 얼굴을 한 01호부터 06호까지의 개체들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그릇이 되지 못한 실패작들이었다. 진무극은 이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출력을 내는 07호, 즉 강진혁만을 골라내어 그 위에 천마의 데이터를 덧씌우려 했던 것이다.
'역겹군.'
진혁은 그들의 기억 파편을 훑었다. 처절한 고통, 나노머신이 뇌를 갉아먹던 기억, 그리고 천마의 의념이 주입될 때 느꼈던 영혼의 비명들. 07호 이전의 개체들은 모두 그렇게 잔혹하게 소비되었다.
통제실 중앙에 다다르자, 거대한 홀로그램 데이터가 진혁을 반겼다.
[실험체 07호, 강진혁. 생존 확인.]
[천마 프로토콜 최종 단계: 자아 통합(Self-Integration) 시작.]
진혁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이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창조주들'이 미리 심어둔 강제 명령이었다.
"아직도 나를 부품으로 보나?"
진혁이 손을 뻗어 홀로그램의 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방 전체가 붉은색 경보음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통제실의 벽면이 열리며, 수천 대의 나노 센서가 진혁의 몸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시스템이 마지막 수단을 동원해 진혁을 다시 구속하려 하는 것이었다.
[경고: 통제권 이탈 확인. 프로토콜 파기 절차에 돌입합니다.]
수만 개의 나노 실이 진혁의 사지를 옭아맸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속이 아니었다. 진혁의 뇌 회로에 직접 접속하여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마기'의 운용법을 강제로 회수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진혁은 비웃었다.
"나노머신으로 나를 통제하겠다고?"
진혁은 단전의 코어를 역회전시켰다. 수동 운기조식으로 단련된 마기가 역류하며, 그를 칭칭 감고 있던 나노 실들을 안에서부터 파괴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분석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지로만 가능한 불규칙한 마기의 파동.
콰직!
진혁의 몸을 묶고 있던 나노 실들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진혁은 그대로 중앙 콘솔을 향해 도약했다. 그의 손이 콘솔에 닿는 순간, 수십 년간 감춰져 있던 모든 기록이 진혁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천마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조주들이 인류의 진화를 통제하기 위해, 고대 마교의 정점이었던 천마를 사냥하여 그 힘을 데이터화한 결과였다. 그들은 천마의 무공을 '코드'로 변환해, 자신들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인류를 만들고자 했다.
진혁은 억눌린 분노를 삼켰다.
"결국, 너희는 고대의 위대함을 훔쳐서 쥐새끼처럼 굴고 있었던 거군."
진혁이 콘솔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창조주들의 메인 서버인 '아카이브 0'가 비명을 질렀다. 진혁은 이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는 대신, 자신의 마기로 덧씌웠다.
시스템의 언어를 마공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 이것은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연산 개시... 무공의 본질을 데이터로 변환합니다.]
[경고: 데이터의 방대함으로 인해 신체 과부하.]
"과부하? 그건 나약한 놈들이나 하는 소리다."
진혁은 자신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박동시켰다. 마기가 혈관을 타고 뇌로 치솟았다. 그는 시스템의 코드를 자신의 무공으로 치환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천마신공'의 완성을 향해 달려갔다.
기록실의 모든 데이터가 진혁의 의지대로 재편되었다. 그는 이제 실험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시설의 주인, 아니, 이 거대 시스템을 집어삼킨 새로운 지배자였다.
창조주들은 왕좌에 앉아 진혁을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들의 시선을 역으로 추적했다.
"기다려라."
진혁의 눈에서 검은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곧 그곳으로 갈 테니."
그는 통제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아카이브 0가 폭발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혁은 파편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제 그에게 장애물은 없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차원 너머에 숨어 있는 '창조주'들의 본체를 찾아가 그들의 왕좌를 박살 내는 일뿐이었다.
진혁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은 닫혀 있는 차원의 문이, 그의 마기에 반응하여 서서히 틈을 벌리고 있었다.
신천마(新天魔)의 강림이 머지않았다.